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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Jun 28. 2021

<봄날은 간다> 사랑, 풀지 못한 방정식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

사라진 얼굴, 떠나는 사랑, 사랑은 눈이 머는 과정이다.


부를 수 없는 노래


은수(이영애)가 뒤돌아선 게 아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를 두고 앞돌아 섰다. 은수는 남겨 진채 그제서야 뒤돌아 선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항변했던 상우는 멈춘다. 은수는 남겨졌고 멀어지고 있다. 흐드러진 봄날의 벚꽃이 흐리다. 사랑은 눈 멀게 하지만, 이별은 얼굴을 지운(는 과정이)다. 곁을 비우고 뒤 돌아선다. 영화는 흐릿해진 은수를 뒤에다(먼 곳에다) 둔다. 허진호는 사랑과 이별의 함수를 (어느 정도 진지하게) 꿰고 있다.


“(…)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 그 사람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단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우리는 그에 관한 흐릿한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된다.”(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동문선, 1998, 50쪽, 프루스트 인용 재인용)


“흐릿한 (한 장의) 사진”, 상우는 은수의 뒤를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한다”(레비나스, 위의 책 46쪽)는 철학자의 고언을 깨닫게 될 즈음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영화는 사랑 타령이 되고, 정작 사랑을 시작해야 할 때 이별로 끝을 (급히) 갈무리한다. 사랑은 (벚꽃처럼 어느새) 진다, 아파할 새 없이, 뒤와 곁을 더듬을 새 없이 흐릿해진다. 사라진 얼굴, 떠나는 사랑.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핑켈크로트, 위의 책 49쪽)



이별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지우는 과정이다.


잃어버린 얼굴


은수가, 상우가, (서로를 겨우) 본다, 손이 흔들린다. 은수의 얼굴은 흐리고, 상우는 얼굴이 없다. “사랑은 얼굴에 대한 신앙”(알랭 핑켈크로트)이라는데, 둘은 그것을 잃어버렸다. 상우는 은수의 얼굴을 지웠고, 은수는 상우의 얼굴을 훔쳤다. 그 순간 관객마저 두 (사람의) 얼굴을 잃는다. 허진호 감독은 이별 숏에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지우고) 앗아간다.


“한없는 도주, 타자의 ‘끝없는’ 도망을 저지할 수 없는 곳에서만, 사랑은 존재한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것이라면, 거꾸로 사랑의 쇠퇴는(…) 얼굴 표정을 흐리게 하거나 초췌하게 만드는 갑작스런 함몰이다. 정열이 고갈되면 사랑받는 얼굴은 사라지고(…)(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동문선, 1998년, 56쪽)


바람에 흩날리는 꽃처럼 손이 흔들린다. 이제 끝이다. 다신 마주할 수 없을 찰나, 상우와 은수는 영화 밖으로 나간다. 둘은 “녹슬어가는 지루한 잡담같은 시간”(이광호)을 견뎌야할 것이다. 사랑이 진다, 봄날은 간다.



사랑의 끝은 자주 돌이킬 수 없는 대화가 차지한다.


돌이킬 수 없는 대화


이별 직전, 은수는 상우를 잡는다. “오늘 나랑 같이 있을래?” 상우는 화분을 건넨다, “할머닌 돌아가셨어” 이 회피하는 듯한 말-듣기. 잠시 침묵, 은수는 상우를 응시하고, 상우는 은수를 듣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응시하기보다 우선 듣는다.”(알랭 핑켈크로트) 상우의 시선, 남자의 시선, 어쩌면 감독의 시선. 듣되, 헛헛하고 남루하고 비루한 무엇, 말은 서로를 빠져나가고 잦아든다.


“이 거리감 있는 말듣기로부터 결정의 고뇌가 싹튼다. 이런 ‘사막 속에서’ 계속 말을 해야할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성이 용납하지 않는 어떤 확신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말하기를 단념하고 그만둘까? 그렇게 되면 내가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비난하고 ‘말다툼’을 하려는 것처럼 보일 텐데. 또 하나의 함정”(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동문선, 2004, 244쪽)


은수의 속내, 독백과도 같은 대화, (꿈속에서의) 침묵 곧 죽음. 은수는 결국 돌아선다. 은수를 비난하지 않는 감독의 독한 숏. 영화는 (단언컨대) 환타지로 마무리 되었다.



봄날 같던 사랑은 지고 봄날도 간다.


사랑했던 '사이'


“할머닌 돌아가셨어”, 상우가 은수에게 화분을 건넨다. 떨궈진 은수의 시선, 한때, 둘은 사랑'했었'다. 불길은 시들(었)고 죽음이 엄습한다, 저승이 가까워졌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지만 저승처럼 잔혹하기도 하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아가서 8:6-7, 성서, 표준새번역)


상우는 은수에게 “너를 사랑해”라고 하지 않는다, 말 못하는 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같이'를 얘기하는 은수와 '이미'를 얘기하는 상우 ‘사이’에 화분이 놓였다. 말하지 않는 혀, 사랑은 “어긋남과 어긋냄”(김영민) ‘사이’를 필사적으로 탐색한다. ‘사이’는 이제 허물어졌다. 그 ‘사이’로 봄날은 간다. 사랑이 지나간다.



여기 사랑의 방정식을 셈하는 허진호가 있다. 에릭 로메르가 사랑(과 연애가 작동하는 방식)을 될 수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회피(우회)하거나 머뭇거린다면, 홍상수는 사랑(과 연애)의 껍데기를 까발리고 폭로한다. 이때 에릭 로메르의 사람(남과 여)들은 나름 감흥을 주지만, 홍상수의 사람들은 찌질하고 발칙하고 께름칙하다. 그 둘은 낭만적 사랑, 즉 목숨을 바쳐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사랑(과 연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다시 말해, 둘(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은 그런 사랑을 부정한다. 현실을 도피하는 낭만(주의)적 사랑은 그 둘에게 비현실적인 것이고, 결국 둘에게 사랑이란 ‘헤프닝’일 뿐이다. 거기에 사랑의 진위 여부나 윤리의 문제는 별무소용이다. 에릭 로메르를 보고 나면 '그래서 어쩌라고?'를 묻(게 되)고, 홍상수를 보고 나서 불편하고 헛헛한 이유는, 그들의 전제나 시작이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아야할 것은 따로 있다.


왕가위는 결이 다르다. 왕가위는 사랑이 각 사람에게서 진행 중이거나 재현되는 방식과 과정 자체에 방점을 둔다. 그 과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는. 데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결국 사랑은 ‘현재’가 중요한 (것인)데, 사랑이 ‘과거’가 될 때, 그저 아름답거나 때로 잔혹하고, 그 사랑이 ‘미래’가 될 때 한껏 부풀어 오르거나 현재에 파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 왕가위의 복잡한 사랑 방정식, 그 사이 어딘가 허진호의 자리가 흐릿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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