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단을 한 케이스이다. 남편과 내가 결혼을 약속할 당시에는, 요즘 대부분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이 으레 그렇듯, 예단이나 함은 최대한 하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둘 다 집안의 개혼(開婚)이었고, 그러다 보니 첫 계획과 다르게 예단과 함을 정석대로 주고받는 것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 해본 기분이 어떻냐, 결론만 말한다면 '걱정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듯’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생활을 서로 몇십 년씩 한 것도 아니고, 결혼에 드는 돈이 어디 한두 푼이랴. 그래서 예단에 드는 돈을 차라리 결혼 생활에 보태는 것이 요즘은 더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맞다. 하지만 내 주변 후배나 동생들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양측 상황과 동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인생에서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경험으로 예단과 함은 30%가 결혼 당사자들의 영역이고 나머지 70%가 엄마들의 영역이다. 아들딸을 처음으로 출가시키는 입장에서, 또 처음으로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은 것이 부모님 마음일 터. 그렇게 나는 소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내 예단을 준비해 주는 엄마를 옆에서 차분히 지켜보았다. 반상기, 이불, 음식 등 예단에 필요한 물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와 의견을 나누는 엄마의 그 일련의 순간들과 과정들을 옆에서 함께했다. 시장에서 장 볼 때의 그 날카롭고 깐깐한 시선이 아닌 묘하게 다른 느낌의 안쓰러운 걱정과 적당히 신경 쓴 안목과 몽글몽글한 정성이 곁들어있는 느낌, 순간 ‘아, 이게 내리사랑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단어로만 알고 그 실체는 막상 가슴에 와닿으리만치 체감하지 못했었는데, 직원분에게 포장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부터 좀 잘 봐달란 당부의 말까지 그 짧은 대화와 순간적인 감정에서 ‘난 귀한 집 자식이구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 예단에 엄마의 쌈짓돈이 보태어지는 순간, 예단을 시댁에 전달드리는 그 순간까지 이 건은 제대로 진행해야 된다는 막중한 임무를 띤 요원이 되어 무엇하나 대충 하지 않게 된다. 나로 인해 부모님의 목돈이 나간다는 건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 것일까. 그렇게 서로 위해 주는 마음이 쌓이고 쌓인, 이 애증의 이벤트를 통해 ‘아, 결혼은 대충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냥 우리끼리 하고 싶다고 막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런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과정에서 딸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은 엄마들은 마음이 뭉클해지며 꾹꾹 눌러왔던 감정선이 흔들려 왈칵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던데 우리 엄마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한 스텝 한 스텝 밟아갔다. 엄마는 마냥 여리기만 한 가정주부는 아닌데, 나는 이 점을 굉장한 장점으로 여긴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부모가 먼저 일희일비하거나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것. 엄마아빠가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면, 그다음 내 목표는 뚜렷해지기 마련이었다. 결혼준비도 마찬가지였다. 마냥 안쓰럽고 아까워하기보다는 제 나아갈 길을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활 같은 여자.
그대는 활이며,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
그대로부터 쏘아져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신의 손길은 무한의 길에 과녁을 겨누고
자신의 화살이 더 빨리, 더 멀리 날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 그대를 당겨 구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활 쏘는 신의 손에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듯이
흔들리지 않는 활 또한 사랑하기에.
-칼릴 지브란, <예언자> 中
요즘 결혼 준비 기간은 1년이라던데, 막상 준비해 보면 거의 ‘결혼’이 아닌 ‘결혼식’에 초점을 둔 것이고 그렇게 야심 차게 준비한 ‘결혼식’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1시간 안으로 끝이 난다. ‘결혼식 말고’ 중에 오롯이 나와 내 가족의 힘으로만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나의 경우엔 그게 상견례와 예단이었다. 결혼은 가족과 가족이 합치는 것이기도 한데, 사실상 이때 처음으로 시부모님의 취향과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고 가리시는지 등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계기였기도 하다. 예비부부의 수만큼 다양한 색깔의 결혼이 존재한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관과 기대가 달라 예비 배우자와, 혹은 부모님과 많이 다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이 아닌 ‘결혼’에 초점을 맞추면 의외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흔들리지 않는 활이 쏘아 올린 화살이 정확하게 과녁을 향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