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공유와 도시 소수자
각각의 생물종은 스스로의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는 환경을 찾아 나서고, 그 곳에 존재하는 생물들과의 경쟁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을 실현한다. 이 과정을 통해 특정 생물종이 서식하는 특정 환경은 Niche라고 불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리 찾기'와 '경쟁'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생존해 나간다.
이것으로 이전 글을 요약할 수 있겠다. 설명 글에 가까운 내용이다. Niche에 대한 설명과 인간의 비교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이전 글에서 각각의 개인이 어떻게 자리를 잡는가에 대한 설명을 했다면,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는 생물과 무엇이 다르며, 우리 각각의 Niche를 통해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되는가.
일반적으로 생물종이 살기 '좋은 환경'이란 생물종 다양성이 높은 환경을 의미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다양한 생물종은 각각의 Niche를 통해 공간을 세밀하게 쪼개며 각자의 설 자리를 찾고, 그 어떤 생물종도 공간을 독차지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다양한 생물종들이 서로에게 깊이 얽혀 있으며, 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서로의 보험이 된다는 것이다. 먹이의 종류가 다양해야 한 가지 먹이가 멸종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포식자가 있으며, 그 포식자가 남겨놓은 고기를 뜯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 싶은 환경은 일반적으로 배제적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이는 자신들의 공간을 건드렸다는 불쾌감일 수도, 혹은 공간의 정체성을 흐린다는 불편함일 수도 있겠다. 도시의 빈곤율을 언급하며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예시가 되겠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완전한 소셜 믹스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개인은 자신과 비슷한 집단에서 가장 큰 소속감을 느끼며, 그들만의 공간을 창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Niche를 통해 공간을 쪼개는 것만으로도 실현 가능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분명 공간의 독점이고 타인에 대한 배제이다.
아래는 공공임대주택의 외형에 대한 논란을 담은 사진이다. 누가봐도 어떤 것이 공공임대주택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이런 식의 차별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다른 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사람이 나빠서'라는 이유는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Niche를 통한 공간 쪼개기는 단순히 그들을 붙여두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공임대주택 외형 논란은 같은 우리에 사자와 염소를 넣어두는 것으로 공존을 이루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각각의 Niche를 통해 공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 각자의 Niche에 따라서 각자의 공간을 찾고, 그 다음 사람은 공간에게 공간은 사람에게 적응해나가며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공존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가지 예시로 도시 빈곤율을 들여다 보자. 우리는 도시 빈곤율을 볼 때 일반적으로 '도시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 문장을 직접 떠올리지 않더라도 '도시 문제'가 발생했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도시에서 공간을 빼앗기는 빈민들은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다른 시민들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것이다.
도시 빈민율은 오히려 도시가 빈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는 지표일 수 있겠다. 길거리 노숙자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시골 길거리보다는 무료 급식이 주어지고, 노숙인 보호시설도 있는 곳이 최고의 공간이다. 가난한 대학생과 젊은 부부에게는 임대료가 낮고 저렴한 상점이 존재하는 슬럼가가 최고의 공간이다. '그냥 시골에서 살면 되잖아?'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공간 쪼개기를 통한 자연스러운 공존이란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사회적 생물종'은 동물처럼 멸종되는 것이 아니다. 빈민층은 그 먼 옛날부터 존재했으며, 그 외에 범죄자, 외국인 등등 우리가 주로 꺼려하는 '타인'들은 경쟁에서 이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공간을 빼앗아 공간을 독차지하면 우리는 더 큰 갈등에 부딪히게 될 뿐이다.
앞서 생물종 다양성이 높은 환경을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보험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생존이 서로의 보험인 것이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공간을 보장받고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이다. 그들이 우리의 먹이가 되거나 식량을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평화롭게 공존하거나 공간을 독차지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소 도시와 빈민에 토픽이 집중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공간쪼재기는 단순히 갈등의 측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게이가 많은 도시'를 떠올렸을 때 누군가는 마귀가 돌아다닌다거나 흉측하다고 할 것이다. 낙원동은 그러한 공간 중 하나였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그들만의 공간을 꾸리고 도시에서 사람들과 공존하던 곳이었다. 그런 그들의 공간이 도시계획에서 배제되며 그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잃을 상황에 놓여졌다.
그런데 게이지수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이는 도시에 존재하는 게이의 비율(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게이들의 숫자)을 의미하는데, 곧 도시의 포용성과 창의성, 그리고 다양성의 지표가 된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지수는 첨단산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미국의 게이 지수 10대 도시와 첨단 기술 10대 도시 중 6개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이가 창의성이 높거나 첨단기술에 재능이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게이 지수는 우리가 타인을 받아들이고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전체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증거가 되어준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타인이 존재한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보장해주며 자연스러운 공존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은 없으며, 외국인이 없는 세상은 없다.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없는 세상은 없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고, 그들의 공간이 존재할 때 우리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물며 우리는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남들에게 '그들'이라는 타인으로 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