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설화 Jan 22. 2017

2. 나는 재스민이 되고 싶었다, 블루 재스민

자아편



 재스민의 삶은 완벽하다. 사업을 하는 남편, 하버드에 간 아들, 아름다운 외모까지. 오후에 비버리 힐즈에서 친구와 쇼핑을 하고, 수영장을 가진 저택에서 티파티를 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외도를 고백하는 순간, 연극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2장: 불행]으로 넘어가듯 완벽했던 인생은 막을 내린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재스민은 낯선 이를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는 데. 분명 내 탓이 아닌 데. 이런 게 내 삶일 리 없는 데.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대강의 청사진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이런 사람이고 싶다.' 의 대략적인 윤곽에 대해서 혹자는 그것을 꿈, 혹은 현실로 일컫기도 한다. 만일 그것을 전자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낮의 오후에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서 떠올리기 좋은 공상 소재가 그것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있을 새도 없이, 이미 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만치 달려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재스민은 후자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재스민이란 이름부터 그렇다. 본래 재스민은 '자넷'이라는 보다 평범한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재스민은 '자넷'이란 이름은 자신의 삶의 청사진에 비교했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에 어울리는 '재스민'이란 이름을 선택하면서, 우아하고, 낭만적인 이름에 걸맞는 상류층의 삶을 그녀는 소화한다.


 할과 이혼한 뒤, 삶을 대하는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는 보다 두드러진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몰락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재스민은 동생, 진저의 집에 찾아간다. 어떻게 자신의 삶을 극복할 지에 대해서 동생과 상의한 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서 컴퓨터 수업을 수강한다. -방향은 틀린 것 같지만, 그게 우디 앨런 식의 코메디다. 프로타고니스트의 시선에서 전적으로 타당한 데, 관객의 시선에선 어처구니가 없는 선택을 그들은 이어나간다.- 그리고 컴퓨터 수업의 수강료를 충당하기 위해서 치과의사의 리셉셔니스트로 재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리셉셔니스트로 재직하는 그녀를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상대로 본 치과의사가 그녀에게 강제적인 성추행을 하면서, 자아에 상처를 받게 된 그녀는 일을 관두게 되지만, 이러한 경험은 그녀에게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제안하게 된다. 

 

 모든 것을 돌이켜보면서 재스민은 생각한다. 동생, 진저의 남자친구가 소개한 불량배와 어울리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치과의사가 성추행을 할 만큼 우습게 보이는 것도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울리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을 되찾고 싶은 그녀는 부유한 남편이 될 만한 상대를 물색한다. 그러나 직업도, 능력도, 심지어 대학 졸업장도 없는 그녀가 상류층으로 다시 진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재스민은 이름을 바꿨을 때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 자넷인 그녀가 재스민이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직업과 커리어, 과거를 속이면서 정치인이 되길 희망하는 남자, 드와이트와 교제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지난 과거는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그조차도 금세 탄로가 나게 된다. 우아하고, 낭만적인 '재스민'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나의 삶을 되찾기 위한 재스민의 여정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신은 죽었다.


 플라톤 이래 이어진 전통 서구철학과 기독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이 세계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 세계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 세계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를 위해서 사는 삶이 종국에 인간의 삶을 망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불행한 노예의 삶, 나의 주인이 이 세계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억울하지 않겠는 가. 그렇다면 신이 예비한 천국도, 이 세계의 사물의 완전한 모태를 갖춘 이데아도 없는 세계,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가. 전통 서구철학의 가치가 전복되는 허무주의의 끝에서 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의 가능성,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발견한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세계, 인간의 시점은 다시 이 세계로 집중된다. 흡사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이 세계를 찬양하는 것처럼 인간의 시선은 이 세계를 향해 옮겨진다. 미상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것을 니체는 권고한다. 신도, 이데아도, 형이상학적 세계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제 운명을 끌어안는 초인이 되길 권유한다.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듯, 제 인생을 놀이처럼 대하고, 실패하면 실패하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대로 끌어안길 최초의 비극적 철학자는 권유한다. 그렇게 허무주의는 극복되고, 미련없이 종래의 가치를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맨쉬의 정신은 인류에 퍼진다.  


 누군가는 재스민의 삶을 수동적 허무주의로 평가할 지도 모른다. 최고의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삶, 향락과 무심한 이기주의에 젖어서 제 운명을 회피하면서 살고 있다고 평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재스민의 삶에서 적극적 의지를 발견했다. '이것은 내 삶이 아니다.' 그렇게 재스민은 제 삶을 부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능동적으로 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현대사회는 니체의 시대에 빚을 진 덕에 기독교 사고방식의 그늘로부터 일말의 자유를 얻게 됐다. 만일 니체의 말대로 모든 철학자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제 시대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 해석을 내놓는 데 불과하다면, 현대사회의 인간은 적어도 기독교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향한 적극적 포기의지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다. 이 세계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없다는 것에 대한 충격은 그 시대에 비해서 덜하거나, 사람에 따라선,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순간, 여느 현대인처럼 재스민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이곳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데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지언정, 혼잣말을 하건, 현실부정을 하건, 재스민은 그녀의 방식대로 제 삶을 긍정한다. 설령 재스민의 삶의 기둥을 받치고 있던 게 니체가 '생리학적 자기모순'이라 일컬었던 근대의 산물인 이 세계의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은 아니라 할 지라도, -신, 형이상학적 세계 등-  한 순간에 '재산'과 '가정'을 잃고, 허무할 만큼 황폐하게 변한 제 삶을 응시하는 재스민의 노력은 종래의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뒤에 자유정신을 이용해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해야 하는 지 등을 알게 되는 과정과 몹시 유사하다. 파산한 뒤에도 그녀가 루이비통 가방을 놓지 않는 것은 마냥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존에 믿고 있던 모든 가치가 무너진 제 삶의 한 가운데 서서,제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서 그녀가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부질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놓겠다, 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재스민'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현실을 부정할 때가 있다. 내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삶은 눈 앞에 있다. 형이상학적 세계를 포기한다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을 대하는 나의 의지뿐이다. 과연 무너진 내 삶조차 나는 긍정할 수 있을까. 종래의 초월적 가치가 무너진 세상, 나를 제외하고 의존할 데가 없다는 운명을 나는 인정할 수 있을까. 영화, [블루 재스민]은 나의 현실을 회피하고, 인정하고, 또 다시 부정하게 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과연 재스민은 제가 선택한 이름에 걸맞는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설령 실패할 지언정 자신의 운명을 안아줄 수 있을까. 한낮의 벤치에 앉아서 울먹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희망적인 푸른 빛을 발견했던 것은 나뿐이었을 지. 운명 앞에 선 모든 "재스민"이 그녀만의 답을 찾길, 황폐한 묘지같은 삶의 봉분 위로 기어이 팔을 뻗고 마는 초인이 되길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1. 당신은 누구인가, 아노말리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