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삶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같은 생각을 한다. 때로는 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장소의 변화는 생각의 궤적을 바꾼다.
달라진 풍경에 뇌가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익숙한 천장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의 사유는 비로소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을.
현재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 대한 나른한 실증, 그리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과거의 기억들. 그 편린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본능적인 발버둥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어 일정 부분 해소되곤 한다.
그때의 감정은 설렘일까, 아니면 낯선 곳에 던져진 자의 두려움일까.
아마도 그 두 마음이 엉킨 채로 길을 나서는 것이리라.
삶이 여행이라는 흔한 비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은 자명하다.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하는 이."
옛 시의 한 구절처럼, 나 역시 건너고 싶은 세계와 내 짧은 다리 사이에서 서성이는 나그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서성임은 멈춤이 아니라, 다음 생을 향한, 혹은 '또 다른 삶(In Un’altra Vita)'을 향한 치열한 모색이다.
"나는 정의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우아하고(elegance) 개방적인(openness) 음악을 지칭하는 단어라면, 나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미니멀리스트로 불리고 싶다."라고 빙하 위의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말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나른한 실증을 피해 여행을 떠나지만, 사실 우리는 장소가 아니라 '또 다른 삶(In Un altra Vita)'을 갈망하는 것이 아닐까.
루도비코가 건반 위에서 불필요한 소리를 깎아내어 미니멀리즘의 우아함을 찾아내듯, 나 또한 이 여행을 통해 군더더기 같은 기억들을 깎아낸다.
비록 다리가 짧아 한(恨)의 바다를 다 건너지 못하는 나그네일지라도, 내 마음속엔 여전히 나를 증명하고 싶은 '자부심'의 불꽃이 남아 있다.
이제 그 나른한 감상을 멈추고,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이들의 시대로 들어가 보려 한다.
그것은 단순한 부활이 아닌, 결핍을 야망으로 바꾼 자들의 처절한 기록이다.
신의 그림자를 지우고 인간의 얼굴을 다시 그려 넣었던, 그 뜨거웠던 '또 다른 삶'의 현장으로 이제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