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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Jun 21. 2021

<내 곁에 있어줘>사랑에 대한 질문은 얼마나 허망한가?

<내 곁에 있어줘>(에릭 쿠, 2005)


본 지 한 참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보는 내내도 말할 수 없이 울컥했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할 말을 잊고 전전긍긍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를 움켜진 채, 뭐라 긁적일 수도 없었다. 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밤, 새벽, 몇 몇 장면이 꿀렁꿀렁거린다. 이미지 검색을 해도 내가 떠올린 그 장면의 숏을 걸고 긁적인 '글'을 찾을 수 없다. 딱 하나 건진 장면. 영화에 줄거리와 상관없이 어떤 장면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를 보고 처음엔 각 에피소드들, 그 이야기들의 관련성 등등을 떠올렸다. 의미를 추적하는 어지러움과 당혹, 그걸 견뎌낼, 해명할 깜냥, 다시말해 비평의 능력이나 도구들이 내겐 없었다. 감정과 생각의 뒤 엉킨 실타래를 멍하니 바라보는 형국. 그대로 뒀다.



아내와 사별한 후, 가끔 아내의 유령 혹은 환상을 보는 노인의 깊은 주름이 떠올랐다. 그 인물의 정황과 영화 전체의 이야기와의 연관성보다 깊이 패인 주름과 손. 묵묵히 요리를 만들어내는 노인의 느릿한 움직임, 그러나 능숙하고 깊은 손놀림. 요리를 하는 노인과 그 노인의 손에 요리가 되어가는 숏과 장면들의 연결, 대사하나 없이 진행되는 속절없는 장면과 숏들. 그 장면들이 며칠 동안 내내 떠올랐다. 



뭉클하기도 울컥하기도 먹먹하기도 아릿하기도한 복잡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이유를 모르겠다. 잠들다 깬 한 밤중과 지금처럼 새벽 이른 시간, 무차별적으로 틈입하는 명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의 덩어리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곧 흩어지고 스러질테지만, 그 알 수 없는 알싸함이 싫지 않았다.



Is true love, truly there, my love?
Yes, if your warm heart is.
be with me, my beloved love, then my smile may not fade



사랑,에 대한 질문은 얼마나 허망한가? 사랑은 질문으로 얻고 대답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질문이라는 관념이 대답이라는 명제로 치환되는 순간 사랑은 휘발된다. 결국 사랑은 '곁'에 두려는 욕망과 곁을 지킬 수 없는 절망의 거리, 그 거리는 사랑만큼이나 애매하고 모호해서, 사랑엔 묘약이 없(는 법이)다. 봄날은, 그래서 저만치, 훌쩍, 이내, 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의 타이핑, 테레사 첸의 손끝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사랑에 대한 질문과 답은, 그래서 식상하기도 하고, 아프기도하고, 신비롭기도하고, 어색하기도하다. 네 가지 에피소드의 매끄럽지 못한 봉합은, 사랑(의 속성)을 쏙 빼어 닮았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 속상하지만, 안타깝지만, 사랑 받고, 사랑할 수 밖에.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수 밖에.




누군가를 절절히 떠나보낸 경험이 없다. 그래서 이별을 노래하는 가요나 시들이 낯설다. 떠나기 전에 이미 맘을 닫고 떠나보낸 걸까. 아님 떠나기 전에 이미 내가 먼저 떠나버린 걸까. 무수히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떠나봐야,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텐데, 어떤 모양, 어떤 모습으로든...  나이가 드니 사랑하는 이들을 육체로 떠나보내는 분들을 지켜볼 일이 생긴다. 어쩜 내게도 곧 닥치게 될 일이지만, 그 광경은 늘 낯설다. 마치 내겐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그들의 슬픔을 공감共感할 남은 힘(餘力)이 내겐 없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그저 손 꼭잡고 할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이별離別(혹은 사별死別), 그 사건과 단어 앞에 난 늘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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