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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Jun 17. 2021

<케스>, 소년도 어른이 되었을까?

<케스>(켄 로치, 1969)



소년은 늘, 혼자다. 소년은 외로워도, 슬퍼도, 아파도, 힘들어,도 울지 않는다. 안겨 울 품도 기댈 어깨도 없다. 소년의 곁엔 아무도 없고, 소년의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고, 친구도 없다. 게다가 소년은 형이 정말 싫다. 엄마도 싫고, 선생님도 싫고, 친구들도 싫다. 그래서 소년은 늘, 혼자다. 소년은 신문을 배달한다. 신문 배달을 위해 들르는 가게엔 소년이 유일하게 만만한 주인 아저씨가 있다. 소년은 거기서 초콜릿을 훔치고, 배달 도중 만나는 우유배달부 형의 우유도 훔치고, 치즈마저 슬쩍한다. 소년은 신문 배달 도중 들판에 앉아 허기를 달랜다. 소년의 아침 식사는 그.렇.게. 서글프다.  



소년은 벌판에서 '운명의 친구'를 만난다. 절벽을 올라 친구를 데려오고 집 한켠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소년의 유일하고도 자발적인 선택, 벌판에서 만난 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책 마저 훔쳐 읽고 친구를 조련하며 친해질 궁리에 빠진다. 친구를 지켜보는 소년의 해맑은 눈과 유일한 놀이 역시 애틋하다. 그 친구를 길들이면서 너른 들판에서 혼자 뛰어 노는 숏은 단연 '압도적'이다. 흥분과 기쁨에 겨워 매를 조련하는 소년을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켄 로치의 카메라(의 시선과 응시)는 사려깊다. 소년을 쭉 지켜 본 관객은 그 너른 숏이 그리 슬프고 아플 수 없다. 행복한 소년을 지켜보는 슬픔.




어릴 적 누구나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린 나는 그 혼자라는 감정의 파고를 견딜 수 없었나보다, 아니면 두려워했던가. 그래서 늘 친구들과 어울렸다. 집에 오기 싫어서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미친 듯이 축구를 하고 어둑어둑해져서야 겨우 집에 왔다. 집에 와 봤자... 그 감정의 파고를 스스로 잘 다루거나, 다룰 수 있도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 순간이 얼마나 풍요로와졌을까? 일생에 누구에게나 하지만, 단 한번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 나는 그 순간을 피했다. 아니 애써 무시했고 그 순간을 맞이할 배짱이 없었다. 그 반짝반짝하던 운명의 순간을 속절없이 잃었다.




영화는 플래쉬가 터지고 사라지듯 순간 암전된다. 영화는 끝났지만 소년의 운명이 궁금하다. 영화의 갑작스런 엔딩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관객은 소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저마다 소년의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아직 다 풀어놓지 못한 자기 안의 소년/소녀와 대화를 시작한다. 소년을 사려깊게 물끄러미 지켜보는 켄 로치의 널찍한 시선은 훌륭하다.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카메라의 무기력한 응시는, 그 시절을 그렇게 보낸 감독의 자전적 고백이 아닐까? 혼자이거나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이들과의 연대, 켄 로치의 이후 영화적 행보는 <케스>의 성장담이자 확장판이다.


내게, 켄 로치의 영화 중 <케스>가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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