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예의지국
08월 04일 금요일 오후 06시 24분
"아이고, 고맙네. 내가 키가 안 닿아가지고. 허허"
북적북적한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 안.
드디어 주말이라는 들뜸과 한 주간의 고단함이 섞여 지하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그때, 나이 드신 여성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내 앞에 콩나물처럼 빼곡히 서있는 사람들의 다리들을 오른쪽으로 따라 끝으로 돌려보니, 하얀 머리의 여성이 인자한 얼굴로 북적이는 인파 속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색 오픈토우를 신은 젊은 여성이 서 있었는데, 백발의 여성의 짐을 지하철 선반 위에 올려준 것 같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든 지하철 속에서 두 여성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고민이 됐다.
'저 백발의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까?'
'나랑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가 꼭 양보하는 게 맞을까?'
'앞으로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데 양보를 해야 하나?'
'내가 앉은자리가 노약자석도 아닌데 그래도 양보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 모습 자체가 나쁜 건가?'
사실, 이렇게 고민을 한대는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친한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가족들과의 관계가 유독 돈독하다. 한 번도 그 언니의 가족을 직접 만나본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언니의 엄마는 머리가 새하얀 백발이라고 했다.
물론 언니의 엄마가 지하철을 타진 않았겠지만, 만약 나와 함께 있는 지하철에 있는 저 백발의 여성이 언니의 엄마였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런 심리 실험도 있지 않는가?
5명이 타고 있는 기차가 달리는 철도에 1명이 묶여있다.
만약 기차가 그대로 지나가면 5명은 살고, 1명은 죽는다.
만약 기차가 방향을 틀면 기차에 타고 있던 5명은 죽게 되고, 철도에 묶여있던 1명은 산다.
이 결정을 당신이 내려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대부분 실험에서 사람들은 다섯 명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한 명의 희생이 다섯 명보다는 덜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를,
'철도에 묶여 있는 1명이 당신의 가족이라면?'
으로 바꾸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다섯 명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백발의 여성이 언니의 엄마인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을 내려야 함에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에게 순수한 동방예의지국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데 나의 갈등은 의외로 쉽게 마무리됐다.
백발 여성 앞에 있던 남성이 다음 역에서 내린 것이다.
여성은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고 모두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시 꾸벅꾸벅 꿈나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