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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Feb 06. 2017

6. 그는 내 안에 있다, 쓰리 몬스터 3

자아편



3. 악마, 그리고 딜레마




 앞서 언급하지 않은 미쟝센부터 소개하고 싶다. 바로 사과의 이미지다. 이 사과는 벽난로 위의 정 가운데 그림에 등장하고, 유 감독의 허리를 조르는 끈을 통과하는 구멍 위에도 존재한다. 아마도 악마가 그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끔 유혹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지, 말지 유감독이 고민한다는 점에서 사과는 악마가 내건 선악과를 상징할 것이다. 그런데 유 감독은 최초의 그 인간보다 복잡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일 지, 내 아내의 손가락을 지킬 지에 대한 선택을 하라고 이드는 요구한다. 아무리 초자아에 해당하는 유 감독이 [착함]의 의무를 이어가겠다고 결심을 해도, 어떻게든 그는 죄를 저질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이드의 협박은 결혼의 의무를 내려놓고 싶은 유 감독의 무의식이 투영된 것이다. -손가락을 잘라서 결혼반지를 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도대체 어린 아이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흥미로운 삼천포로 새보자.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늘 악마가 등장한다. 그런데 악마가 드러나는 방식이 한결같다. 악마는 어린 아이를 학대하면서 악마가 된다. 혹은 악마는 어린 아이를 학대하면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은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납치, 살인을 저질렀고, 미성년자인 금자에게 살인의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가 어린 아이를 납치했다. 아가씨에서 어린 히데코는 성적으로 학대를 받았고, 스토커에서 '아직 깨지지 않은 달걀'로 상징된 어린 아이인 인디아는 그녀의 삼촌에게 이용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박찬욱 감독이 갖고 있는 악마상像은 늘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다양한 영화 속, 수많은 악마가 악마성을 드러내는 데 박찬욱 감독은 늘 어린 아이 혹은 어린 아이에 버금갈만큼 순진한 상태에 놓인 자를 이용한다. 어린 아이는 '아직 죄가 없음', '약함' 을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소재다. 죄가 없는 만큼 책임도 없으며, 약한 만큼 이용을 당하기 쉽다. 자신의 욕망의 수단으로 어린 아이를 이용하는 것만큼 악한 행위도 없다는 것을 아마도 박찬욱 감독은 보여주고 싶어한 게 아닐까.

 다시, 쓰리몬스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초자아와 이드의 갈등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디렉터(에고)가 없는 상황, 유 감독은 선악과를 먹을 지, 말 지에 대한 기로에 놓였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벌어진다. 언젠가 엑스트라가 벌에 쏘였을 때처럼, 아내의 잘린 손가락에서 나온 결혼반지를 밟고 그가 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엑스트라가 결혼반지를 밟고 넘어진 틈을 타서 아내는 그의 목을 물어뜯는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유 감독의 무의식에서 발현된 이드의 욕망을 집-세트장에서 구현한 것이다. 즉, 이 상황을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자 모든 상황의 시발점은 유 감독의 정신세계였다. 그런데 과연 이조차 유 감독의 무의식의 욕망이 드러낸 부분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닐 확률이 높다. 굳이 집과 동일한 세트장이 존재한다고 영화 초반부에서 밝힌 것은, 집-세트장의 성격 중에 그것이 감독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즉,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관객은 유 감독이 정신을 잃고 집과 동일한 세트장에서 깨어난 것에 대해서, 그곳에 희한한 남자가 등장해서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것도 스크린 속 현실에 드러난 상황임을 납득할 수 있다. 한편, 집-세트장은 이드와 초자아, 에고가 존재하는 유 감독의 정신세계다. 집-세트장은 유 감독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비현실적 공간이기도 하다.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분유한 공간, 나의 의식세계의 한 축을 갖춰야 할 이드가 현실의 아내의 공격을 받아서 소멸한다. 그렇다면 이런 돌발상황에 감독은 어떻게 대응하는 가. 천재적인 유 감독은 자신이 직접 거울 속에 들어간다. 그리고 좌, 우를 바꿔버린다. Live가 eviL이 되고, evilL이 Live가 되는 것처럼, 실존을 갖추고 나타난 이드가 사라진 자리를 초자아가 직접 메꾸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과연 얼마나 이드를 억압해야 그것이 실존의 형태를 갖추고 무의식을 구현한 세트장에 등장할까. 일련의 상황이 감독의 무의식에 벌어지든, 현실에 벌어지든, 비현실과 현실성을 분유한 공간에서 벌어지든, 아마도 유 감독의 의식세계에서 이드는 더 없이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의식에 쌓였던 원초적 욕구를 분출시키길 갈망하고 초자아를 대면한 이드가 사라졌다. 유 감독은 대번에 의식세계의 좌우를 바꿔서, 일견 초자아의 형태를 띄지만 이드가 욕구했던 바를 해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즉, 본인은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으로 아내를 지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아내를 죽이는 것으로 어린 아이를 살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게 유 감독은 교묘하게 이드의 명령을 따르면서, 초자아로서의 자신을 지키는 편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자아로 대변되는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한 헤겔, 니체, 프로이트의 이론을 영화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서양철학의 가장 원대하고,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의 정신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칸트부터 헤겔까지 이어지는 독일관념론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동일성을 구축하면서, 신과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 지를 고찰했고, 헤겔은 '즉자대자',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자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끝없이 타인과 나를 오가는 운동을 하면서, 자기 의식을 찾아가면서 피어오르는 무한한 힘인 이성이 이상(형이상학적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편, 즉자대자적으로 선한 것을 의욕하는 심성인 참된 양심은 위반하면 신성모독이 되는 신성한 것이었다. 즉, 헤겔의 윤리학에서 선한 것을 좇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근거는 신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형이상학이란 것에는 실체가 없다고 진단하면서 종교나 신 따위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인간에게 일견 유한하고, 허무한 운명을 포용하는 초인이 되서 -신이 없다고 인간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이 순간의 영원성을 이해하는 영원회귀로 나아가라 주장했고, 형이상학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해체에 대한 작업을 후대에게 넘겼다. e.g) 신이 세계의 운명을 크게 장악하여 여하튼 그 인류를 훌륭히 인도해 간다는 신앙이 없어진 이래, 인간은 스스로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 바로 여기에 후대의 위대한 정신이 해야 할 엄청난 과제가 놓여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이 과제를 받았다. 칸트와 니체의 윤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세계에 이드, 초자아, 에고 라는 세 가지 축이 있다고 분석했고, 이러한 설명에 독일관념론에 등장할 법한 '보편적인 도덕법칙', '물자체', '이상' 등 형이상학적인 존재는 끼어들 데가 없었다. 이드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원초적 욕망이고, 초자아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이상향이며, 에고는 그러한 이드와 초자아를 통제하는 위치에 서서 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택을 이끈다. 프로이트가 그린 인간의 정신세계의 지도에 신과 영혼, 사후세계, 신앙 등 니체가 경멸했던 형이상학의 산물 등은 타파된다.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한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감성의 제약만 받지 않으면 인간을 바로 그러한 바로 이끈다는 설명 대신 보편적인 개념을 제시하면서, 개별자의 다름의 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제를 그는 확보한다. 즉, 모든 인간은 이드, 에고, 초자아의 팽팽한 균형속에서 각자의 욕구에 충실하되,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을만한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굳이 더 나은 사후세계에 가기 위해서 나의 욕구를 억압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사회에서 후천적으로 학습된 이상향에 좇아가고 싶어하는 심리가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각자 믿을 수 있는 철학이 다를 것이다. 나의 의식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 지, 나의 양심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 지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의식에는 도덕의 그늘에 숨어있는 검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검은 몸을 그늘 속에 숨기고 있느라 눈에 띄지 않지만, 어느 새 지나치게 자란 뒤에
 모습을 드러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 인간의 양심의 실체와 근거를 규명하는 것만큼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非양심의 원리는 프로이트에 와서야 정신분석학에서 규명된다. 과연 자기 속에 존재하는 검은 존재의 속삭임을 외면하는 것을 최선이라 믿는 이들에게 유지호 감독은 어떤 메세지를 던질 수 있을까. 그가 아내를 살해하면서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발버둥쳐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이 있는 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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