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공부하는 아이러니

생산과 감상에 대해

by Paz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교실 은 미묘한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앞으로 1년만 더 고생하면 내 세상이 온다는 기대감에 기대어 '노력', '고생', '질투', '기대'등이 한 곳에 어우러져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간 군상도 천태만상이다. 주변의 시끌벅적함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곧게 정진하는 아이, 고만고만한 그룹에 모여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아이, 입시라는 단어는 아예 관심이 없는 아이 등 제각기 자신만의 알을 깨고 나오려는 작은 새들의 모임이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 특히 아예 관심이 없거나 포기로 달관하던 아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어떤 환경과 경험에 의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마음 깊숙이 했는지 그리고 그 어린 마음에 어떤 고뇌와 상처가 남아있는지 정말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당시에는 그렇게 남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의 과제가 너무 컸기에 남의 알의 모양은 궁금하지 않았다. 덧붙이면 그때가 인생에서 한번 있는 부화의 경험이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앞으로 남아있을 인생의 과정이 너무도 많이 있기에 중요한 순간 중 하나정도로 대답할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세상에서 다시없을 중요한 순간이었다. 각설하고 오늘은 그 천태만상 중 기억에 남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긴장감이 높아지는 그룹에서는 일종의 신경증에 가까운 일들이 발생한다. 매번 모의고사 성적별로 책상 자리의 순서를 정하는 룰이 존재했다. 지금 보면 꽤 끔찍한 시스템이다. 지금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친구를 이기면 한 계단 성적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경쟁을 하다 보니 아이들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중에 '공부를 공부하는 아이'가 있었다. 큰 범주로서는 '고만고만한 그룹에 모여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아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그룹에 속해있었고 그 안에서의 긴장감을 공부하는 법에 대한 집중으로 푸는 아이였다. 지금은 웃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였다. 그 아이가 성가신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1. 본인보다 더 높은 결과를 내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공부법을 물어본다.

2. 본인보다 더 낮은 결과를 내는 친구에게 계속해서 공부법을 가르친다.


위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공부하는 법에 대해 적힌 서적을 읽고 온다. 지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떠든다. 공부는 잘하는 걸까? 대답하기 어려운 범주다. 완전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다. 다만 본인이 떠들어 말하는 것에 비해서는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밉쌀 맞지는 않은 아이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 아이가 쓱 눈치를 보고 다가왔다. 옆에 비스듬히 있던 빈 의자를 내 책상 옆으로 끌고 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험생의 자세는 무엇보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일이었다. 꼼짝없이 갇혔다.

'뭐 공부해?' 마음 한편에 짜증이 크게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특히 집중하는 시간에 누군가 방해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그래도 굳이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수학. 수학의 정석 풀고 있어'라고 별다를 것 없는 마른 대답 하며 제발 좀 이제 돌아가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걸 왜 또 풀어?, 거의 5번 이상은 본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글쎄 나는 여기 있는 게 이해가 안 돼서 10번이라도 다시 풀어야 할 것 같아'라며 응수했다.

그때 이 친구가 선을 넘는다.

'기본 정석 풀었으면 실력 정석을 풀어 봐야지. 나는 실력도 그렇게 안 어렵던데'

참고로 실력 정석이라는 것은 수학의 정석 시리즈 중에 심화판으로 나온 학습 참고서다. 표지가 일반 정석과 다른 파란색이기 때문에 파란 책이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응용 편이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다. 이 친구는 '너는 왜 다음 단계가 있는데 나아가지 않고 기본만 주구장창 반복하고 있니'라는 질문을 나에게 하는 참이었다. 참을성에 한계가 왔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겠지만 병아리의 치사함은 속도와 정도가 다르다. 아드레날린을 타고 전달된 분노는 뇌를 자극했고 내 뇌는 친구의 수학 성적, 나와의 관계 등을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 내뱉을 문장을 선정한다.

'실력 풀어서 뭐 해. 문과잖아. 수능에 나오지도 않아. 너 공부를 자꾸 공부하고 다니는데 그냥 점수 올리는 것에나 신경 써. 애초에 모의고사 수학 몇 점이었는데?'

얼굴이 붉어진 친구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한다. 그 친구의 뇌도 아드레날린과 함께 다음 내뱉을 문장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딱히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적이 세상의 전부인 우리의 전제에서는 점수라는 객관적 지표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 관점에서 이 친구는 나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 선정한 마지막 문장을 나지막이 내뱉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봐봐. 내가 더 학교는 잘 갈 거야'



공부를 공부하는 것은 의도 측면에서는 대견하다. 무언가를 목표하고 있고 목표에 대해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본인의 나름대로 분석하고 방법을 찾는 길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아이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을 쌓지 않은 태도에 있었다.

무언가를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따분하다. 그 따분한 수학의 정석을 10번 이상 되돌려가며 풀었던 이유는 어쩌면 이 행위의 최종 결과값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공부해서 얻게 될 결과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입시의 핵심이다. 내가 반복적인 행위를 하면서 쌓았던 기본기는 뭔지 모르지만 기대되는 미래에 대해 노력하는 자세였다. 사실 거의 환상에 가까운 미래였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매년 천 명 단위의 학생이 졸업하고 엇비슷한 학교의 졸업생을 합치면 1만 명이 취업시장에 쏟아져 나와서 채용 시장에서는 소화되지 않는 그런 것인 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따분함을 이겨낼 힘이 없었을 것 같다. 게다가 그 이후에 남아있는 인생의 다른 중요한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책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때 그 노력들을 하지 않았으면 나비효과와 같은 지금의 현실도 없다. 나도 모르는 인생의 단계가 축적된 것이 현재의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힘들지만 결국 계속해서 축적하고 생산해 내야 하는 과제는 모두가 가지게 된다.



요즘의 나 자신에게 '공부를 공부하는 아이'가 중첩된다. 한두 번의 좋은 결과를 낸 경험이 쌓이면 결과를 미리 측정하고자 하는 묘한 심리가 생긴다. '전략'이라는 말로 미리 미래를 재단하고 판단하며 결론을 내린다. 세월은 덤이다. 세월과 함께 경험이 쌓이면 무엇인가를 판단하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가만히 보니 '공부를 공부하는 아이'가 어느샌가 내 안에 앉아있다. 더 귀찮고 따분한 일은 피하게 되고 매번 다른 사람들이 해놓은 생산의 결과물을 감상하고 평가한다. '이건 그렇게 하면 잘 안되니까 이렇게 해보시죠. 언제까지 가능하세요?' 이것 참 난감하다. 좋은 결과를 내왔던 경험의 핵심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앞뒤 없는 시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는데 막상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맡은 일에서는 시도를 제한하는 일이 생긴다. 더 문제인 것은 나 자신의 도태다. 생산하지 않고 감상만 하는 내가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 따분한 표정'과 '축 늘어진 뱃살'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결론이 나버린 미래가 따분한 것은 사실이다. 결론까지 이르기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 안에 깨달음은 '공부를 공부하는 참고서'를 만들기 충분하다. 문제는 그것을 참고하는고자 하는 타인들은 각각 자신만의 미래와 기대를 그린다는 점이다. 그 참고서는 내 과거이지 그들의 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참고서를 고쳐 쓰고 전파하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혹시나 멘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면 그저 그들이 그리는 미래를 잘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오히려 죽지도 않는 내가 내 과거에 기반한 참고서를 만들 때 인생은 죽어버린다.

죽어버린 인생에서 남은 것은 감상밖에 없다. 미래가 기대되지 않은 나는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입은 옷과 내 하루의 얼굴은 이미 완성된 결론에 따라 크게 관심이 없다. 다만 남들이 해놓은 최선의 결과물만 탐닉한다. 고급 음식과 잘 만들어진 와인을 마시며 감상평을 남기는 게 내 인생에 남은 가장 큰 행복이라면 생산과는 멀어진 나는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남긴 좋은 결과물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큰 성장이다. 다만 그것이 내 생산에 쓰이지 않고 감상 자체가 목표가 되는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이미지와 맞닿는다.



지금 다시 수학의 정석을 펼쳐볼 시간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현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솔직하게 살펴보면 무리 없게 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결과물을 낸 것도 아니다. 아직 세상에 제대로 된 생산물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기대감은 충분하다. 그 기대감을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서촌 일대를 누비며 좋은 골목 안에 위치한 편안한 장소에서 돌로 된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갖게 되는 여유는 내가 그릴 미래와 맞닿아있다.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비슷해져 있기를 바라며 다시 노트필기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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