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독서량을 늘렸다. 어딘가 인지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자기 계발서, 자연과학서, 소설, 고전 등을 늘어놓고 펼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동시에 4-5권을 함께 읽는다. 절대 좋은 방법은 아닐 거다. 다만 이렇게 독서하는 편이 머리를 말랑하게 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독서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자기 계발서와 고전의 차이는 유도와 검도의 차이처럼 아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동시에 책을 읽는 것은 한 번에 서로 다른 운동을 통해 수련을 쌓는 이미지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취향은 분명하다. 책을 읽기 시작한 후부터는 '고전'을 가장 좋아한다. 고전이라는 장르는 없다. 아마도 소설에 속하는 것 중에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책을 고전이라고 정의하지 않을까? 최소한 나의 정의는 그렇다. 나는 그런 책을 좋아한다. 다만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라는 것이 사전적으로 애매하다. 자칭 고전 마니아가 이야기하는 고전의 특징은 '부끄러움'을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또 과감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단순히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고전의 적확한 표현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페이지의 한 귀퉁이를 접어 놓을 수밖에 없다. 대체 '부끄러움'을 찾아서 헤매는 자아는 대체 무엇일까?
최근에 친한 친구 K와 묘한 대화를 나눴다. K는 황희정승 같은 사람이다. 말이 좋아 황희정승이지 자신의 맘을 쉽게 내놓지 않는다는 다른 표현이다. 다만 K도 세월 위에서 변화한다. 조금 더 자기다워지는 과정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솔직해진 그가 고마운 날이었다.
나: 학부 때 기억에 깊게 박힌 철학적 주제가 있어. '경계를 나간 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아마도 경계를 나 간자들을 예술가라고 하는 것이겠지. 혹은 순수한 것을 찾아 헤매는 자이거나
K: 그래서 너는 경계를 넘었어?
나: 나는 항상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아. 그냥 뻔뻔하게 경계 안에서 세상 즐겁게 지내던지 아니면 확 그 경계를 건너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는데.. 어쩐지 어느 쪽으로 되어버리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해.
K: 변명 아닐까? 네가 말하는 경계도 어쩌면 네 세상에만 존재하는 개념일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 난 지금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아. 너는 경계를 이야기하면서 너를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닐까? 경계에 걸쳐서 서있는 자도 세상에 존재해야 하잖아? 그냥 받아들일 때가 된 거 아니야?
너무나 비유적인 '경계'라는 말은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있는 주제다. 이것을 '틈'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전 작가들은 이 '경계'를 그 누구보다 잘 찾아내고 경계를 넘어가는 서사를 풀어쓴다. 책에서는 '부끄러움'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극의 주인공은 극도로 예민하다. 남의 시선을 심하게 신경 쓰고 또 남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의 존재가 무결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다만 그 '무결함'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무결함은 정의하지 못하지만 무결하지 못하다는 그 경계가 바로 자아로부터 오는 '부끄러움'이다. 결국 '부끄러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결성이 증명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다.
최선을 다해서 무결 혹은 완성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계속해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어제의 내가 오늘 부끄럽다. 어쩌면 아직 오지 못할 미래에 부끄러움이 있을 수도 있다. 자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한 번만 부끄러운 사람은 없다. 한번 벌어진 틈은 계속해서 막으려 해도 물길로 무너지는 댐처럼 벌어지고 악화된다. 한번 댐이 무너지고 나야만 다음 세상의 댐이 생기고 또 그것을 반복해서 부끄러워할 수 있다.
경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위에 서있다면 이제부터 속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틈은 벌어질 것이고 경계 밖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애매하게 중간에 서 있진 못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에 서있던 경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아예 다른 경계 위에 올라서 있다. 시간이 더뎌서 계속해서 경계 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나도 모르게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살아왔다. 물론 매번 경계를 넘을 때마다 무결함과는 거리가 멀어지지만.
'경계를 나간 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라는 말은 어쩌면 변하지 않는 진실이 될 것 같다. 최소한 나에게는. 다만 문장을 조금 고친다면 '금 밟은 자 아웃이다.'라는 말이 더 직설적으로 알아듣기 쉬울 것 같다. 물론 그 '아웃'이 그렇게 또 다른 시작이겠지 싶지만.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처럼 속였지만 단순히 이직과 전직에 대한 이야기다. 다음부터 구구절절 물어보지 않으려고 한다. '나 이번에 경계 밖으로 나갈까?'라고 주변을 피곤하게 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말해줘야겠다.
'야, 너 금 밟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