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대표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에게 쥐스킨트는 '깊이에의 강요'다. 독서량이 가난한 사람들이 의례히 그러하듯 나 또한 다른 작품을 빌려 주제를 잡아가고자 할 때는 몇 안 되는 단골 작품 리스트가 있다. 그중에 바로하나가 '깊이에의 강요'다. 젊은 능력 있는 화가가 평론가에게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깊이를 찾기 위해 고뇌하다 자살한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평론가는 그녀의 초기작에 깊이가 있었다는 평론을 내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식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의식주라는 동물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에 집중하게 되고 평생 '나 자신'을 어떻게 만들고 표현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현재의 인간의 숙명적 과제는 '나 자신'을 찾는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 학문, 사업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행하는 모든 의미 있는 일들은 결국 나 자신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애정과 깊이에 대한 여정이다.
그래서 내가 집중하려는 대상에 대한 깊이에 관한 문제는 항상 질문거리가 된다. 깊이 없이 가벼운 서비스나 물건으로 세상에 가득 차서 의기양양하는 세상을 바라보면 솔직히 끔찍하다. 가장 혐오하는 것이 깊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신한다. 그런데 대체 '깊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게 깊이가 없고 있다는 사실을 구분하는 것이 주관성을 벗어나서 가능할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을 혐오하는 멍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깊이의 문제는 종종 회피의 수단으로 쓰인다. 가령 '나는 내일부터 소설가가 될 거야. 정말 깊이 있는 소설을 쓸 거야. 그런데 그 깊이를 만들어 내는데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와 같은 생각을 매년 반복하고 있다면 깊이는 허울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깊이에 몰두하는 것만큼 '있는 척'하기 좋은 구색은 없다. 그렇게 깊이에 몰두하여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나의 깊이는 헤아리지도 못한 채 내가 가진 것을 풀어놓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아주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렇다면 깊이도 없는데 무작정 시작부터 하는 건 어떨까? 뭐든 그냥 닥치는 대로 해보자라며 말도 안 되는 몇 자를 적어두고 소설이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자칭 소설가가 되는 것은 불쾌감을 준다.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고민한다면 길거리의 쓰레기와 깊이 없는 소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무래도 자극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지 않을까.
조금 시선을 바꿔서 깊이에 집착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가치 분석도 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지구 친화적 사고로 생각하면 대자연에서 인간이 하는 행위의 대다수는 자연을 훼손하는 쪽이다. 우리는 가치 있다고 말하지만 지구 관점에서는 오히려 폐지보다 못한 것이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몹쓸 소리를 하고자 사고를 확장하는 건 아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나 자신의 깊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지구적인 배려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다. 나 자신이 생산해 내는 것은 결국 내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 친화적 사고를 탑재하고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는 노력으로 깊이가 생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남의 세상에 살아간다는 말 아닐까
깊이는 상대적인 문제다. 그래서 답도 없다. 더 본질적인 사실은 이 시간에도 나 자신의 가능성을 깊이의 이면에 가두고 하나도 풀어놓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비록 나 자신을 풀어놓는 일이 세상에 쓰레기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풀어놓아야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이 뒤에 숨어서 '있는 척'만 하다가는 어느새 늙고 늙어 나는 이런 사람일 뻔했지 라는 말로 세상의 의미를 짧게 줄여 재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상이 내 세상 이어야지만 개인의 책임감이 주어진다.
깊이가 뭔지 설명할 수 없어도 난 깊이 있는 것들이 좋다. 세상에 모든 것들은 그것을 만들고 상상했던 사람에게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AI와 이야기해 보니 '통제 성향'이라고 한다. 인정한다. 어쨌든 모든 사물에 이유가 있어야만 내 세상에서 설명이 되는 그런 통제성향이라는 걸. 통제성향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게 중년 이후의 과업이겠지만 그래도 난 깊이 있는 것들이 좋다. 깊이가 있다는 것들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바꾸고 가능성을 한 스푼 추가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깊이 있는 것들을 좋다.
대체 이런 잡스러운 글을 왜 쓰는 걸까?라고 생각이 들 때 이야기해 본다. 나 자신의 과업을 '깊이 있는 것들에 대한 탐색'으로 정했다고. 어쩌면 제작자는 의도하지 않았을 깊이마저 찾아보는 길을 가보고자 한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다. 꿈은 자연이지만 해몽은 문학이다. 사람들이 열심히 자신의 세계를 펼쳐 놓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끼면서 그 깊이를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해보려 한다. 그리고 일단 하는 거다. 후회하지 않게.
물론 '깊이에의 강요'는 어느 정도 각오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