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서>(문예중앙, 2015)
반쯤 읽다 시인이 궁금해졌습니다. 시인 때문에 산 시집이 아니라 해설 쓴 평론가 때문에 산 시집입니다. 시를 읽다 자주 아득해지는 저는 시를 1부까지 읽다가 통하는 게 있으면 해설을 읽지 않고 죄다 읽습니다. 허나 어떤 시들이 여의치 않을때는 1부 정도 끙끙대다 해설을 읽습니다.
시는 미로입니다. 시인이 대상과 세계를 몸으로 쓸다 얻은 미도(迷途)가 시입니다. 그 길은 미로지만 걷는 이가 있(었)으니 오리무중은 아닙니다. 저자 소개를 얼핏 보고 88년생인줄 알았습니다. 읽을수록 젊고 탱글한 생각들이 고맙고 한없이 좋았습니다.
중반쯤 이르러 조재룡 선생의 해설을 반쯤 읽었습니다. 덧대어 몇 편의 시편을 조금 더 더듬어 보았습니다. 처음 저자를 88년생으로 얼핏 보았으니 20대 후반의 사유가 옹골지다고만 생각했다가 어라,하는 생각에 다시 날개를 뒤적였고 헛헛 웃었습니다.
그제서야 “1988년 <심상> 신인상...”을 읽었습니다. 한바탕 웃픈 소동을 매듭 짓는 순간이었습니다. 휴대폰을 손에 지고 검색창을 띄웠습니다. 벌써 여러 해 전에 받은 선생의 제8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 소식이 있더군요. 백발 내리는 선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너에게 가는 두근거리는 악보다
홍두깨 대신 소주병으로 꽁꽁 뭉친 구름을 밀어보자
아니 저것은 눈덩이고
하룻밤의 약속이었던 것
끈끈하게 달라붙는 저녁을 떼어내면서
수년 전 어느 외진 마을의 흐느낌을 밀가루 반죽에 밀어 넣는다
눈이 날리다 그쳤다 한다
한 여자의 무거운 밤이 날아가 언강에 떨어진다
그걸 받아 안고 결심한 강이 쩌렁쩌렁 울린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두께로 눈앞의 생이 초설처럼 웃는 곳
말랑거리는 구름의 속삭임과 오래 뒤척여 납작해진 밤의 표정이 뒤섞여
노래의 흰 뿌리들이 풀려나온다
잘게 썰어 반듯해진 마음의 다발들
후루룩거리며 남자가 먹는 건
한 여자의 붉은 벼랑으로 빚은 나직한 평화
너에게 닿아 끓고 있는 밤이 오래도록 저물지 않는다
('칼국수 빚는 저녁' 전문, <밀서>, 문예중앙, 2015, 90,91쪽)
이상하다고 눈치를 챈 시편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오해는 때로 이해의 지름길이기도 하나 봅니다. 남은 시편이 기대됩니다. 다시 읽어야 할 시편도 여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