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밤 이야기>(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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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자연스러움과 끼, 노력으로 일군 절실함과 간절함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예전엔 고민이 없었다. 하지만 요새는 잘 모르겠다. 빛은 반드시 그늘을 만든다. 어느 방향이든 예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빛 자체, 그늘 자체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 혹은 신뢰를 거두고 나면 많은 게 보이고 여유로운 틈이 생긴다. '신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질문한 사람이 찾아야 할 답이다. 속 깊은 사귐과 만남,은 싸움과 애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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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즈음 읽었을 때는 김수영의 시집에서 어린 시절 추억을 더 많이 읽고 공감했다. 나도 외갓집이 김수영처럼 마산 끄트머리 감천(甘泉)이다. 감천, 물맛이 좋은 샘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 분명 집에서 자고 눈을 떴는데 외갓집이었다. 어린 마음에 기분이 너무 좋았고 이후로 잘 때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길 바랐다.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대여섯살 즈음 마산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어머니가 택시를 잡아타고 외갓집 집 앞까지 내달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외갓집 앞에 택시가 서자마자 어머니는 오열하며 버선발로 뛰어 들어갔다. 내 기억에 새겨진 외할머니 모습은 영정 사진에 곱고 단아하게 머리 빗어 넘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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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 어린 시절 부모와의 살가운 관계의 부재는 아이의 내면과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데 대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입학 전 시골 큰 집에 맡겨진 적이 있다. 더 할 나위 없는 자연에서 큰 집 형들과 산과 들을 거닐고, 밭일하고, 소 먹이고 풀 뜯고 나무하고 복숭아 서리며, 붕어•피래미 잡고 냇가에서 뛰놀고 형들 소풍간 뒷산에 따라가 도시락 까먹고, 풀 피리 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유년의 추억을 만끽했다. 한참이나 지나 성인이 되고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총천연색 추억이 방울방울 시각적으로는 선명한데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음소거한 컬러 티비처럼(공포 영화는 소리를 끄면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냄새도 기억나지 않고 대화가 들리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말한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재잘거려야 할 시절 우두커니 생각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했다. 큰집 형들과 떨어진 적이 없지만 홀로 있었던 느낌, 난 온갖 자연 속에, 형들 속에 있었지만 결국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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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밤 이야기>에서 김수영은 늘 혼자다. 시(쓰기)가 그럴 수 있지만, 김수영의 추억 속에 할머니가 등장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할머니는 늘 타자다. 할머니가 타자이듯 김수영 역시 할머니에게 또 다른 타자다. 둘은 함께 있지만 서로 부재한다. 김수영이 묘사한 유년의 풍경에는 소리가 과장되고 냄새는 적다. 방치된 아이는 하루 종일 무섭다. 방울방울 피어올린 추억이건 그늘과 물, 어두운 구멍, 심연을 응시하며 공포를 느끼건 거기에는 시각적인 묘사의 섬세함이 가득하다. 유년 시절의 추억에 대한 묘사가 따스하고 풍부하게 읽히기보다 서늘하고 애닳게 느껴졌다. 어제 오늘 읽은 김수영의 시에는 어딘가 웅크려 세상을 환하게 읽고 아름답게 보려는 홀로 있는 아이의 힘겨움을 느꼈다. 온통 생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오랜 밤 이야기>를 앙상하게 읽은 건 순전히 '내 경험' 탓일수도 있다.
햇살이 따가운 허물어진 토담
굽은 어깨로 밭을 안고 있는 집
잘 갈아진 찰진 흙의 냄새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나직히 호밋소리 들리고
꿈틀대는 밭이랑의 할머니 곁
흙더민가 했더니
가만히 고개 드는 흙빛 강아지
('밭을 안고 있는 집' 전문,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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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래의 시골은 유폐의 공간이었다. 고단한 도시로 일 떠난 맞벌이 부모가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맡겨 두는 곳, 중요한 시기 도시는 어른들을 삼켰고 그나마 다행스런 아이들은 시골에 보내지거나 남았다. 시골의 일상, 아이들은 방치되었고 혼자 혹은 아이들끼리 놀았다. 생명 가득한 곳에서 아이들은 뿌리 뽑혀 있었다. 홀로 있던 아이는 필사적으로 본다. 조그마한 벌레들의 인기척에 맘을 뺏긴다. 세상은 커다랗기도 조그맣기도 하다. 심심한 아이는 별의 별 것에 다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마음을 주기도 한다. 시골 생활과 유년 시절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는 위험하다. 분명 김수영은 사려 깊게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재현한다. 어떤 폭력이 만든 사려 깊음과 예의, 예술적•문학적 감수성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은폐의 작동, 김수영의 시에는 죽음의 공포나 그림자가 어슬렁거리고 김수영은 가끔 유령처럼 배회한다. 잿빛 가득한 김수영의 <오랜 밤 이야기>는 어.쩌.면. 잔혹 동화다.
(사람)-여자는 '텅 빔'과 '깜깜함'으로 있구나
(김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