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짝사랑에 실패하는 가 2
누군가 나를 사랑하게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그것은 속임수를 써서 이 세계로 하여금 나를 인정받게 하는 게 가능한지, 아닌 지를 따지는 것과 같다. 최초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거의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치부해도 될만큼 우연에 지배받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지에 대한 여부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의 가능 여부에 대해선 시간과 노력을 핑계로 논의의 여지가 있을 줄 안다. 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영원히 속임수를 쓸 줄 아는 자, 가장 교묘한 형태로 자기 자신을 속일 줄 아는 자, 이 세계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기 위해서 종국에 자아마저 포기할 수 있는 자가 아니고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불가능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나에게는 상대로 하여금 정신적 공백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채우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만한 무언가 선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내가 사랑에 빠진 상대를 필사적으로 유혹하는 시도가 대개 실패하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게 이 세계에 연결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서 그러한 것을 발견하지 않는다. 존재가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 우리는 부족하고, 불안하며, 불완전하다. 왜 그가 나를 사랑해야 하겠는가? 이토록 자기 존재의 불안도 이기지 못해서 타인에게 매달리는 꼴로 살 수 밖에 없는 나를?
물론, 나에게는 어떤 종류의 매력적인 특질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학위, 외모, 재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추후에 살펴보겠지만, 이같은 개인의 특질은 누군가로 하여금 사랑을 하게 만드는 데 전혀 무관하다. 굳이 호르몬을 통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이같은 특질이 성적인 매력 혹은 정신적 호감을 상대로 하여금 불러일으킬 수 있을 지언정, 그러한 특질 자체가 혹은 그 특질이 발생시킨 매력이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에 대한 여부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인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만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필연적으로 갖고있는 성질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이 세계의 존재 불안을 잊고, 정신적 안정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만큼 완성된 정신적 토대가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의해서 만들 수 있는 특질로 하여금 내가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그러한 이끌림은 그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그 특질 자체를 향한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지거나, 혹은 더 나은 특질을 가진 상대를 만나면 언제든지 변화가능하다. 오로지 정신, 만일 그같은 단어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철학적인 표현이라면, 삶을 대하는 어떤 종류의 개인적인 태도만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랑은 인위성이 배제된 영역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표현이 늘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정말로 사랑이 시간이 맞는다고 발생할 수 있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나의 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게 해주는 상대를 만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차원에서 기적적인 우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랑이란 현상을 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발생시키게 만드는 것은 개개인이 갖는 과거의 차이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성인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하여 나보다 먼저 악순환을 거치고 난 뒤에 지쳐있거나, 과거의 경험이 없을 경우, 누군가를 이 세계에 연결시킨다는 것의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 그같은 기회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바-를 자기 자신의 실책으로 날려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한 이들은 추후에 사랑 자체를 경계하게 될 확률이 몹시 높다. 미상불 인간은 늘 자기 자신의 실책으로 사랑에 실패한다. 첫사랑만이 아니다. 첫사랑의 실패를 경험의 부재로 탓하는 것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하는 지 아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간이 그것을 대하는 것이라는, 표면적 관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흡사 블록을 쌓듯 채울 수 있는 지식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마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이가 뜻밖의 충격을 받았는 데도 불구하고 경험의 부재로 말을 하지 못하고, 결국 발만 구르는 것처럼, 분명히 경험과 관련이 있지만, -아마도 그이는 말을 할 줄 안다면 보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므로-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에서 기인한다. 만일 충격에 무언가 외치고 싶다는 욕구가 발생했다면, 그 충격에서 받은 당혹스러움이란 말을 배웠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아마도 말을 하는 법을 배웠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 지 알겠지만, 그렇다고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처럼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경험의 유무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 앞에서 받는 충격에 인간은 늘 고스란히 영향을 받고, 정신적으로 불안할 수록 이에 대해 대처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애꿎은 '사랑'이란 현상 그 자체를 탓하게 된다.
물론, 자기 자신의 실수로 사랑에 실패한 이들이 사랑 그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탓을 하는 것은 일견 우스운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 존재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스스로 박탈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없다. 인간은 비겁하고, 겁이 많기 때문에, 늘 누군가를 탓하면서 존재 불안을 극복한다.
모든 사랑에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비겁함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겁,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 과연 자아 밖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타자와의 정신적 교류를 담보하는 사랑에 그만한 장애가 있을까. '그만해. 그 사람과는 이어질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라는 말은 결단코 감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고 말 명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며,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된 상대에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엔 나의 온 정신이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있기 때문에, 즉,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그로부터 제공받고 싶어하는 데 여념이 없는 그 이기적인 태도때문에 실패에 그치고 만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자비를 갖춰서 나에게 '나야말로 그의 존재의 불안을 이기게 하고, 마치 탯줄처럼 그를 이 세계에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입증할 기회'를 줄 지언정, 그같은 기회 앞에서 나는 간신히 말을 하는 법만 배운 아기가 당혹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처럼 당황하기 마련이다. 과연 그가 사랑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지란 늘 닥치기 전까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여러분이 이 글을 읽게 만드는 이유가 될, 한 가지의 보편적인 결과가 드러난다 :
나는 그가 사랑할 수 있을만큼 준비된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저 사람이 나를 놓아주었으면, 차라리 이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위선이 아니다. 가장 나를 이 세계의 일부로서 받아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파괴적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안온한 토대가 나에게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거나,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인간 정신에 그동안 발견되지 못했던 정신적 공백을 일깨우고, 바로 그 공백으로부터 인간 정신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러나 만일 나의 정신 상태가 그러한 파괴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내 정신은 마치 재난에 예비하지 않은 섬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처럼 파괴를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강도를 결정하는 원인은 큰 차이가 있는 데, 자연재해는 외부적인 현상으로서 그 강도가 미리 결정되어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이므로, 그 정신의 토대에 의해서 강도가 결정된는 것이다.
모든 응답받지 못한 사랑에 실패해서 얻는 상처는 회복을 당할 수 있을까. 양자간의 감정의 무게의 불균형은 일견 미미하게나마 느꼈던 정신적 결핍을 보다 확장한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완벽한 성채처럼 보였던 자아를 그것은 철저하게 부숴뜨린다. 오로지 자기 존재 불안을 잊고, 이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에서 발현된 현상이 보다 우리 존재의 결핍과 독립성을 일깨우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감각했던 자기 존재의 불충분함, 정신적 공백은 그에게 내가 사랑하기에 충분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즉, 나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끈이 나를 이 세계에 묶는 것을 거부하면서, 나는 자기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충동마저 시달리게 된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나를 거부하면서 이 세계에 투영된 나 자신을 보는 법까지 변형을 당한 마당에, 그토록 끔찍하고, 파괴적인 정도의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만큼의 충격만을 준다는 것은, 적어도 그러한 충격이 육체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데서 그 정당성을 얻는게 아닌 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아마도 짝사랑이 양자 간의 사랑보다 진실되고, 무게있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것은 최초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향한 짝사랑에 수반되는 비극적 고통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대와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통해서, 오로지 독립적인 감정에서 발현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인간이 최초로 세계에 인정받고자 하는, 그 해소되지 않는 욕구를 우리가 직면하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영원히 답없는 짝사랑을 이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 사람을 사랑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가짜 사랑'을 반복하는 종류의 인간도 있다. 금새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인간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내부에 깃든 공백을 성찰하긴 커녕 배고플 때마다 인스턴트 음식을 찾아헤매듯 약간의 호감을 느끼게 하는 타인을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자기 존재를 이 세계에 인정받기 위한 용기를 내지 않고, 정신적 결핍을 채우는 데 만족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의해서 발견된 정신적 공백의 회복은 일시적이며, 특히 양자간의 감정의 무게가 불균형한 관계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불운한 결말을 맞게 되며, 특히 나의 내부에 깃든 공백을 외부에서 메우는 방식은 일견 쉽고, 가장 그럴 듯한 방법처럼 보일 수 있을 지언정, 자기 반성과 고찰을 배제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방식을 보이기 때문에 영원히 인간을 유아기에 머무르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아마도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무의식에 자리하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이 세계가 수용하는 자아로서, 이 세계와 연결된 실체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일지언정 스스로를 욱여넣게 되는 비극을 낳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은 단순히 인간을 덮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성장과 발전을 하게 만드는 토대를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통해서 파괴를 당한 정신은 마치 즉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지 않은 몸에 상처가 남는 것처럼 의식적인 차원의 자기 반성을 꾸준히 시도하지 않는 한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러한 결과는 기존의 세계-내-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투사했던 이미지의 변형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계와 단절된 채 부유하는 인간 존재를 직면하는 과정을 그것은 담보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용기를 요구한다.
한편,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본연적 불안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 결핍을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나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 지,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정신적 공백을 완전하게 해결하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게 아마도 미디어가 자본으로 포장해온 '응답받지 못할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그만큼 안정적인 정신과 이성을 차분하게 갈고 닦는 삶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이 세계와 단절된 채 부유하는 존재의 불안을 잊고싶은 인간 본연의 욕구가 부른 이기적인 참사를 감상으로 포장하는 데 미디어는 급급하다. 그러나 사랑은 철저하게 우연에 의해서 발생한 필연적인 현상이며, 존재의 불안을 잊게 하는 유일한 통로일진대 결코 그것은 단순한 차원의 논의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첫사랑도, 짝사랑도 아닌 데, 왜 우리는 사랑을 실패할까? 이따금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방법을 통해서 나를 알리고,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하기는 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 사람의 정신적 결핍을 채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상대며, 그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본연적 불안을 잊게 하는 끈이라면, 왜 나를 사랑하던 사람은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며, 내가 사랑하던 사람을 나는 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가?
아니, 단순하게 호르몬의 영향이라 답변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이 글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