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편
화려하지만 공허하고, 높지만 가려진, 일견 답답해 보이는 '갇힘'의 이미지로 영화는 시작한다. 고풍스러운 장식의 계단을 차분하게 내려오는 스티븐은 경직된 세계에 살고 있다. 아름다운 아내, 정치인으로서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장인,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성공을 거둔 아들, 자기 자신의 장관직까지. 너무나 완벽한 삶을 그는 살고 있다. 스티븐은 제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어느 날, 영국 상위층의 파티를 인내하던 그의 앞에 '안나'가 등장한다. 안나를 보자마자 그는 사랑에 빠진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전신을 뒤덮는 데, 이 여자라면 나를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을 그는 얻는다. '안나'가 자신의 아들, '마틴'의 애인이라는 것은 두 사람에게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삶이 그 통제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 데 불과하다는 것을 스티븐은 깨닫는다. 어떤 관계보다 자유롭지 못한 관계에서 처음 자유를 만나게 된 스티븐은 복잡한 감정의 타래를 절박하게 풀어낸다. 안나는 그에게 완벽한 형태의 자유이며, 나에게로 나아가는 출구이자 또 다른 목적지가 된다.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삶을, 너무나 낯선 동시에 비로소 만난 기분이 드는 나를 마주보게 하는 안나에게 그는 참을 수 없는 증오를 느낀다. 왜 그녀는 내게 와야만 했는가. 왜 하필 지금이어야 했는가.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The capitalistic society and the principle of love are incompatible. - The Art of Loving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은 저서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인간의 상실에 대해서 분석한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자본가에 의해 소비를 당하는 주체로서 소비 충동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사랑에 대해서 완전히 그릇된 통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운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도, 학습할 수 없는 대상도 아닌, 보편적인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면 마스터할 수 있는 종류의 기술에 불과하다. 즉, 사랑에 관한 보편적 기술만 익히면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 단,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저에 놓인 원리 혹은 정신과 양립할 수 없을 뿐.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자리잡은 원인 중에 하나로,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하는 상태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강렬하면, 강렬할 수록 나의 외로움의 깊이를 증명할 뿐, 정작 그 사랑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는다. 나아가 그러한 사랑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다.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강렬함이란 관계가 지속되면서 발생하는 타성에 젖고, 기적과도 같았던 그 순간의 아찔함은 시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이성을 해제시키는 종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수동적으로 전락시킬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부정한 관계에서 벗어나려해도, 매번 안나에게 돌아가는 스티븐처럼 말이다. 독일계 미국인인 이 철학자의 관점에 의하면 스티븐은 능동적으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충동에 끌려다닐 뿐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 편승하여 자신의 정신이 오염되게 내버려두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제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결혼생활에 대한 댓가로 말이다. 미상불 스티븐의 장인이자 잉그리드의 아버지가 스쳐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스티븐은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삶을 살았다. 언제나 통제하고, 수긍하고, 순응하는 게 스티븐의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안나는 스티븐이 욕구한 적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나 과연 스티븐의 사랑을 '非사랑'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어쩌면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사랑을 하는 것과 분리해서 간주해야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심지어 사랑의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도, 시발점이 존재한다. 요컨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사랑을 고찰하는 데 그 시작을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절대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시작되는 사랑이 강렬한 애착을 낳고, 그것이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낳고, 죄책감과 고통을 수반하게 만드는 관계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낳게 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로부터 빠져나와서, 사랑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랑의 기술>에 드러난 에리히 프롬의 생각은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에 물든 인류는 사랑을 하는 상대마저 이성적(계산적)으로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러한 행태에 대한 반성을 그는 촉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삶의 습관이야말로 스티븐으로 하여금 안나에게 이끌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오히려 제 감정을 통제하고,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고찰하는 습관을 가졌던 스티븐은 열정과 감성을 거세당한 기형적인 삶을 살게 됐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었던 스티븐은 안나를 통해서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영역을 배우게 된다. 스티븐은 사랑에 빠진다. 제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는 지, 결핍을 갖고 있는 사람인 지 그는 안나를 사랑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제 인생의 접힌 부분을 펼칠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된 스티븐이 자본주의에 물든 인류를 비판하면서 사랑에 대해 고찰했던 한 철학자보다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나 바튼, 상처입은 성모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increase your pains in childbearing: with pain you will give birth to children.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will rule over you. -Genesis 3:16
지난 화는 사랑을 중시하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등장했다. 이번 화는 안나 바튼이란 인물을 통해서, 에리히 프롬이 "가부장적"이라고 지적했던 기독교로부터 내려온 혐오스러운 여성의 원형을 고찰해본다. 미상불 성경 속 신의 발달 형태의 기저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들게 네가 행동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꾸준히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압박하는 신으로부터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기독교만큼 여성을 혐오하는 종교도 드물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창세기는 인류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악질적인 소설이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 권유하면서 "죄 없는 남성을 꾀어서 삶을 망치는 악녀"라는, 우리 사회에 드물지 않은 이야기 속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제공한다. 창세기 이후, 거의 모든 남성이 창작한 이야기는, 일부 양심을 갖춘 인물을 제외하고, 이러한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은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식의 행태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애당초 기독교 교리에서 남성의 고독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하게 된 여성은 제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지도 못하며, 남성에 의해서 "여성"이란 이름을 부여받고, 남성에게 선악과를 먹인 죄로 출산을 담당하게 되며, 나의 욕구를 거세당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화에 대한 단초를 제시한다. 심지어 창세기의 신은 오직 남성에게 네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고, 많은 아이를 낳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의 고통은 등한시한다. 또한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 아담은 제가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책임을 이브와 신에게 돌리는 등 자신의 죄를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신은 이에 대해 납득하는 데, (The woman you put here with me -she gave me some fruit from the tree, and I ate it.) 신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한 계기가 "아름다운 여성을 제 마음대로 취했던 남성의 폭력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라는 설명은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사실이다.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이와중에 남성은 신의 아들이고, 여성은 인간의 딸이다.)
누군가는 안나를 이러한 창세기적 악녀의 범주의 일부로 간주할 지도 모른다. 남성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왜곡된 여성상이며, 남성의 삶을 망치는 역할만 하는 단층적 인물이라고 말이다. 미상불 스티븐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안나 바튼은 지나치게 신성시한 면모도 없잖아 보인다. 그러나 영화 데미지에 등장한 악녀는 어딘 가 다르다. 남성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녀, 정체를 알 수 없는 (mystic or mythic) 여성뿐만 아니라, 과거의 상처로 대변되는 인격을 그녀는 품고 있다. 안나 바튼은 순진한 남성에게 선악과를 먹인 또 다른 악녀가 아니다. 그녀의 진정한 역할은 상처입은 성모로서 드러난다.
당신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나는 들어준다. 자신을 소유하길 원하는 스티븐에게 관계의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안나는 말한다. 그녀의 말처럼, 다소 당황스러운 스티븐의 행동에도 안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최대한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어떤 상황에도 감정을 억제하는 그녀는 화를 내야 마땅한 상황들을 만날 때, '괜찮다'며 오히려 상대를 다독인다. 잉그리드, 자신의 엄마, 스티븐 등 누구에게나 그렇다. 한편, 일견 그가 잘못된 방향의 선택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설득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지키는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자유 앞에 모든 이성을 내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리는 스티븐을 그녀는 거절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놓인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서라도, 일반적인 남녀관계로 보기엔 그들의 관계는 분명 종교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종소리를 배경으로 파리의 교회에서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누는 것은 흡사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한 인간을 구원하는 성모처럼 말이다.
마치 내 인생의 경계를 구분짓는 벽이 깨지는 듯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눈 앞의 상대를 스티븐은 예측하려고 한다. 그러나 상대는 말없이 웃을 뿐이다. 원망과 증오, 사랑은 한 데 섞여서 그를 지배한다. 지금껏 제게 존재하는 지 알 지 못했던 욕망이 탈출구를 만나자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인 지, 탈출구 때문에 그의 욕구가 발현된 것인 지 알 수 없는 데, 마치 어머니의 젖을 찾아 이끌리듯 격정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욕구를 그는 안나에게 격정적으로 방사한다. 그러나 과연 안나에 대한 스티븐의 사랑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일견 수동적으로 보일만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로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그가 사랑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에 끌려다닐 뿐이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어떻게 성모를 만난 사람이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안나는 평범한 성모만은 아니다. 안나는 상처를 갖고 있다. 자신을 사랑했던 오빠가 자살한 것을 목격한 안나는 제가 갖고 있는 운명의 무게에 대해서 절감한다. 스티븐의 죄는 결코 아들의 여자를 탐한 것만이 아니다. 상처입은 성모를 그는 독점하려고 했다. 그녀와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처를 입은 성모는 가깝게 안으면 안을수록, 날에 베이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하나같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그녀는 다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을 상처주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로 사라지는 안나의 두 눈은 감정을 모르는 기계처럼 무겁기만 하다. 결국 다시 한 번 그녀는 제 욕구를 안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을 친다.
안나와의 관계가 언론에 폭로된 뒤, 모든 것을 스티븐은 잃는다. 그러나 영화 데미지는 곳곳에 그 모든 것은 애초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리는 암시를 숨긴다. 평범한 의사였던 그가 정치계에 입문한 것도 잉그리드의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다. 안나를 만난 뒤, 제가 욕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알게 된 스티븐에게 장관이 권유하는 보건부의 장관직이 달가울 리가 없다. 만약 그가 제가 선택하는 인생을 살았더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스티븐은 제 인생을 살아간다. 안나를 만나서 스티븐이 알게 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 완벽한 상태에 놓이기 위해서 열정을 억압한 채, 그것이 있는 지도 알지 못한 채 기계처럼 살아야 하는 운명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TV 출현 당시 그가 말한 '이미지 안에 갇힌 영국'이란 제 삶에 대한 비유에서 그는 빠져나올 필요가 있었다. 나의 삶을 망가뜨리는 악녀의 유혹에 빠진 게 아니라, 도리어 상처입은 성모를 만났기에 구원을 받은 셈이다.
영화 말미에서 스티븐은 말한다. 피터의 아이를 안고 있는 안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고. 안나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만난 그에게 성모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순간의 그녀는 철저히 타인이었다. 생존을 위해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칠 뿐인 또 다른 인간이었다. 인간은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서, 상처를 지우기 위해서 생존을 도모한다. 데미지는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양자를 향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된다. 때로는 그 상처가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서 나를 구원할 수도 있다. 만일 그토록 파괴적인 구원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명심해야 한다.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