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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Jan 28. 2017

5. 그는 내 안에 있다, 쓰리 몬스터 2

자아편

2. 대비 - 내 안의 악마



 

지난 포스팅, [더블]을 통해서 자아는 이드와 에고, 그리고 자아를 통제하는 초자아로 이뤄져있다고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 감독이 조우하는 엑스트라는 감정과 충동, 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인 '이드'에 해당한다. 이드의 주요한 특징은 '성충동'과 '공격성'이다. 즉, 쓰리몬스터 속 엑스트라는 더블의 제임스처럼 유 감독의 욕망이 실존을 얻은 형태로 등장한 인물이다. 에고가 이드를 정복하지 못한 사이, 무의식에서 독처럼 피어오른 이드는 기어이 실존의 형태를 얻고 말았다.

 박찬욱 감독의 [쓰리몬스터]가 여타 유사한 소재를 다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두 가지다. 우선, 프로타고니스트의 심리를 상징하는 장소가 은유를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제시된다. 유 감독이 이드의 존재를 감지했을 때, 집안에 그는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이상한 기분이 들더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감독은 피아노 위에 속박된 아내와 엑스트라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곳은 그의 집이 아니다. 일견 제 집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세트장이다.


 유 감독이 '우리 집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는 세트장으로 엑스트라가 그를 옮긴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극적인 연출을 하기 위해서 조명을 조절하거나, 일련의 장치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세트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감독이다. 영화의 세트장은 필연적으로 감독의 창작물이다. 일련의 상황이 전개되는 장소가 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물이다. 게다가 영화 초반부에 드러나듯, 자신이 창작한 세트장에서 거의 모든 것을 감독은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 한다. 흡사 인간이 정신을 통제하는 것처럼, 아니, 혹은 에스가 초자아와 이드의 긴장상태를 통제하는 것처럼, 세트장은 거의 완벽하게 유 감독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집을 닮은 세트장이었을까? 상징적, 혹은 실제적으로 그곳에 사는 이의 정신 상태, 심리 혹은 의식을 집은 대변한다. 오직 내가 허락하는 자만 나의 집에 들어올 수 있다. 마치 내가 허락한 사람만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격언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솟는 것은 없다. 무의식은 의식의 부재가 아니라, 의식의 심해에 해당하는 곳이다. 단지 지나치게 깊기 때문에 인식을 뻗을 수 없을 뿐이다. 유 감독의 집에 이드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외부에서 침입한 자가 아니라 내부에서 탄생한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세트장-집이 아니라, 집-세트장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집이 가장으로서 그가 속박을 당하는 공간이라면 세트장은 감독으로서 그가 해방을 느끼는 공간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공간과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 합치되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드)가 에고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유 감독은 겪는다. 박찬욱 감독은 두 개의 독립되고, "놀랄 정도로" 꼭 닮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관객에게 제시하면서, 집-세트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유 감독의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대변할 수 있는 장소로 집-세트장이 더 없이 적합한 이유다.


 당연히 집-세트장에 등장하는 소품들은 유 감독의 정신(의식)의 일부로서 드러난다. 그 중에서 쓰리몬스터를 여타의 영화와 구별되게 만드는 소재이자, 가장 흥미로운 게 있다면, 바로 "감독의 의자"다.


 영화 [더블]에서 에고인 사이먼 제임스는 이드인 제임스 사이먼과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다. 초자아에 대한 대응체는 콜로넬이란 비교적 비중없는 배역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쓰리몬스터]에서 유 감독과 엑스트라의 갈등은 초자아와 이드의 갈등에 가깝다. 전혀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나의 원초적 욕구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길 유도하는 이드와 사회에서 학습된 이상향-이미 가치판단이 내려진 이상향-을 좇게 만드는 초자아는 필연적으로 갈등 관계에 놓인다. '더 이상 착하지 말라'고 외치는 엑스트라가 이드에 해당한다면, '아직도 착하고 싶어하는' 유 감독은 초자아에 해당한다. 인격 모델에서 질서있는 부분을 담당하는 초자아는 죄책감이란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비판하게 하는 기능을 갖기도 하는 데, 이는 유 감독이 영화 내내 보여주는 죄책감의 정서를 잘 설명한다.


  결국 초자아와 이등의 지속적일 갈등은 나의 의식의 토대 위에서 이드를 실존하는 형태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그렇게 초자아가 이드와 갈등을 벌일동안, 유 감독의 에고는 어디에 있는 가? 바로 [감독의 의자]가 에고의 역할을 담당한다. 초자아가 인간의 의식을 현실(사회)에 보다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이끄는 반면 이드는 선천적인 충동에 굴복하길 촉구한다. 에고는 초자아와 이드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역할을 맡는다. 가치판단, 조절, 통제 등의 정신적 기능을 담당하는 에고는 상반되는 욕구의 사이에 서서 현실적인 방향의 결정을 유도한다. 그런데 그 에고를 상징하는 감독의 의자는 "비어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감독의 의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비어있다는 점이다. 에고만 존재했더라도 초자아와 이드의 갈등은 끊임없는 긴장을 이루는 한편 극단적으로 치닿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쓰리몬스터의 경우, 집-세트장(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이 아예 배제가 됐다. 즉, [쓰리몬스터]의 기본적인 상황은 에고가 사라진 사이, 초자아와 이드가 갈등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세트장의 독특함은 이 장소가 구현하는 모순적 성질에 있다. 우선, 집-세트장은 현실과 의식-결코 현실에선 내 눈 앞에 드러날 일이 없으므로, 환상성을 더한 공간-을 분유한 다층적 공간이다. 동시에 초자아와 이드라는 상반된 요소가 갈등을 빚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분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박찬욱 감독이 영화에 등장시킨 미쟝센이 너무나 복잡하고, 많기 때문에, 간략하게 소개한다. 



1) 하얗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좌, 우에 배치된 그림.

2) 흑과 백이 교차된 바닥의 타일.

3) 붉은 색과 푸른 색의 대비.

4) 흑마와 백마의 머리를 딴 동상.

5) 악마의 검은 색 의상과 감독의 밝은 푸른 색 의상.

6) Live eviL



 박 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가상의 영화, [Live eviL]의 장면에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Live eviL의 마지막 L은 L을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세워놓은 형태다.) 뱀파이어는 제 식사로 인간의 피를 이용하는 악마다. 아마도 그것은 감독의 삶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상징할 것이다. 아내를 향한 숨겨진 원망을 상기하면 그의 아내일 수 있고, 내일 아침을 먹고 가겠냐는 뱀파이어의 대사를 그대로 읊는 것을 보면 감독 자신일 수도 있다. Live eviL을 촬영할 때, 배경음악 위로 영화 속 인물이 연주하는 피아노 곡이 오버랩되는 것처럼, 영화의 후반부의 현실 위로 그가 창작한 환상이 오버랩된다. 마치 Live를 반사하면 eviL이 되고, 빛의 이면에 어둠이 있고, 감독의 이면에 악마가 있는 것처럼 처음과 끝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처럼 연결된다. 물론, 상반된 것은 이미지만이 아니다.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소화하는 소품도 있다. 예를 들어, 허리끈은 유 감독의 행동을 제한하되,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그 끈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결국 감독은 아내를 죽일 수 있었다. 나를 속박하던 것이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박 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설정과 소품은 양면적 의미를 갖는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마가 내 귀에 가장 달콤한 제안을 속삭이고, 삶Live의 이면에는 악마eviL이 있다. 자아의 이면에 에스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련의 상황은 [나는 착하니까, 결혼생활에 충실하는 가장이 돼야 한다.] 라는 이중적 속박의 구조를 탈피하고 싶은 유 감독의 내적인 비명에 이드가 응답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유 감독은 착하다. 아니, 착해야 한다. 인간의 의식에 초자아가 존재하는 한, 모든 인간은 착해야 한다. 그리고 "착한 가장"은 이미 유 감독의 아이덴티티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유 감독은 바로 그 아이덴티티를 내려놓고 싶었다. 지나치게 초자아에 순응했던 그는 이드의 요구에 응답하고 싶었다. -과연 이드가 응답한 것인 지, 이드에 응답하고 싶었는 지는 관점의 차이에 따를 것이다.- 더 이상 착하지 않고 싶다는 모호한 욕구는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으로 제시되고, 아내, 가장, 가정 등은 그러한 극의 요소로서 등장한다. 초자아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인 집(가정)에서 초자아의 요구에 가장 순응하는 家長의 역할을 유 감독은 벗고 싶었다. 유 감독이 촬영 중에 커트를 외칠 때, [CUT]이 적힌 손가락을 자른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나 살인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착함]의 의무를 내려놓지 않으면,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엑스트라가 협박하는 것은 이상으로 설명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연 허리에 붉은 띠를 멘 감독의 초상이 꼭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처럼 보였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그러나 유 감독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이드가 제시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가다. 눈 앞에 이드는 드러났다. 초자아는 이드는 정면으로 갈등한다. 이제, 어떤 결정을 그는 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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