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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술 Jan 25. 2017

술집과 팁

주막(酒幕)
고려때 실패했던 화폐유통이 조선 효종 이후부터 정착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음식과 숙박에 접대하는 여자도 있는 주막이 자리잡았다. 즉 주막은 밥집이자 술집이었으며 허름한 호텔이었다. 초가지붕 위로  바지랑대에 용수를 높이 달아맨 집이면 주막임에 분명했다. 주막에는 술국자를 들고 술을 퍼주는 酒婆(주파)가 있어 술을 끓는 물에 담그어 거냉하여 주는 일이 소임이다. 시골길로 접어들면 큰 길목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어 나그네의 허기를 꺼주고 갈증을 풀어 주곤 하였다.

피마(避馬)골
운종가를 따라 큰 길 뒷편으로 난  길이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으로 말이 피해 다닌다는 뜻으로 피마골이라 한다. 운종가는 한양에서 가장 큰 길이었다. 그래서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이 다닌다. 이에 하급관리나 서민들은 높은 벼슬아치가 지나갈 때마다 말에서 내려 엎드리고 있어야 했고 늘 지각이 늘고 업무가 지체되었다. 그래서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운종가 양쪽 길 뒤 쪽에 겨우 말 한 마리 지나다닐 만한 골목길을 만들고 하급관리나 서민들이 이 길로 다니게 하였다. 이 길이 피마골이다. 이 골목에는 명물 음식점들이 들어섰는 데 목로술집, 내외술집, 모주집과 색주가가 몰려 있었다.

목로술집
시골 큰 길목에 주막이 있었다면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는 목로술집이 있었다. 목로술집에서는 좁은 목판을 놓고 그 위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차려놓았다. 손님이 청하면 술은 잔으로 파는데 안주는 무료였고 술값만 받았다. 목로술집에는 앉는 의자가 없어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서울에서 유명했던 선술집으로는 안국동의 골탕집, 동대문밖의 큰코집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색주가(色酒家)
본래는 없는 풍습이나 세종대에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수행원을 위로하기 위해 홍제원에 집단으로 색주가가 생겼다고 한다. 그 뒤로 이를 본따서 여기저기 색주가가 생겨 賣酒, 賣色까지 겸하였다. 색주가는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방(妓房)의 젓가락돈
색주가가 서민의 술집이라면 기방은 돈 많은 상인과 양반의 술집이었다. 옛날 양반들이 돈을 몸에 지닌다는 것을 천하게 여겼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돈의 액수를 입에 올린다는 것도 기피했는데, 하물며 직접 손으로 주고 받는다는 것은 양반 체통을 크게 해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기방에서 기생에게 팁을 줄 때는 하인으로 하여금 접시에 돈을 담아 젓가락을 얹어 갖고 들게 했다. 젓가락으로 돈을 집어 기생에게 주면 기생들은 큰절을 하며 치마폭으로 그 팁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방에서 받는 팁을 젓가락돈이라 불렀던 것이다.


사당패의 입물림돈
양반 사회에 젓가락돈이 있었다면 서민 사회에는 입물림돈이 있었다. 사당패의 패거리굿 끝에 예쁘장한 여사당이 팁을 받고자 굿마당을 돈다. 이때 구경꾼들은 엽전을 입에 물고 입물림이오 하며 턱을 내민다. 여사당은 그 입물림돈을 입으로 받아낸다. 요즘의 키스 머니다. 사당패의 팁이 입물림돈이 된 내력이다.

내외주가(內外酒家)의 허깨비돈
훈훈한 인심이 묻어나는 팁의 호칭으로 허깨비돈이라는 게 있었다. 옛날 북촌(北村) 양반 마을 대문에 내외주가(內外酒家)라 쓰고 그 둘레를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둘러 표시한 술집이 있었다. 내외주가는 과부나 몰락한 양반가의 안주인이 생계수단으로 술을 파는 내외주가에는 술 손님이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다. 술상에 탕, 물, 편육 등과 가양주를 준비해 놓고 술 손님을 기다리면 손님이 와서 반드시 세 주전자 이상을 팔아주어야 했다. 내외술집에서는 목로술집과 같이 술값을 잔 수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전자 수로 계산하는데 안주 값을 따로 받지 않는 것은 목로주점과 같았다. 해서 손님은 최소한 세 주전자를 팔아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술을 세 주전자 이상을 팔아야 그 집이 수지가 맞지, 겨우 한두 주전자만 팔면 푸짐히 차려 놓은 안주 탓에 손해를 보기 때문에 접대를 받은 사람이 주량이 적어 한두 주전자만 마셔도 세 주전자 값을 내놓아야 그 집에 손해가 없게 되고, 또한 이것이 관례처럼 지켜졌다. 세 주전자가  술상 한 상의 손익분기점이었을까? 처량한 양반 여인네의 고달픈 술장사에 훈훈한 인정이 느껴진다. 내외술집을 찾은 손님은 중문 안까지만 들어서서 "이리오너라", "술상 내보내시라고 여쭈어라" 술집 안주인 모습이라고는 술상을 내미는 팔뚝밖에 보지 못한 술 손님이 "잘먹고 갑니다라고 여쭈어라" 인사를 남기며 술값을 상에 놓는다. 이때 술값에 팁을 보태어놓으면서 "허깨비돈도 얹었다고 여쭈어라" 한다.  실체도 없는 허깨비에게 팁을 놓고 간다는 뜻이다. 허깨비돈은 술 손님 벼슬에 따라 액수가 달랐는데 당하관(堂下官)일 경우 술값의 9 푼, 당상관(堂上官)일 경우 18 푼이었다 하니 10 ~ 1 5퍼센트 하는 서양 사회의 팁과 비슷하다. 청진동에는 이런 내외주가가 열 집이 넘게 있었다고 한다.


인정미(人情米) 박정미(薄情米) 예전(例錢)
술집 팁은 아니었으나 거간꾼들이 관리들에게 주는 팁은  인정(人情) 또는 인정미(人情米)라 했다. 인정미는 10 퍼센트를 웃돌지 않았다. 이 인정미가 강요되어 박정미(薄情米)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말이다. 옛 관료 사회에서는  걸복(乞卜)이라 하여 문서에 복(卜)자를 써내림으로써 인정을 강요하는 것이 제도화되기까지 했다. 현감이나 감사나 판서 같이 높은 사람을 만나려 들면 문지기부터 안방별감에 이르기까지 예전(例錢)이라는 팁을 깔지 않고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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