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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성 Jun 02. 2022

<우연과 상상> 놀랍다, 그저 놀랍다

<우연과 상상>(하마구치 류스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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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단순하게 말하면 기록 매체다. 기록 매체의 원형은 동굴 벽화일 테고 순간을 기록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사진이라는 기술-기계를 발명했다. 시간을 이겨먹으려는 인간의 열망과 영원히 존재하고픈 인간의 욕망은, 죽음이라는 현재적 절망을 사후 세계라는 미래로 연결하는 미라라는 시체 처리 방법도 고안했다. 영화는 이런 역사의 최근이며 현재를 영원히 남기려는 사진 기술의 자손 혹은 진화인 셈이다. 다들 겪는 뻔한 이야기라면, 늘상 반복되는 일상이라면, 특별히 애써 남길 이유는 없을 테다. 어떤 면에서 '영화화'한다는 것은 어떤 놀라운 순간을 박제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습관이자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사진 기술에 토대를 둔 영화는 어떤 순간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시각 매체 기술의 아직까지는 최종판이다. 영화로 남기려는 감독과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서 어떤 감흥의 순간을 즐기는 관객의 욕망은 일란성쌍둥이 같다. 어쨌든 영화는 시간(순간)을 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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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하지 못한 영화들,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영화가 많다. 이야기가 뻔하거나 별다른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는 영화, 시간을 죽이려고 보는 것으로 족하거나 괜히 봤다는 후회가 드는 영화도 많다. 놀랍게도 하마구치 류스케는 뻔한 장면으로 비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순한 구도와 장면 속 말의 밀도 탓에 뻔한 순간(장면)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좁은 공간에 앉은 두 사람이 이렇게 긴 대화(말)를 주고받는데 어떻게 지루하지 않을 수 있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또 보고 싶고 볼 때마다 영화는 새롭다(변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감각이나 재능이라고 하기에는 우직함(단단함)이 엿 보인다. 감독은 믿는 구석이 많은 눈치다. 영화사가 증명한 감독들(에릭 로메르, 존 카사베츠, 하워드 훅스, 에드워드 양, 오즈 야스지로, 장 그레미용 등)을 우직하게 잇고 새롭게 엮는 솜씨 탓이다. 어떤 감흥과 활력이 누군가를 흉내 낸다고 절로 생기는 게 아닌 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정말이지 특별하다. 놀랍다, 그저 놀랍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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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과 엔딩이 중요한 영화가 있다.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어떤 감독은 처음과 끝을 통해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도 하고 이야기가 영원하도록 마법을 부린다. 보는 내내 '처음(오프닝)'을 기억해야 이야기 전체를 이해할 수 있고 끝나는 지점이 만드는 긴장 혹은 의외성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하기도 한다. <우연과 상상>에서 감독은 각각의 에피소드의 첫과 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끝나겠구나!'라는 지점을 더 밀고 나가거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카메라를 꺼 버린다.   몸통 장면에서도 많은 대사가 길을 잃지 않고 단순한 장면과 마주 울리면서 특별한 감흥을 자아낸다. 그 말의 홍수를 가르면서 끝맺는 우발적이고 다층적인 끝맺음(엔딩)은 영화를 몇 번이고 더 봐야 할 이유를 제공하고 볼 때마다 영화가 달라지는 연출은 탁월하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하는 리듬감 넘치는 과감한 오프닝과 엔딩(이 주는 활력)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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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이런 긴장과 밀도를 만들어내는 감독이 얼마나 될까? 상대적으로 홍상수의 긴 대화는 내게 늘 어색하다. 대부분의 감독은 택시 안이나 둘이 좁은 공간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찍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우연과 상상>에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단출한 공간에서 뻔하디 뻔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위치(좁은 공간에서 카메라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은 경우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출렁임과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낸다. 지루하지 않은 것도 신기한데 두 사람을 비추는 뻔한 숏과 씬 안에 넘치는 활력을 담아내는 감독의 능력은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호러적인 긴장과 감정의 정동을 일으키고 지적인 도전까지 주면서 머리를 쓰게 하고 심지어 몸까지 들썩이게 하는 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쪼개지 않은 단순하고 단출한 숏(컷)이 가진 힘이 대단했다. 고전기 영화들에 뿌리를 댄 하마구치 류스케의 진화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기대가 크다. 아직 보여주고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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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의 배우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순간이 있다. 영화가 피해야 할 숏(앵글), 어색한 순간이자 문제적인 장면이다. 가끔 의도를 가지고 그런 방식을 쓰는 연출(<양들의 침묵>에서 조나단 드미가 빼어나게 찍은 숏 같은 것)이 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시선이 카메라와 맞춰지는 그 순간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감정이 최고조로 이는 순간도 아니다. 감독은 여러 앵글을 찍어 뒀다가 편집하면서 좋은 순간(장면)을 이어 붙이고 쓴다고 어떤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얘기했다. 배우의 육체와 말이 무언가를 발산하는 순간을 그저 포착한다. 몰입한 배우의 육체와 말이 뿜어내는 기운 탓에 어색하기는커녕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일고 수긍이 간다. 그 순간의 카메라와 클로즈업을 견딜 수 있는 배우도 대단하다. 배우와 연출이 만드는 어떤 찰나, 신비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묘한 순간인데 무척 인상적이다. 다른 감독들의 것이 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장이라 할만하다. 대사량이 엄청나 원씬이지만 며칠에 나눠 찍을 수밖에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 탓에 이어지는 장면들이 불균질하고 어색하게 붙은 장면이 간혹 보이는데 그마저도 볼 때마다 새롭다. 정말이지 놀라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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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인터뷰에서 코로나 탓에, 코로나 덕에 <드라이브 마이카>와 <우연과 상상>을 동시에 엇갈리면서 찍어야 했다고 했다. <우연과 상상>이라는 3부작 단편은 <드라이브 마이카>라는 장편을 위한 습작(연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밝힌 일정을 보니 두 영화의 순서가 엇갈린다. 순서대로 찍은 게 아니다. 그 덕에 확실해졌다. <우연과 상상>의 단편이 그 자체로도 완성도와 밀도가 온전하다는 사실과 <드라이브 마이카> 역시 <우연과 상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두 영화는 각각 호흡을 달리하며 하마구치 류스케의 머리와 감정, 육체 속에 존재했던 독립적인 이야기였다는 사실 말이다. 인과론으로 연출을 설명하려는 비평의 속성은 때로 누추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활자화해야 하는 이들과 것들은 그래서 한계가 분명하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고전기 영화들에 대해 썼다는 적지 않은 글을 읽고 싶어졌다. 눈 밝은 출판사가 묶어 출간했으면 좋겠다. 대체 이 양반은 어느 별에서 날라 왔을까? 참고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1978년생이다.


덧)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에는 침묵이 없다. 적막과 고요, 침묵을 지각하지 못하는 말(대화)은 가벼운 법이다. 편안하고 낯 익어서 좋은 침묵은 분명 있다. 말과 말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대화에서 말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권태로움도 없다. 말이, 대화가 공회전하는 법이 없다. 말이 쏟아진다. (말의) 홍수는 구원이 아니라 재앙이다. 말의 쓸모와 쓰임새에 목적이 분명하고 모든 말들이 서로에게 명확하게 가 닿는다. 말과 대화의 밀도가 높다는 것,은 늘상 일어나기 어려운 사태다. 그렇다면 영화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텐데, 그런 면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는 허구적이고 작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대화들은 말(대화)의 형식을 빌고 있지만 글(각본)이다, 글이 배우의 몸(연기)을 압도하는 사태(연출)에 대한 비평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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