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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술맛

by 하얀술


이규보의 아들 삼백

아들 삼백(三百)이가 술을 마시다[兒三百飮酒]

이제 젖니가 난 네가 벌써 술잔을 기울이니
분명 조만간 장이 썩어버릴 듯해 두렵구나
늘 잔뜩 취해 고꾸라지는 네 아비 배우지 말거라
평생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소리 들어왔단다

汝今乳齒已傾觴여금유치이경상
心恐年來必腐腸심공년래필부장
莫學乃翁長醉倒막학내옹장취도
一生人道太顚狂일생인도태전광

지금껏 내 몸 망친 것 오로지 술인데
지금 네가 술을 좋아하니 이를 또 어찌할거나
삼백이라 이름 지은 것 이제와 후회되나니
네가 날마다 삼백 잔씩 마셔댈까 두렵구나

一世誤身全是酒일세오신전시주
汝今好飮又何哉여금호음우하재
命名三百吾方悔명명삼백오방회
恐爾日傾三百杯공이일경삼백배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권

장성한 아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아들 가진 평범한 아버지들의 로망일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이규보도 그런 아버지였으리라. 허나 그의 아들은 생각보다 너무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나보다. 이제 젖니가 났다고 한 걸 보면 아직 술잔을 쥘 힘도 없을 나이였을 테니 말이다. 과장이 심하다. 과장이든 아니든 젖니난 아들이 벌써부터 술맛을 들여 혹여 아들의 장이 썩을까, 이름처럼 삼백 잔씩 마셔대다가 몸을 망칠까 봐 걱정한다. 시는 마냥 진지한데 내용은 장난스럽기 짝이없다.

... 내게 사랑하는 아들 하나 있으니 그 이름은 삼백이라. 내가 오 낭중(吳郞中)의 삼백운(三百韻) 시를 화답하였는데, 이날 이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삼았다. 장차 이씨(李氏)의 가문을 일으킬 것이고 태어나던 저녁엔 강을 놀라게 했네. 네가 태어나자 골격과 이마가 기이하고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얼굴도 희었다. 고명한 세 학사가 너의 탕병의 손님이 되어 아이를 낳은 지 칠일에 낭중(郞中) 오세문(吳世 文)ᆞ원외(員外) 정문갑(鄭文甲)ᆞ동각(東閣) 유서정(兪瑞廷)이 와서 방문 하고 시를 지어 서로 하례하였다. 시를 지어 농장을 축하하니 사와 운이 금석같이 쟁쟁하였다.

... 我有一愛子 其名曰三百 予和吳郞中三百韻詩 是日兒生 因以爲名 將興指 李宗 來入驚姜夕 爾生骨角奇 眼爛面復晢 磊落三學士 作爾湯餠客 兒生七日 吳郞 中世文 鄭員外文甲 兪東閣瑞廷來訪 作詩相賀 綴詩賀弄璋 詞韻鏘金石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6권


이규보가 자신의 아들에 대한 시를 보면 아들 아명이 ‘三百’인 것은 오세문의 3백운에 화답시를 적은 날에 아들이 태어나서라고 했다. 3백개나 되는 운자의 시면 600여행 에 이르는 분량이라서 화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기억할만다고 여겨 아이 이름을 지었나보다.

삼백이라는 아들의 이름에는 이규보의 자부심과 아이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언급하기를 그는 아이가 훌륭한 시인이 되어 가문을 일으켜 세우길 기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쯤엔 세상이 달라져 있을까? 삼백운의 시를 지을 정도의 능력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을까? 혹시나 아비처럼 부질없는 재능을 끌어안고 또다시 좌절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비처럼, 그리고 술 삼백 잔을 마셔버리자던 이태백처럼 늘 술에 취한 채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는 이러한 이규보의 자조와 기대와 걱정이 혼재되어 있다.

삼백이라는 아이가 훗날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삼백이 첫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 관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함은 제법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아버지처럼 시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 어느 쪽이든 아버지 이규보의 기대와 걱정은 모두 빗나갔다. 아들 가진 평범한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백에 비유할만한 이규보의 시

이규보는 글을 익힌 뒤로 시와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다. 11세 때에는 이미 숙부의 동료들 앞에서 글을 지어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4세에 당시 최고의 사학이었던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성명재(誠明齋)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의 하과(夏課)에서 거듭 1등을 차지하였다. 10대 초반의 이규보는 아마도 주변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한껏 자신감에 차 있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당(唐)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에 견주어 말하였다고 하니, 그 자부심이 어떠했을까.

과거는 사수생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글공부를 하고 학교를 다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과거 급제를 통한 관직 진출이었다. 이규보도 16세 때부터 과거의 예비 고시인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했지만,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그는 ‘7현’이라 불리던 오세재(吳世才) 등의 벗들과 어울리며 풍류를 즐기느라 과거 준비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한다. 22세에 네 번째로 응시해서야 합격하였는데, 이 때 1등으로 뽑혔으니 그와 가족들이 무척 기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189년(명종 19) 5월에 유공권(柳公權)이 주관한 국자감시의 십운시(十韻詩) 분야에서 1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힘들게 국자감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것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규보는 1190년(명종 20)에 열린 예부시(禮部試) 제술과(製述科)에 가장 낮은 등급인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하였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벼슬을 구걸한 이규보

과거에 급제했지만 이규보는 바로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무신들이 권력을 쥔 뒤로 인사(人事)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의 능력을 인정한 몇몇 관료들이 그를 추천하였지만, 번번이 관직을 받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 무렵 작성된 시 중에 여러 관료들에게 구직을 부탁하는 것들이 다수 남아있다. 40세가 될 때 까지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벼슬을 구걸하고 있었다.

정계에 입문하려고 천하를 주유한 공자를 일컬어 상가집의 개라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실력은 있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끼니마저도 걱정해야 했던 공자와 이규보의 처지가 많이 다르지 않아보인다.

최충헌의 세도를 업고 승승장구

그가 40세가 되었던 1207년(희종 3),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대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이 새로 모정(茅亭)을 짓고, 이규보 등 몇 사람을 불러 기(記)를 짓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이규보가 지은 글이 제일로 뽑혔다. 얼마 뒤 이규보는 국왕의 문서를 짓는 한림원(翰林院)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관직을 얻었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최충헌의 눈에 들었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규보 개인에게는 드디어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었으나, 그러한 현상 자체가 무신집권기 인사 행정의 난맥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규보가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

이때부터 이규보는 개경에서 관리의 삶을 살았다. 최충헌에게 여러 차례 초청되어 시를 지어 올렸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50세가 되었던 1217년(고종 4), 그는 우사간 지제고(右司諫 知制誥)가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잠시 최충헌의 눈 밖에 나서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나, 마침 이 때 최충헌이 사망하고 아들 최우(崔瑀)가 집권하여 다시 소환될 수 있었다. 더구나 이제는 정5품의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 起居注 知制誥)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최우의 집권기에 이규보는 인생의 절정기를 누렸다. 58세가 된 1225년(고종 12)에는 국자감시를, 1228년(고종 15)·1234년(고종 21)·1236년(고종 23)에는 예부시를 주관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1227년(고종 14)에는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선대 국왕의 실록 편찬도 영광이었겠으나, 당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가 된다는 것은 문신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명예로운 일이었기에, 이 시기에 이규보는 상당한 뿌듯함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몽골군을 철군시킨 명문장가

63세가 된 1230년(고종 17)에는 팔관회 의례 진행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벌어진 논쟁에 휘말려 섬으로 유배되긷ㄷ했으나 다행히 이듬해에 바로 사면되어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듬해인 1231년(고종 18),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이는 참혹하고 기나긴 전쟁기의 시작이었다. 이규보는 이 때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외교문서는 단순히 문체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후 상황에 대한 조리 있는 설명과 설득·회유 등 외교의 총체적인 내용이 담기는 것이다. 이규보의 글을 보고 몽골 황제가 감격하고 깨달아 철군하였다는 『고려사』 이규보 열전의 표현은 과장된 것이겠으나, 중요한 시국에서 그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다

몽골이 잠시 물러간 1232년(고종 19)에 최우는 강화도(江華島)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규보도 강화로 옮겨가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최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관로(官路)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오른 그였다. 아들들도 관리가 되어 조정에 출사하였고, 딸들은 어엿한 관리들과 혼인을 맺었다. 1238년(고종 25)에는 네 차례에 걸쳐 그가 선발한 과거 급제자들이 모여 합동으로 잔치를 열고 이규보를 기쁘게 하였다. 또한 당대의 화가로 칭송되던 정이안(鄭而安)으로부터 묵죽과 초상화를 선물받기도 하였다. 여러 병에 시달렸지만 늘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가야금 타는 일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냈다. 아마도 행복한 노후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규보에 대한 비판이 마땅한 이유는 강화도 천도 시절 그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나라는 몽골군이 내륙을 휩쓸어 온 나라가 전란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최우와 이규보 등이 누렸던 여유로운 삶의 모습에서는 전란의 고통은 흔적도 없이 풍요로왔다. 이규보의 문생들이 합동으로 잔치를 열어주던 바로 그 해, 경주(慶州) 황룡사(黃龍寺)의 탑은 몽골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규보가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재상의 지위에 오른 그가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한 나라의 재상의 역할과 그에 어울리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자기의 장점을 살려 직분만 수행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을 위하여 노력해야 마땅한 것일까? 정답을 고르기가 어려울지 몰라도,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규보는 1237년(고종 24)에 70세의 나이로 치사(致仕)하였다. 이미 병에 시달리고 있던 이규보였다. 그의 생전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최우의 후원하에 아들 이함(李涵)이 주관하여 그의 문집 편찬이 서둘러 착수되었다. 그러나 1241년(고종 28) 9월, 이규보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임종하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글짓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규보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은 지금 우리에게 당시의 시대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놓았다.

그저 이규보의 술 풍류와 아들의 아명 삼백의 작명 에피소드만 적어보려했다. 헌데 술이란 맺고 끊는 인연이 아닌 음식 아닌가. 술따라 술술 적다보니 벼슬을 구걸한 그의 재주가 공자의 주유를 떠 올리게 했고, 그가 치부하던 세도가 최충헌의 성씨가 최씨라는 것이 요즘의 시국과 비교해 보게도 한다.


이규보의 이 술은 쓴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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