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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Feb 07. 2017

7. 오직 사랑하고 싶었던,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사랑편

 




 한 인간의 일생을 '혐오스럽다'라고 판단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마츠코는 죄가 많다. 성매매를 하고, 사람을 죽이고, 애인을 속였다. 그렇다면 화려한 범죄 전력을 가진 사람의 일생은 혐오스러울까. 과연 혐오스러운 일생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을 빼앗긴 마츠코는 결핍에 익숙하다. 그러한 결핍의 보상으로서 그녀는 주변의 애정을 갈구한다. 아버지의 웃음을 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상한 얼굴을 흉내내는 그녀는 위기에 몰렸을 때, 그 이상한 얼굴을 습관적으로 하게 될만큼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동거하는 남자에게 폭행을 당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돼도 마다하지 않고, 기둥서방에게 배신을 당하고, 형무소에 들어간 뒤에도 그녀의 삶을 움직인 동력, 그녀가 바랐던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인생이 끝났다, 고 생각했습니다.


 나레이션을 통해서 마츠코는 사랑이 끝날 때마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대로 끝날 것만 같았던 그녀의 인생은 끝나는 법이 없다. 매 순간, 절망의 끝에 서서 마츠코는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 급기야 주변에 사랑할 상대가 남아있지 않게 되자 TV속 아이돌을 그녀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 그가 응답하길 바란다. 결국 모든 연애에 실패한 뒤, 중년의 마츠코는 홀로 남는다. 삶의 동력을 잃은 마츠코를 공터에서 본 이들은, 사랑의 무게에 대해서 알 리 없는 그들은 그녀를 비웃을 뿐이다.






기독교의 신의 상징을 전달하기 위해서 백인 예수의 이미지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Give thanks to the Lord Almighty, for the Lord is good; his love endures forever.
- Jeremiah 33:11


 누구나 사랑을 하고 싶어한다. 본능적으로 고독을 기피하는 인간에게 사랑은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자, 목표이며, 때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종교는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구를 집대성한 현상이다. 각 종교가 중시하는 가치는 달라도, 종교를 가진 이는 제가 믿는 신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린다. 특히 기독교는 사랑에 관해서 독보적인 입지를 보여준다. 미상불 기독교의 신만큼 사랑을 중시하는 신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 사랑, 사랑... ... 


 그런데 이 사랑의 신의 일생을 상상해보자. 어느 날, 그는 세계를 창조했다. 제가 보기에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는 인간을 창조했다.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최초의 인류를 위해서 짝을 지어주었다. 제 사랑을 배신한 인간들을 낙원에서 내쫓은 뒤에도 그는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전 세계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뒤덮은 것을 봤을 때, 신은 그들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면서 인류를 소멸시키겠다 다짐한다. 그러나 끝내 사랑하는 인간에게 배를 만들라 명령하면서 인류가 존속될 수 있는 실마리는 남긴다. 그렇게 인류를 사랑하는 동안 신이 인류에게 요구한 것은 한 가지였다.


 나를 사랑하라.


 기독교의 신은 그것을 아주 간단한 조건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가 나를 사랑하라.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던 마츠코가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던 것처럼 말이다.





 카와지리 마츠코는 기독교의 신을 닮았다. 마츠코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 그녀는 사랑한다. 제 사랑을 이용하고, 폭력을 행사한 남자들을 용서하고, 나아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용서의 의미를 깨달은 마츠코의 일생은 나의 사람이 아닌 자마저 사랑하고,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주장했던 예수의 그것과 닮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마츠코의 사랑을 이용할 뿐이다. 오로지 마츠코의 인생을 어긋난 길로 이끌었던 최초의 남자, 류 요이치를 제외하면 말이다.


 류 요이치는 학창시절의 첫사랑이었던 마츠코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 데도 불구하고 마츠코를 잊지 않고 찾아갈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마츠코의 사랑에 타성을 느끼고, 또 다시 그는 죄를 저지른다. 결국 형무소에서 수감된 그는 그곳에서 신의 사랑과 용서를 배운다. 그러나 막상 형무소를 출소했을 때, 자신을 마중나온 마츠코를 그는 괴물처럼 바라본다. 마츠코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뒷걸음질을 치고, 괴성을 지르면서 그는 마츠코로부터 도망친다. 그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여자는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향해 울부짖는다. 


 なんで? (왜?)


 류 요이치는 마츠코를 만나기 전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 가능한 지 알지 못했다. 형무소에 수감될 때, 성경을 통해서 사랑을 배웠던 그는 마츠코를 만나자마자 그녀야말로 그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과연 실재하는 지, 아닌 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정말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외치는 존재가 눈 앞에 있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츠코를 떠난 뒤, 그는 자신이 마츠코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츠코야말로 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대기적으로 진행되는 시퀀스의 연결은 성경을 연상케 하고, '카미사마(신)'라는 단어는 도처에 등장하는 데, 영화는 화려한 색채와 빠른 전개의 이면에 그녀의 신성함을 은밀히 살리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는 게 엿보인다. 특히 영화의 결말은 그녀가 표상하는 기독교적 신과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해진다. 평생 사랑을 받기 위해서 노력했던 여자는 결국 그녀의 인생을 비웃는 이들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 신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신을 모독했단 죄를 얻고 사람들의 모욕을 받으면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그 남자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사랑"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있을까. 영화, 음악, 소설, 미술 등 각종 매체는 오늘도 새로울 것 없는 "사랑"을 쏟아낸다. 그런데 어쩌면 정작 그렇게 지나치게 반복된 "사랑"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됐을 지도 모른다. 정작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재즈가수가 부르짖는 목소리에서, 드라마의 대사에서, 습관처럼 내뱉는 타인의 '사랑해'에 묻혀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문득 사랑에 대해서 알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받는가, 가 아니라 무엇을 해주는 가에 달렸다는 영화 속의 철학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남을 위한 것인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 되는, 이타적인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원제는 嫌われ松子の一生, 키라와레마츠코노진세이다. 嫌われ키라와레는 "기피하고 싶은", "미움받는"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미움받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일까. "미움을 받는다"와 "사랑받지 못한다"는 똑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그를 미워하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줬는 지, 감당하기 힘든 장애를 만났을 때 신을 원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움받는 마츠코의 일생은 다시 말하자면, 사랑받는 마츠코의 일생과 다르지 않았다. 언젠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그녀가 가르쳤던 음악을 배경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츠코의 일생은 끝났다. 나를 사랑하는 것외에 바라는 게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했던, 무한한 가치를 지녔던 그녀가 남긴 사랑의 의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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