서울시의 반지하 전면 금지 대책에 대하여
가장 안전해야할 공간인 집은 아이러니하게도 비가 쏟아지자 탈출해야만하는 공간이 되었다. 2022년 8월 수도권 폭우로 동작구의 52세 여성이, 관악구의 일가족 3명이 반지하 주택에서 목숨을 잃었다.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집을 짓는 기준은 건축법이지만, 집을 고르는 기준은 돈이 된다. 가난한 이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건강과 안전을 담보로 월세와 보증금을 낮춘다. 심지어는 법을 피해서라도.
집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무엇일까? 외부의 위험요소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숨겨주는 곳(동굴)이 집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일 것이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노숙자의 역을 들 수 있다. 집이라는 것은 우리가 잠을 자는 곳이다. 여행 등으로 본래의 집을 이용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잠'을 잘 곳을 찾는다.
그렇다면 집에는 누워서 잘 공간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누군가 동굴을 집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을 생존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법을 통해 인간다운 집의 기준을 정한다. 안전해야 하고, 깨끗해야하고, 아늑해야 한다. 이것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보장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사야되는 권리는 기본권이 될 수는 없다.
집의 채광, 위치, 크기, 위생 등은 숫자로 바뀌어 집의 가격이 된다. 싸고 좋은 물건이라는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저렴한 물건을 원한다면 안좋은 물건을, 좋은 물건을 원한다면 비싼 물건을 사야 한다. 집의 질이 아닌 가격이 주거 공간 선택의 기준이 되면 우리는 더 안좋은 집을 찾게 되고, 반지하는 그 최종점에 있을 것이다. 습할수록, 어두울수록, 더러울수록, 위험할수록 저렴하다.
지난 수해로 사망 사고가 발생하자, 서울시는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여기서 쟁점이 발생한다. 반지하 주택을 없애면, 그곳에 살 던 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자신들이 자신의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곳이 반지하라면, 정부는 그들에게 더 좋은, 즉 더 비싼 곳에서 살게할 권리가 있는가? 사람 살 곳이 안되는 반지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역설적으로 집은 저렴할수록 비싸다.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한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게도 집이 비싸기 때문이다. 대학가의 고시원 등에 사는 이들은 타워팰리스 등의 고급 아파트보다 더 많은 평당 임대료를 내고 있다. 고급 주택이 저가 주택보다 훨씬 더 비싼 인테리어와 주거 시설을 갖췄음에도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이들에게 더 안좋은 물건을 더 비싸게 파는 시장실패는 지나치게 비싼 주택의 가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은, 오히려 부자들보다도,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도시 최상부 시스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사회 인프라를 떠나서는 기본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가난한 자들의 도시) 그러나이들이 도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주택을 가지기는 어렵다. 서울 평균 집값이 10억을 넘고 아무리 저렴한 아파트를 찾아도 최소한 5억을 넘는다. 당장 출근하고, 학교를 다녀야할 이들이 찾는 곳은 결국 가장 저렴한 곳이 된다.
그 누구도 반지하에 살고 싶은 이들은 없다. 다만 저렴한 곳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특히 도시는 저렴한 곳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 않다. 땅값이 비쌀수록 건물은 더 비싸진다. 낙후된 주택이 철거되면 초고급의 오피스텔과 아파트가 새롭게 지어진다. 고급 시설은 비싼 땅값을 레버리지로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시장의 방식으로 비싼 도시에 저렴한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가난한 이들은 기준 이하의 주택을 선택하며, 집일 수 없는 집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몇 억을 더 주더라도 아파트에 살고 싶지만, 당장에 1억이 없는 이들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워팰리스를 10억에 판다면 누구라도 사고 싶겠지만, 10억이 없는 사람들은 그 시장에 참여할 수 조차없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전체 주거 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잠재적 수요가 되고, 시장을 쪼개 빈곤층의 주거 시장을 별도로 형성한다. 토지의 기회비용과 가난한 이들끼리의 경쟁은 이 저가 주택 시장에 낮은 질과 높은 가격이라는 특징을 부여하게된다. 고소득층은 이 잠재적 수요가 빠진 고급 주거 시장에서 보다 더 저렴하게 주택을 구매할 수 있다.
도시에 살아야만 하지만, 살 곳이 없는 이들에게 가장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안전과 건강이다. '아프거나 다치지만 않으면' 당장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큰 돈을 아낄 수 있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보험 상품은 목돈이 있는 부자들보다 그렇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효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빈곤층의 보험 가입률은 부유층의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안전마저 사치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거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정부의 역할이란 마땅히 그런 것이다. 문제는 가난한 이들의 주거 시장에 안전과 건강이라는 이익을 주면 주택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점이다. 부동산은 사회의 투자로 발생한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개인에게 귀속시킨다. 주변 공간의 인프라는 지대가 되고, 임대료가 된다. 여기서 정책은 딜레마에 빠진다. 어떤 형태로든 '더 좋아진 집'은 '더 비싼 집'이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겠다는 선의가 오히려 그들의 주거 공간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수 시스템을 잘 정비하면 침수 리스크가 없어지며 집이 비싸진다. 노후된 건물을 재정비하고 페인트칠을 새로하면 깨끗하고 안전해지며 집이 비싸진다. 단순한 시장논리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양질의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주거 문제는, 특히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더욱, 경제가 아닌 인간의 기본권 문제로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반지하 전면 금지 대책을 다시 보자. 반지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인가? 사람이 살기 적절하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면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서울 전체 가구의 5% 가량이 그곳에 살고 있다. 그들은 불행한가? 그들은 반지하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고충도 있겠지만,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즉, 반지하는 살만한 곳이다.
이때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긴다. 기본권의 차원에서 시장 논리를 어기고 그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해주기에는 그 곳이 충분히 살만하다는 것이다. 딜레마와 딜레마가 부딪혀서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긴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을 그대로 두고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본권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동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도출된 가장 단순한 결론이 '금지'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대책이면서도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 더이상 침수로 고통받는 이들도, 그 외 건강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반지하를 없애면서 발생하는 부가적인 사회 문제는 노숙인 증가, 지역 갈등, 저가 주택 가격 상승 등 다양한 사회 문제로 분산되며 흐릿해질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유현준 교수는 '인간이 지하에 기거하는 것이 없어지기를 꿈꾼다'고 이야기하였다. 동의한다. 더불어서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거 시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낙후 시설은 끊임없이 없어지고 있다. '주택 여과과정' 개념은 이 당연한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준다.
초고급의 주택이 새로 생기면, 그 아래 단계에서 거주하던 이들은 초고급 주택으로 이사를 가고, 그들보다 낮은 소득을 가진 이들이 기존 거주자들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이는 초고급 주택만을 공급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결국 반지하는 없어질 것이고 인간의 주거환경은 점차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다.
포화 상태의 도시에서 새로운 주택의 건설은 낙후된 주택의 철거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집 주인이지, 임대 거주인들이 아니다. 이 새로운 주택에 고소득 계층이 이사를 하게 되면 가난한 이들은 집을 빼앗긴다. 고소득 계층의 빈자리는 연쇄적으로 저소득 계층에게 넘어오지만 그 과정은 지나치게 길다. 저소득 계층은 철거의 가장 빠른 피해자가 되면서, 건축의 가장 늦은 수혜자가 된다.
반지하 금지 정책은 이러한 순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갈 곳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당장 문제를 '치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반지하가 없어지면 그들은 어디서 살 수 있는가? 반지하에 살던 이들은 집을 잃고, 그 바로 상위에 있는 계층은 기존의 집을 잃은 새로운 경쟁자들을 뿌리치기 위해 더 비싼 값을 내고 기존의 집에서 살아야한다.
앞서 저소득 계층의 주거 시장은 전체 주거 시장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자가 주택 소유가 불가능한 빈곤층은 더 저렴하면서도 비싼 주택 시장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 주택 여과과정은 이 작은 시장 안에서 독립적으로 발생이 가능하다. 저가 주택 시장에서의 여과과정은 더 빠르고 확실하게 최하 계층까지 도달가능하다.
노원구와 강서구는 서울내에서 저소득층 비율이 상당히 높은 지역에 속하면서도 반지하 거주 비율은 서울 평균을 상당히 하회한다. 이 두 지역이 반지하 건물을 없애거나, 초고급 아파트를 많이 공급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서울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임대 아파트를 공급한 데서 이유를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반지하에 살던 이들이 빌라와 오피스텔 등을 건너뛰고 임대아파트에 살게 되었을까? 극히 일부일 것이다. 저소득 빌라와 오피스텔에 살던 이들이 임대아파트로 건너가고, 기존의 빌라와 오피스텔에 반지하에 살던 이들이 거주하게 되는 여과과정은 빠르고, 확실했다.
반지하는 없어져야 한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며, 안전과 건강을 위협받는 주택의 존재는 선진국이라면 용납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저렴한 임대료를 대가로 본인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다면, 설령 그것이 각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다만 그 방법이 지금과 같이 단순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집'은 한 가구의 생존과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반지하 전면 금지에 선행하여, 저소득층이 살 거주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그 방법은 경제적으로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사회투자로 만들어진 지대가 자가를 소유한 고소득층에게 귀속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적절한가? 그것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