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사랑에 실패하는 가 1
3. '환상, 착각, 기만'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지 않고 사랑을 대하는 법
인간은 자기 존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을 욕구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소멸성, 유한성을 잊게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 세계 속에 투영된 자기 존재를, 이 세계를 통해서 확인하면서, 보다 수용가능한 형태로 왜곡시키고자 욕구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기 존재에 관한 인간 본연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을 개인은 자기 외부에서 탐색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것을 외부에서 해소하고자 욕구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편,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의 유한성이 완전하게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는 인간이다. 나도 죽는다.' 는 식의 간단한 삼단 논법의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존재의 불안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고유의 정신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존재의 유한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이 세계와 자기 존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즉, 이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는 '무언가'로서 자기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 두 가지 선택지에 따라서 노력하는 데, 첫째, 현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정신적 결핍을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둘째, 초월적으로 자기 존재의 일부를 남기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이같은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같은 존재론적 혹은 생물학적 욕구의 터 위에서 사랑이 발생하게 된다.
두 번째 조건에 관해선 보편적 유전자 형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 보다 많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첫 번째 조건에 관해선 이 세계와 자아를 화해시키기 위한 개인의 의식적 노력의 차원에서 철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자궁 밖 세계에서 적응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 세계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수용할 수 있게끔, 최대한 불친절하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곳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데, 이러한 노력의 가장 큰 장애물로서 모든 인간은 개인의 고유한 정신적 결핍을 발견하게 된다. 제 아무리 이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 것처럼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인간도 자기 자신의 정신적 결핍으로 인해서 실제적인 장애를 만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서 직면하게 되는 내부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서 -영원히 이곳에 존재하고 싶다는 존재론적 욕구를 완전하게 해소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외부로부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을 탐색한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자기 존재의 불안을 의식적 차원에서 해소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통해서 결핍의 충족 욕구를 해결하며, 우리는 이같은 행위를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일컫는다.
물론, 이같은 사랑의 댓가는 때때로 잔혹하기 그지 없는 정신적 상처를 우리에게 남긴다. 대부분의 경우,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주관의 현상인 사랑은 그 대상으로부터 응답받지 못한 채 남게 된다. -심지어 대상으로부터 응답받지 못한 감정만을 '사랑'으로 취급하는 극적인 부류도 있으나, 이 장에선 그것을 논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의 정신 속에 '나를 이 세계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유일한 대상에게 거부를 당한 경험'으로서 남게 되는 그 같은 경험은 우리의 정신적 결핍을 확장시키고, 존재의 가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것처럼 그 간극을 심화시키는 결과만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미디어가 알려주지 않는 종류의 어마어마한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따금, 아주 소수의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처럼 보이는 대로, 인간은 자신이 사랑을 발견한 상대가 나에게서 사랑을 발견하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즉, 스스로에게 그것을 깨달을 기회를 준 소수의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한다.
도대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분홍색의 하트 모양도, 초콜렛 향기도, 무조건적인 헌신의 이미지도 그것은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반드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물리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을 담보하지도 않고, 매 순간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어.' 라는 깨달음을 주지도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진정한 사랑의 정의는 굳이 해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정한 사랑이란 대상이 자기 존재의 불안을 잊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그의 존재를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글은 왜 사랑이 우연에 의해서 발생하여,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종국에 부정적인 형태의 극적인 결말을 맺는 환상처럼 보이는 지 논증하면서, 실상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임을 밝히는 데 목적을 갖는다.
아마도 사랑을 해체하기 위해서 가장 겉에 놓인 껍질을 벗기는 게 요구될 것이다. 그러므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의 정신에 우리를 이입해보자. 모든 것이 아름답다. 이 사람에게 도착하는 문자 하나, 전화 한통에 이 세계에 나를 연결시키는 거대한 의미가 담긴 것 같고, 실제로 내가 그와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릴 때면 TV 속에 나올법한 이야기 혹은 간밤의 꿈처럼 마음은 들썩거린다. 도무지 나에게 이런 종류의 사치스러운 감상이 허락된 것을 믿을 수 없다. 이같은 현상을 나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다.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종류의 광기가 내 정신을 어지럽히고, 나는 내 인생의 주권마저 빼앗긴 것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이같은 광기 어린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개인의 정신적 결핍은 채워지는 것만 같고, 존재의 불안은 해소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순간, 어떻게 의식적으로, 혹은 분명한 형태로 목적을 갖지 않았던 인간 존재의 본연의 목표가 해소되는 것을 인간은 버틸 수 있을까?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그러므로 의식의 차원에서 바라지 않았으나, 무의식에 내내 존재했던 목표, 오로지 이 세계에 나의 존재가 일깨워지기만을 기다렸던 인간은 그야말로 꽃이 최초로 잎을 펼치듯 의식의 지평이 '피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나는 이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세계에 연결된 것만 같은 기분, '무언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은 그토록 중독적이다. 미상불 인간 존재의 시초를 살펴보면, 그같은 무의미한 우연이 또 없다. 만일 개인의 부모가 하필 그 순간에 성관계를 맺었고, 하필 그 순간에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지 않았다면, 필경 이 세계가 계획한 바 없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은 일부 종교인의 해석을 논외로 두면 비극적일만큼 사실로서 다가온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사실, 나 이전과 이후에 아무것도 영원히 남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일평생 괴롭히는 숙제다. 모든 인간은 그 시초부터 이 세계와 관계없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을 경험하는 인간은 다르다. 나의 삶은 사랑의 결실로 맺을 수 있는 초월적인 영역 -출산-으로 이어지고, 나의 현시적인 삶은 그 자체로 대상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사랑의 충족감은 인간의 이성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뒤덮는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존재의 유한성에서 비롯된 자기 존재의 불안을 포함하여, 인간 내부의 정신적 결핍을 외부의 대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 지 깨닫는 순간이 모든 사랑하는 인류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때, 이중적 깨달음이 발생한다. 방금 전까지 나의 존재 불안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이는 존재 불안은 커녕, -심지어 그와 내가 출산을 경험하지도 않을 것이라면.- 정신적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고, 만일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착각을 이어나갈 지언정 언젠가 그가 사라지고 나면 나의 정신적 결핍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며,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의식적으로 감각하지 못했던 그 결핍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다가올 지 차치하고- 나 또한 그의 정신적 결핍을 해소할 수 있거나, 존재 불안을 극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우리는 얻게 된다. 게다가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랑하는 대상의 본질이란 자아 주관에 현상된 그것과 몹시 거리가 먼, 한 명의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자라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보다 현상학적으로 살펴보자. 단, 과연 이 세계가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지, 내부에 존재하는 지는 현상학자에게 맡겨두고, 보다 간단한 차원의 논의를 우리는 시도해볼 것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이 세계는 철저하게 주관을 통해서 발생한 현상으로서, 그의 주관적 관념론은 자아의 존재를 이 세계에 선제적으로 확립시키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 세계는 자아 외부에 존재할 수 없다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사랑을 분석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 존재는 자아 주관을 배제하고 존재의 터가 되는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보인다. 한편, 이 세계가 나를 통과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은 너무나 순진하고,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를 이 세계의 일부로서, 혹은 그 세계를 근거짓는 근원으로서, 파악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자아 주관 내 발현된 현상으로서 자기를 인식한다고 가정해보자. 즉, 이 세계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되 非필연적 발생과정을 거친 결과로서 존재하므로 영원히 이 세계와 연결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자인 나를 포함하여, 자아 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되 주관 내 발생하는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도 다르지 않다.
이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나와 이 세계의 존재론적 갈등을 해소하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의미를 나로 하여금 갖게 하고, 그러므로 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무언가로 해석되는 그 사람은, 나의 주관 내 발생한 현상, 외부 대상의 본질과 독립적인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계가 내가 보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듯, 자아 주관 내에서 사랑하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주관 밖 존재자가 주관을 통과하여 존재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도를 당한다. 영원히 이 사람을 나는 제대로 볼 수 없다. 보다 사랑이 끔찍한 것은, 상대도 나에게 동일한 현상을 겪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 사람의 정신 속에, '사랑을 할 수 있을만한 존재'로서 우리는 현상되야 마땅하다. 적어도, 그를 있는 그대로 이 세계에 허락할 순 없을 지언정, 정신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모습으로서 드러나야 한다. 즉, 우리가 대상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대상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광기에 취한 나머지 '그런 형태로 가장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에는 -당연하게도- 필연적인 결함이 있는 데, 타자의 정신적 공백-존재론적 불안-을 채울 수 있을만큼 나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특히 그것이 최초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험처럼 지나치게 광기에 어리고, 극적인 경험이라는 전제 하에, 절대로 타인이 나로 하여금 이 세계에 무리없이 편입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꾀하는 게 아니라, 그의 존재를 수단으로 삼아 내가 이 세계의 일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에 욕구의 모든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허구로 꾀한 자아로 상대를 대할 때조차, 어느 순간, 나는 자연스레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상대에게 -실체를 입고 내 눈 앞에 현시한 세계에게- 진실되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설령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도, 당신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지 않겠냐는 불평등한 질문을 우리는 던지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된 두 가련한 죽을 운명의 존재자는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향해 무조건적인 쾌의 제공을 약속했던 시절을 이성이 돌아오면서 잊게 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본질을 깨닫게 된 뒤, 인간은 서로의 존재적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계약관계가 허구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관계로부터 탈피하고자 욕구하게 된다. 이 사람의 존재 목적은 나를 이 세계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도 한낱 자기 존재의 해소할 수 없는 불안을 어떻게든 이기고자 욕구하고, 고유의 정신적 결핍으로 발현된 보편적 정신적 공백-존재론적 불안-을 대상을 통해서 메우고자 하는 시도를 이어가는 안타까운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와 나는 다만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대상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오도하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소멸될 운명의 존재자들에 불과했다. 어쩌다 성적인 매력을 토대로 자기 존재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적극적으로 착각을 한 데서 발전한 관계가 그와 나를 교제라는 형태로 붙들어맸을 뿐, 결국 우리의 관계는 다른 이들과 특별할 게 없었다. 어떻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당장 눈 앞에 있는 상대를 폭행하고, 모욕해도 시원찮을 것 같은 분노가 우리를 감싼다. 차라리 이 관계를 포기하고 싶을만큼 파괴적인 욕구가 지나간 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이성을 깨우는 순간, 사랑의 끝에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 때 사랑에 빠졌던 인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왜 대상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지? 왜 나의 존재 불안을 해소하긴커녕, 나의 정신적 결핍을 채울 수도 없는 존재자에 불과한 대상이 나에게 송구해하지 않지? 보다 나를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지? 내 머릿속에 존재했던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갔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상을 나의 주관적 현상에 맞추기 위해서 폭력이 발생한다. 내 정신적 결함을 메울 수 있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지난 뒤, 자만한 인간의 눈에 그의 결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랑이 존속되지 못하고 예상보다 일찍 끝나게 되는 이유는 상대가 나의 정신적 결함을 채워주긴커녕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가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의 허구적인 면모를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는 법도 없다. 제 아무리 진실된 태도를 유지해도 끝없이 장애를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연애에서 무비판적으로 허구적 자아가 투영된 나를 만나는 상대와의 관계를 수월하게 이어갈 수는 없다.
한편, 사랑을 받는 주체로서도 나는 그의 주관 내 발생한 현상으로서의 자아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내 주관 내 최초로 발생한 현상, 나로 하여금 사랑할 만하다고 느끼게 했던 대상의 예외로서 존재하는 그를, 아마도 그의 본질에 보다 가까울 그 상태를 허용할 수 없으며, 나 또한 그의 주관 내 발생한 현상에서 사랑할 만한 존재로서 발현했던 그 대상으로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인식적 차이에서 불거진 간극이 방금 전까지 서로를 사랑한다 부르짖었던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아마도 얼마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상대의 정신적인 공백을 메우기 위한 노력을 서로 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독립적인 현상 속에 존재하는 대상이 됨의 갈등을 그와 나는 영원히 해소할 수 없다.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를 갈망하는 두 존재자는 자아 주관 밖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굴레에 갇힌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타자의 주관 내 존재하는 현상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영원히 화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는 종국에 그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사랑이란 타자와의 적극적 착각을 기반으로 형성된 착각이었다고 믿게 되면서.
그렇다면 이제 인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내재된 존재론적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사랑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우리 모두는 타고났기 때문이다. 한 가지의 착각에서 비롯된 두 가지의 독립적인 현상, 즉,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