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대역전 신화 주인공의 고백

나의 노력은 얼마나 나의 것이 아닌가.

by geog kim

일반고에서 고2 11월까지 내신, 모의고사 모두 7등급을 받았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고 재수까지 2년 만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내 이야기는 뻔하지만 자극적이었고, 많은 이들이 원하던 판타지였기에 난 그 해 겨울부터 꽤나 큰 관심을 받았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해보고 여기저기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을 멈추기 시작했다. 한참 지난 대입을 가지고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대학이 내 노력과 재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컸다. 겸손을 떨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실력과 자격에는 과하리만큼 자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울대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너무나 명확한 공통점들이 존재했고, 그 공통점은 누군가에게는 장애물이 되었다. 다양한 곳에서 서울대학교로 온 아이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많은 이들이 공부를 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이다. 유의미한 재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모든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서울대학교 학부 입학 정원이 3000명을 넘어가는 만큼 그 아이들이 모두 머리가 비상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 노력은 분명히 자신들이 직접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아이들이 직접 한 노력이 얼마나 그들의 것이 아니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력도 재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분명히 이 주장에 반대한다. 노력은 무엇보다도 후천적이다. 누군가의 노력을 재능으로 설명하면 그 누군가는 결국 '운 좋은 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견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노력은 재능이 아니지만, 노력하는 사람이 운 좋은 놈인 경우는 많다. 내가 재수학원을 다니던 시절 이야기를 하겠다. 남들과 같은 학원을 다니고도 모든 과목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은 비결이 담겨있다.

한 달에 재수학원에 납부했던 비용이 100만 원을 넘었으니 이마저도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비싼 학원비였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동네의 많은 아이들은 집안 환경과 상관없이 아이들의 대학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였고 그 친구들과 나는 똑같은 교육을 받았다. 학원에서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공부를 하였으니, 그 외의 공부가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학원에서 쏟은 노력도 비슷했다. 수업시간에 대놓고 졸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큰 편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디서 차이를 낼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는 했다. 마땅히 남들보다 더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할 만한 대답이 없었고, 다소 건방진 겸손을 떠는 것으로 나는 대답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시점 이후로는 항상 주말에 족발을 먹은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생뚱맞은 소리라는 것은 안다. 족발이 머리에 좋은 성분이 들어서는 당연히 아니고, 족발 먹고 힘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차이는 여유에 있었다. 주말에는 학원에서 급식이 제공되지 않았기에 근처로 나가 식사를 해야 했고, 재수학원 비용만으로도 부모님께 죄책감을 가지던 아이들은 분식집이나 밥버거 따위로 끼니를 때우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주말 외식을 '특식'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원하는 음식, 특히 맛집이라고 이름났던 족발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100만 원이 넘는 학원비를 내면서 주말 외식에 들어간 고작 몇만 원은 내가 훨씬 여유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우습지만 사실 그 여유는 뻔뻔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집의 경제적인 사정이 다른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삼수를 한 아버지 덕(?)에 재수는 죄도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다. 재수학원 정도는 자식이니 당연히 내주시겠거니 하였고, 고생하는데 먹을 것 좀 편하게 먹을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적어도 심적으로는 부잣집 도련님처럼 재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아이들이 책 한 권을 사고 수회를 반복해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책을 사서 맘에 들지 않으면 10페이지도 넘기지 않고 버리기도 하였고, 많은 아이들이 인강 자유수강권을 하나 끊어놓고 듣는 동안 나는 다양한 사이트의 강의들을 입맛대로 골라가며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재수 비용이 크게 차이가 났나? 120만 원의 학원비에 30만 원 정도 더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30만 원. 큰 차이는 아니지만 경제력의 차이로 설명해야 될 만한 금액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120만 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30만 원은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한 달에 120만 원을 낼 수 있다면 150만 원을 못 낼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이 생각으로 공부하였고 부모님도 기꺼이 내주셨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달랐다. 한 달에 120만 원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150만 원은 너무나도 큰돈이었다. 전자는 차이를 보았고 후자는 총액을 보았다. 누군가에게는 '별 차이 없는' 30만 원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150만 원'이었다. 그 금액이 주는 무게는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그 30만 원의 차이로 나는 누구보다 여유롭게 내 공부를 위해 투자하고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뻔뻔함으로 공부를 하는 와중에 서울대학교의 많은 아이들은 말 그대로 여유롭게 공부를 하였다. 대치동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거나, 수능 후에도 면접 준비를 위해 '열심히' 학원을 다니거나, 10시가 넘어서도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들은 모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노력은 온전히 그들의 것인가?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나에게 재수학원 시절처럼 공부를 하라면 절대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분명히 노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 노력의 부족함에는 어떠한 반성도 없다. 백만 원을 넘어가는 돈을 내면서도 여유롭게 이것저것 살 수 있는 여유는 지금 나에게 없다. 내가 얼마나 뻔뻔하게 공부했는지를 인식한 순간부터 나는 다시 그때처럼 공부할 수 없다. 평범한 집에서도 도련님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그때 나의 어리석음은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는가.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고통을 참고 견디며 성취를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좋은 성적을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동안 누군가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너무 극단적인 경우인가? 그렇다면 누군가는 친구들과의 술값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누군가는 명품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다못해 누군가는 이것들을 위해 부모님께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누군가는 애교도 필요 없다. 맘 편히 카드를 긁으며 공부를 한다. 술도 마신다. 명품도 입는다. 성취해야 할 것이 적을수록 노력해야 할 것도 적다.

노력을 하지 않으며 실패를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분명히 누군가는 그냥 게을러서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정불화로 집중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돈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공부가 도저히 맞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응원을 받고,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적성에 맞는 공부에 노력을 쏟는다. 이들이 성취를 위해 감내하는 고통은 절대로 같지 않다.

내가 대입을 위해 공부를 하던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고통을 견뎌냈다. 커피를 말 그대로 퍼부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성적을 보며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통은 얼마나 단순했는가. 내가 '공부'와 관련된 고통만을 견뎌내며 노력하던 와중에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들보다 많은 것을 성취했는가? 나는 더 많은 고통을 감내했는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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