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행 열차
08월 29일 화요일 06시 44분
※ 이 글은 다소 혐오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으니 노약자나 임산부, 청소년, 심신미약자는 읽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한층 다가왔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나는 입사한 지 두 달도 안 됐기 때문에 휴가낼 연차가 없다.
대신 요즘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가 매일 가는 곳이 있다.
피지.
나는 피지행에 올라탄다.
열대과일 풍성하고 크리스털 맑은 물속 알록달록 물고기와 헤엄치며 백사장에서 태닝을 즐기는 섬나라 Fiji.
아니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피부에 빼곡히 박힌 블랙헤드, 화이트헤드, 쫀쫀하게 굳어버린 노란 딱지 피지.
맞다.
어른들이 결혼 상대로 세 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은 피하라고 했다.
이성 밝히는 사람, 폭력적인 사람, 그리고 중독자.
나는 중독자다. 피지영상 중독자.
어느 순간부터 피지 뽑는 영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특히 핀셋으로 피지를 쏙~ 깔끔하게, 한 번에 빼내는 영상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피지가 뽑힌 자리에는 구멍이 '뽕!' 생기는데, 그 짜릿한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출퇴근길 지하철 안 자리를 잡으면 나는 영상 속 무한 피지행으로 떠난다.
어떤 이는 이를 '피멍 (피지 멍) 때리는 것'이라고 부른다.
피지가 뽑힐 때마다 느끼는 쾌감을 '피르가즘'이라고 한다.
친한 언니한테 요즘 피지 뽑는 영상에 빠졌다고 했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더러워 죽겠다'라고 난리다.
그렇다고 나만 중독된 건 아닌 듯하다.
피지 짜는 영상은 마니아층이 있을 정도로 큰 인기다. 유명한 영상은 조회 수 100만을 훨씬 넘는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어떤 사람은, 나를 포함해, 피지 뽑는 영상에 중독되는 걸까?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봤다.
피지 짜는 영상을 볼 때마다 도파민이 분비된다. 도파민은 쾌감이나 보상감을 주는 신경전달물질로 음식을 먹을 때나 성관계 때도 분비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게 만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많아 두려움, 집착, 공포 등 감정이 발생하는 장면에 매료된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액션, 공포 영화를 두려워하면서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심리와 비슷하다.
피지 짜는 영상도 비슷한데, 처음에는 영상이 더럽다고 생각했다가 빠져나오는 피지를 보며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피지가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긴장감이 해소되면 몸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특수 호르몬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스트레스와 통증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영국 신문 가디언이 소개한 연구에서는 피지 짜는 영상이 피로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내용이 담겼다. 결말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혐오감과 쾌감 모두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그러면서 "여드름 짜는 영상을 부끄러워하며 시청했다면 앞으로는 당당하게 봐도 된다. 어디까지나 건강한 취미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래, 난 건강한 취미활동을 하고 있는 거야'
즐거운 마음으로 피지 짜는 영상을 지하철에서 당당히 보고 있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아줌마가 내 휴대전화를 보더니 아주 큰 소리로 감탄사를 날린 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어이쿠 참!
'그러니까 왜 남의 휴대전화를 보세요. 아주머니 정신건강 좋아질 뻔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