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임산부배려석
07월 11일 화요일 오후 06시 반쯤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퇴근길이다.
두 시간이 걸리는 퇴근길에 내심 지하철 안 빈자리를 기대해 보지만..
역시..
꿈도 야무지지..
그래도 눈치껏 금방 내릴 것 같은 아저씨 앞에 서 본다.
가끔은 앉아있는 승객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디까지 가세요?"
"어디서 내리세요?"
그러면 눈치 볼 것 없이 가장 빨리 내리는 승객 앞에서 기다리면 되니까 말이다.
그게 민망하다면 각 승객이 어디서 내리는지 볼 수 있는 초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승객 머리 위에 구름상자들이 동동 띄워져 있고, 구름상자 안에 '왕십리역' '강남구청역' 등 쓰여 있다면 가장 먼저 내리는 사람 앞에 가서 서 있을 텐데.
여하튼 내가 자리 잡고 선 곳은 왠지 몇 정거장 후 내릴 듯 가방을 부스럭대는 아저씨 앞이었다. 아저씨 옆자리는 분홍색으로 된 임산부 배려석이었는데 비어있었다. 다음 정거장까지만.
"에고 에고. 내가 다리가 아파서 여기 쫌 앉아야겠네."
정장을 입은 아저씨가 쑥 들어오더니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
'뭐 임산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니, 앉아계실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내가 찜해 놓은 자리의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싸~!'
나는 아저씨가 방금 내어준 자리에 서서히 앉으려고 준비하는데...
"여보~ 여기 와서 얼른 앉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다급하게 부인을 불렀다. 그 소리에 내가 당황하는 찰나, 내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이 내가 찜 해놓은 자리에 재빠르게 앉는 것이 아닌가!
그때 느낀 배신감이란...
체념하고 지하철 인파 속에 파묻혀 계속 흔들흔들 선채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내 자리를 빼앗아 앉은 그 여성'이 어떤 승객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앉으세요! 아니, 괜찮으시겠어요? 앉으셔야죠!"
지하철 안 승객 모두의 시선은 여성이 소리 지르는 상대에게 모아졌고, 다시 그 시선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아저씨한테로 옮겨 같다.
그렇다.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배가 불뚝 나온 임산부가 붐비는 지하철 승객들 속에서 애처롭게 서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 자리를 빼앗아 앉은 그 여성'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아저씨는 똑똑히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임산부를 향해 소리쳤던 것이다.
결국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던 다리 아프다던 아저씨는 우물쭈물 당황해하며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나도 얼마 안 가서 다시 '내 자리'를 되찾았다.
그런데 난 봤다.
아저씨가 '내 자리를 빼앗아 앉은 여성'을 째려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