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편
유명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유지호. 감독으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는 착하기까지 한 '사기캐'다. 밤샘 작업도 자처하고, 스텝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걸 마다않는 그는 느즈막히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오늘따라 집 안의 공기가 이상하다. 여보, 여보! 아무리 외쳐봐도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 불쾌한 기분. 어디선 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있어야 할 것들은 없는 데, 없어야 할 것들은 있는 것만 같은 감각. 유 감독은 천천히 집안을 배회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인기척을 느낀 그 순간, 온 집안은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어둠에 휩싸이고, 유 감독은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 감독은 의식을 되찾는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 드러난다. 흡사 연주를 하는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있게끔 그의 아내가 줄로 묶여있는 게 아닌 가. 심지어 아내에게 다가갈 수 없게 그의 허리에는 벽과 이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끈마저 묶여있다. 그제야 유 감독은 자신이 집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집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영화의 세트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 지 묻는 그 순간, 유 감독의 눈 앞에 낯설고, 못생긴 남자가 이죽거리면서 등장한다.
만약에 말이유. 사모님 풀어드리는 조건으루다가,
이 자리에서 사람 하나 죽이라면 죽일 수 있겠슈?
지금부터 다소 난해한 이 영화의 껍질을 벗겨보자. 속박. 대비Contrast. 악마. 세 개의 키워드로 말이다.
1. 속박
"착해서 죄송합니다."
먼저, 낯선 남자가 누구인 지 살펴보자. 유지호 감독에게 살인과 구원의 딜레마를 안긴 그는 감독의 영화 5편에 출연한 엑스트라다. 범행동기는 가능하다. 가난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지 않았고, 성격도 좋지 못한 엑스트라는 돈 많고, 잘생겼고, 착하기까지 한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조건이 괜찮은 사람이라니. 공평하지 않다. 유 감독의 허리에 붉은 띠를 메고 그는 과제를 안긴다. 안면부지의 여자 아이를 죽일 것인 지, 감독의 아내의 손가락을 살릴 것인 지 말이다.
그런데 엑스트라가 '특히' 불쾌를 느낀 부분이 재미있다. 유 감독이 부자라는 것도, 잘생겼다는 것도 아니다. 하필 그가 착하다는 부분이다. 왜 엑스트라는 감독의 다른 특징을 놔두고, 착하다는 부분에서 분노를 하는 것일까?
엑스트라가 지적한 감독의 장점은 세개다. 부자, 잘생김, 착함. 그런데 마지막 장점은 나머지 두 개와 성질이 다르다. [돈이 많음]과 [잘생김]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힌다. 돈이 많고, 잘생기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착함]은 다르다. [착함]의 성질을 파헤쳐보자. [원래 착함]과 [착해야 함] 두 가지의 의미가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원래', 이유없이 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에 착하기만 한 사람이 있던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기 마련인 지라, 거의 모든 인간은 후자에 속한다. 즉, [착함]은 [착해야 함] 에 다르지 않다. [착함]은 본성도, 나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특질도 아닌, "의무"에 다르지 않다.
"네가 양보하자. 착하지?", "네가 착하니까 참아." 흔히 착하다는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은, 착하니까 양보해야 하고, 참아야 한다. 오히려 [착함]은 [돈이 많음]과 [잘생김]이란 특징과 달리, 나의 선택 범위를 좁히는 역할을 할뿐, 그 반대는 아니다. 바로 여기서 관객은 딜레마의 시발점을 짐작할 수 있다.
"착하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 데... ... 정말 그런가?"
유 감독의 허리에 묶인 붉은색 끈은 "속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소품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붉은 끈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끔 그를 붙잡고 있다. 표면적으로, 허리끈은 그가 갈 수 있는 거리를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오직 엑스트라가 데려온 소년의 목을 조를 수 있을 만큼 그는 이동할 수 있다. 자칫 아내의 손가락이 절단될 수 있는 상황, 당연히 감독은 저를 붙들고 있는 끈을 푸는 것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 끈은 세트장 너머 외부의 스튜디오의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어 있다. 도무지 어디부터 시작됐는 지 알 수 없다. 애당초 왜 그는 착해야 했는 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유 감독의 허리끈이 "속박"을 상징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과연 어떤 종류의 속박이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게 이끌었던 가. 낯선 남자가 불만을 품었던 감독의 특징은 바로 [착함]이었다. 앞서 논증했듯, [착함]은 [착해야 함]과 다르지 않았다. 즉, 감독의 [착함]은 다른 특징과 달리 그가 가진 의무였고, 의무는 필연적으로 속박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 감독이 마주친 상황은 착함을 포기하라는 종류의 모호한 요구는 아니다. 보다 그것은 구체적이다. 유 감독의 [착함]에서 비롯된, 혹은 결과한 바로 그 속박을 상징하는 소품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감독의 결혼반지다.
한 집안의 가장이신 분이 그럼 안되쥬.
본격적인 상황이 시작되기 전, 엑스트라는 말한다. 미상불 본 영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는 [가장]이다. 가장이니까, 가장이라서, 가장이므로. 가장이라 안 되는 것도 많고, 해야 되는 것도 많다고 영화는 은근하게 강조한다. 혹시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유 감독의 결혼반지는 잊을 만 하면 클로즈업을 받는다. 결혼반지는 위기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 감독의 내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소품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 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유 감독에게 왜 결혼은 속박이 되는 것일까?
내가 지난 십년동안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어.
십년동안 정말 꾹꾹 참았던 이야기야. 궁금하냐?
나가 죽어라, 썅년아.
유 감독은 [착한 가장]을 연기하는 게 너무 싫다.
방금 전까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유 감독은 갑작스레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 심지어 그동안 외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망설이지 않고 밝힌다. 유 감독은 착하다. 원래 착한 게 아니라, 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그는 이 의무를 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는 착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의 역할을 내려놓을 수 없다. 가장의 역할을 내려놓기 위해선 착함의 의무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유지호답지 않은 선택이다.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과연 유 감독은 '착함의 의무'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가장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 감독은 엑스트라를 이용해서 선택의 자유를 경험한다. 엑스트라는 그를 납치하고, 그의 행동을 제한하고, 급기야 그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바로 이 엑스트라때문에 전에 없이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처하게 된 감독이 어떻게 그를 이용했다는 것일까?
답은 포스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