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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Jan 27. 2017

3. 나를 정복하라, 더블

자아편


 

 영화의 첫 장면, 빛과 그림자는 주인공, 사이먼의 얼굴 위로 선명하게 교차한다. 거의 텅 빈 지하철에 앉아있는 사이먼 앞에 누군가 다가온다. COLLAPSE(붕괴)가 적힌 신문을 들고 서 있는 그는 사이먼에게 말한다. 


"You are in my place. (당신은 내 자리에 있어.)"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사이먼은 알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자리가 있는 데, 왜 하필 그는 내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가. 그러나 사이먼은 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그런데 그가 지하철에서 내릴 때가 되자,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가 내릴 틈도 주지 않고, 갑작스레 밀려닥친 사람들 때문에 사이먼은 지하철에서 내릴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설상가상 지하철 문에 서류 가방이 끼인 탓에 가방마저 잃게 된다. 다사다난한 출근 시간을 보낸 그는 직장에 도착하지만 이번에는 출입증이 없다. 아무리 경비에게 자기 이름을 밝히고, 소속을 말해도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제대로 할 말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는 사이먼은 어찌 보면 답답한 인물이다. 그러나 제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상사의 꾸중과 비좁은 파티션 속에서 7년을 버틴 사이먼은 누구보다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항할 수 없다면, 순응해야 한다. 사람들을 밀치고 지나갈 만큼 화가 나지 않는다면, 밀릴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다.  


 그런 사이먼에게 기댈 곳은 있다. 바로, 회사의 고위직인 '콜로넬'이다. 사이먼은 콜로넬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면서 옷을 벗는다. 옷을 벗는 행위는 마치 번데기에서 벗어나는 나비처럼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 혹은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상징한다. 그만큼 사이먼에게 콜로넬은 나아가야 할 이상향에 가까운 존재다. 결국, 모든 직원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파티의 명단에도 사이먼은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막 파티에서 쫓겨나게 된 그는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있는 콜로넬을 보자마자 외친다. 마치 어딘 가에 변명을 하는 것처럼. 부모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This is not me, sir. This is not me!"


     
  지금부터 영화 [더블: 달콤한 악몽]을 통해 프로이트의 정신 장치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Sigmund Freud 1856년 5월 6일 ~1939년 9월 23일)




Thou shalt.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프로이트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 중에 한 명이다. 꿈의 이론에 대한 그의 사상 대부분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니체가 적시한 꿈에 대한 단상을 구체화하고, 나름의 연구실적을 통해서 입증한 데 불과하다. 특히 지금부터 설명할 그의 자아모델은 니체의 철학과 그 철학을 바탕으로 쌓은 꿈의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모두, '형이상학의 완전한 종말'을 전제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니체는 형이상학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해체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하기 위해선 이전에 형이상학의 토대 위에 선 철학을 해체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니체는 이러한 시도를 하는 데 실패했고, 프로이트가 그에 대한 과업을 스스로 물려받았다. 


 당장 해체해야 할 형이상학 전제 철학 이론 중에서 니체의 심기를 거스렸던 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었다. 


 좀더 묵은 도덕, 즉 칸트의 도덕은 개인에게, 모든 인간에게 바랄 만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 (...) 인류의 욕망에 대해 장차 통찰력이 생겨나게 된다면 아마도 모든 인간이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으리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p43, 니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의 이성에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이라면 선한 일을 좇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하는 이상,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인식을 넘어선 논리로서 가능하다. 만일 이를 좇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몸의 영역을 관장하는 감성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반기를 들었던 여느 철학자처럼, 니체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존재를 비판했다. 어떻게 전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도덕법칙이 존재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일견 칸트의 주장은 옳게 들리기도 한다. 아무튼, 인간은 선한 것을 좋아한다. 왠만한 상황에서 선을 실천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인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을 니체는 거부했다. 과연, 형이상학의 원조를 받지 않고 어떻게 인간은 선과 악의 작용원리를 정립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아에 세 가지 부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드, 에고, 수퍼에고(초자아)다. 쉽게 말해, 이드는 인간이 '유일하게'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원초적 본능이다. 음식, 성(sex), 안락함 등 신체가 요구하는 욕구와 정신적 욕망, 특히 공격적, 성적 충동(Libido)를 이드는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원칙적으로 쾌를 추구한다는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에 의해서 발동되는 이드는 어떠한 종류의 가치 판단이나 선악의 구분, 윤리관도 갖고 있지 않다. 마치 어떤 종류의 사회적 제약을 학습하지 않은 아기가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정신에 이러한 부분만 내재되어 있다면, 우리 주변에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이드를 제어하는 게 에고라고 설명한다.


 에고는 현실적인 측면의 자아를 담당하다. 바로, 영화 속 사이먼이 담당하는 부분이다. 에고는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에 의해서 발동되며, 현실적인 것을 식별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과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에고는 이드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유명한 예를 들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이드의 욕구를 제 돈을 주고 사먹게끔 이끄는 식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인 측면에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것은 나에게 장기적으로 득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음식을 빼앗긴 사람에게 두들겨 맞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이드가 날뛴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에고의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초자아가 있다. 영화 속 사이먼이 자신의 이상향으로 두고, 제 행동을 변명하는 대상이 되는 콜로넬이 사이먼의 ‘초자아’에 해당한다. 초자아는 대부분 부모에게 학습받은 관습, 문화, 사회적 규칙 등을 내재화한 것을 반영한다. 초자아는 늘 완벽함을 추구한다. 완전히 의식을 벗어난 형태는 아닌 방법으로 인간의 성격을 정립하는 데, 개인의 자아 이상향, 정신적 목표 등을 세우는 기반이 된다. 흔히 어린 아이를 학습하는 부모의 성격을 지녔다고 분석할 수 있는 초자아는 이드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드가 고삐 풀린 말처럼 제 충동을 발산시키고자 욕구한다면, 초자아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상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Thus the ego, driven by the id, confined by the super-ego, repulsed by reality, struggles ... [in] bringing about harmony among the forces and influences working in and upon it,"

그러므로 에고는 이드에 의해서 유발되고, 초자아에 의해서 제한되며, 현실에 의해서 공격받는 데, 그것의 안팎으로 작동되는 힘과 영향의 사이에서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이먼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콜로넬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먼을 외면한다. 초자아에게 인정받지 못한 에고는 본능적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그 날 밤, ‘제임스 사이먼’이 탄생한다. 사이먼 제임스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똑같은 행색을 한 그는 사이먼이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을 법한 행동을 거침없이 해낸다. 에고와 갈등해야 하는 또 다른 축, 이드가 초자아에 좌절된 에고의 부름에 응답하여 탄생한 것이다.


 제임스 사이먼이 사이먼 제임스의 이드에 해당한다는 복선은 영화 전반에 놓여있다. 예를 들면, 사이먼이 TV를 틀 때마다 마초적인 남성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강력한 남성성을 갖춘 마초처럼 제가 원하는 바를 망설이지 않고 추구하고 싶은 욕망은 사이먼의 내면에 내재했다. 또한 사이먼 제임스의 주변 사람은 그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You are not right. It's not enough. You should kill yourself.



 정신을 구성하는 한 축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에고의 앞에 이드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제임스가 등장한 원인은 초자아에 인정받고 싶은 사이먼의 욕구가 좌절됐기 때문이었다. 즉, 이드를 탄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인물은 ‘콜로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에고는 이드를 정복해야 마땅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말의 고삐를 쥔 게 에고여야 한다. 그러나 점차 대담해지는 제임스의 행동에 사이먼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이제 사이먼은 선택해야 한다. 이드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드를 정복할 것인가. 그리고 '실존의 위협'을 받는 에고로 하여금 이드를 정복하고 싶게 만드는 계기를 주는 것은 '한나'다. 





 한나는 사이먼의 직장에서 '복사' 업무를 맡은 직원으로,
나를 나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또 다른 인물이다. 어딘가 완전하지 않은 ‘나’ 앞에서 그녀는 혼란을 겪는다. 복사 업무를 맡은 한나는 유독 거울의 이미지와 자주 등장한다. 사이먼이 수집하는 그녀의 사진에도 거울을 바라보는 두 명의 한나가 있다. 그런데 오직 그들은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누구인 지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한나의 모습을 사진은 닮았다. 아마도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을 조각내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더, 한나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프로이트는 여성혐오자였다. On Sexuality라는 저서를 통해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자주 적대감과 애정이란 감정에 의해서 판단력이 흐려진다, 고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는 주장했는 데, [더블: 달콤한 악몽] 속의 한나가 감정변화에 시달리고, 제임스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사이먼에게 정신없이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매우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마도 한나의 시도때도 없는 감정 변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남성이 주장한 여성의 캐릭터를 그녀가 연기했기 때문은 아닐 지 추측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인간에게 사이먼은 이끌린다. 그러나 사이먼은 저 편의 아파트에 사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저 편’에서 보란 듯이 제임스가 등장한다. 심지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나는 제임스를 사랑하게 된다. 세숫대야에 흘러가는 물처럼 그는 자신의 존재가 어딘 가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내 경력, 내 집, 내 시간, 모든 것을 빼앗겨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마저 빼앗길 순 없다. 이제 사이먼은 선택해야 한다. 제임스인가, 나인가. 이드인가, 에고인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로이트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이론은 이전의 철학자의 가설에 나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명명을 한 데 불과하다. 예를 들어, 에고는 칸트의 오성, 혹은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지배를 받는 이성 개념이고, 이드는 감성 혹은 원초적 본능 등으로 바꿔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쾌락원칙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부터 그 본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이론의 근원이 어디인 지, 어디까지 그의 연구가 입증이 됐는 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성과 충동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은 누구나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영화 [더블: 달콤한 악몽]은 영화적 상상력 속에서 실존을 갖춘 이드를 살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에고의 정복과정을 그린다. 영화를 프로이트 이론에 국한시키지 않고, 보다 확장하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적이 형성한 -제 내면에 존재하든, 외부에 존재하든- 실존의 위기 앞에 대처하는 인간의 여정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변함이 없다. 실존의 위협을 받는 인간은 선택을 해야한다. 더 이상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정상이 아니야. 너는 네 자신을 죽여야만 해. 설령 생명을 걸고 적과 악전고투를 벌이는 것은 아닐 지언정, 그러한 충동에 굴복할 것인가, 마는 가에 대한 선택을 말이다. 


 제임스를 살해한 뒤, 제임스에게 받은 상처와 유사한 상처를 안게 된 사이먼은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그곳에서 제 옆에 앉아있는 콜로넬을 그는 만난다. 마침내 이드를 정복한 사이먼을 초자아는 인정한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한나는 사이먼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가 아니라 사이먼이 주인공의 자리를 부여받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완전한 인간으로 생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부여받은 실존적 과제다. 보다 완전한 형태의 나를 찾는 모든 이의 여정에 승자가 독식하는 보상이 있길, '나를 인정받는 기쁨'이 있기를 바라본다.






참고사이트: http://linkis.com/en.wikipedia.org/wik/0vwx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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