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편
푸른색으로 가득찬 방, 한참 소녀는 자위를 한다. 절정의 끝, 내것이 아닌 사랑을 그리면서 그녀는 흐느낀다. 목적지도, 출발점도 분명한 자신의 욕구를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까.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긍정하고, 시도하면서 고등학생인 아델은 점점 더 길을 잃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첫눈에 반했던 그 사람을 닮은 푸른색의 운명의 단서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불현듯 제 삶에 나타나서 모든 것을 바꿔놓는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엠마를 만나기 전까지, 유치원 교사가 되길 희망하는 아델의 주변에 푸른 색의 이미지는 은은하게 떠다닌다. 자아가 성립되는 시기의 사춘기 소녀는 사랑을 꿈꾼다. 한 번도 내것인 적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서 향수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대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상대는 그녀를 좋아한다. 그동안 운명적인 연인과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을 은근하게 믿는 그녀의 주변을 파란색은 말없이 좇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올 사랑을 예고한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결코 예상했던 형태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랗다. 그것은 그토록 파란색이라서, 파란색에 둘러쌓여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몰랐던 나를 파랗게, 파랗게 물들인다. 운명처럼 다가온 파란색의 머리를 가진 엠마를 만나면서 아델은 지금껏 자신도 몰랐던 나에 대해 알아간다. 파란색 옷을 입고, 파란색 거리를 걷고, 파란색 방안에서 잠을 자면서 파란색은 그녀의 전부가 된다. 따뜻한 햇살 아래, 녹아버릴 것처럼 행복한 시간이 그녀를 감싼다. 동시에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엠마를 사랑하는 나로서,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나로 살겠다는 선택을 말이다.
실존주의자가 상상하는 사람이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구성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모든 것은 존재와 본질로 구성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본질이란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보편적 성질을 의미한다. 본래 인간은 착하다, 본래 어떤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철학은 인간의 존재 앞에 본질을 우선한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는 실존주의에서 통하지 않는다. 인간 이전에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자는 바로 그 존재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오직 선택의 문제이며, 과정이다. 내가 누구인 지 정의하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는 나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는 인류의 축복인 동시에 인간의 괴로움이다. 실존주의는 보편자普遍自에 의존하는 기존의 사상에서 인류를 해방시킨다. 모든 상황에 천편일률적으로 통하는 도덕법칙은 실존주의에서 타파된다. 본래 인간은 무엇을 해야 마땅하다, 는 선험적 테두리로부터 인간을 벗겨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는 고독에 시달린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의 가치판단을 뒷받침하거나, 선택을 제한할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보편적인 모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실존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본질이 존재를 앞서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본질주의의 관점에서 나는 존재가 구성되기 이전에 본질이 정해져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때 본질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분유하는 나는 나의 존재가 구성되기 이전부터 인간에 대해 명시된 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 주자로 칸트를 꼽는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물자체에서 발생한 것, 즉 현상의 기원을 인식하는 선험적인 경계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보면서, 인간의 존재보다 우선시 되는 본질에 대해서 논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당신은 인간으로 취급받기 위해서 보편적 인간성을 가져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개별적 존재의 독립적, 자율적, 주체적 의지와 특질을 무시하고, 인간 이상의 확인할 수 없는 보편자를 근거로, 한 인간을 전체주의적 테두리 안에 욱여넣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대표적인 본질주의자는 맹자다. 모든 인간은 측은지심을 느낀다는 것을 통해 인류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성을 맹자는 논증했다.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면 누구나 안타깝게 여기고, 즉시 구하려고 할 것이다. 댓가를 바라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디 선하다. 이것이 맹자의 측은지심에 담긴 논리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그것뿐인가? 어떤 인간은 어린 아이를 물에 빠뜨릴 수도 있고, 어린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무시할 수도 있다. 그가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구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
본질주의, 즉 인간의 존재를 초월하는 본질을 인정하는 것은, 사르트르에 의하면 상품 뒷면에 사용방법이 적힌 스테이플러처럼 인간을 전락시킨다. '이 상품을 정해진 용도 이외에 사용하지 마시오.' 라고 뒷면에 적힌 스테이플러는 반드시 스테이플러로서 이용되기 위해서 스테이플러를 만드는 공장장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서열을 중시하는 개는 상위 개체의 명령에 복종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개는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책임을 모른다. 오직 그가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부여받은 본능대로 살고 있는 것뿐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사물과 동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다르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신이 정해준 바가 그러니 말이다." 라는 본질주의에 실존주의는 정면으로 논박한다.
인간의 본래적 성질, 즉 초월적인 의지의 권위를 실존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 동성애자로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그가 동성애자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동성애자로 살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에 대해서 누군가 '절대자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혹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므로' 라고 비판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틀렸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결국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그 자신뿐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 그의 선택에 영향을 줬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조차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자아는 오직 개인의 선택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주의적 입장을 ‘모든 것은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정의된다’는 말과 혼동하거나, 실존주의가 인간의 가치 판단의 근거를 추출할 수 있는 모든 정당성의 기제를 해체한다고 보면 곤란한다. 우선, 선천적인 요인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있을 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의해서 자아는 성립된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동성애자로 태어났지만, 이성애자로 살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에 영향을 미친 표적에 정해진 의미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겠다고 선택하면서 나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모든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대적 가치와 인간 이상의 절대자가 규정한 진리는 그것을 믿는 인간에게나 통용되는, 개인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서 모순적인 가치가 된다.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나의 책임이며, 나의 책임의식은 타인으로 확장된다는 것이 실존주의에선 유일한 모럴이다. 만일 인간이 선이 아닌 악을 택하는 것은 그가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의 책임의식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엄격한 개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실존주의는 ‘책임의 철학’이다. 나의 삶에서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선, 먼저 나는 나의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오로지 나의 선택이며, 이 선택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나의 책임이며, 그래서 나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 속에서 혼란스럽지 않고, 단지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 나는 나의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그것은 나의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La vie d'Adele], 아델의 삶이란 원제대로 영화는 그녀가 사랑을 하면서 겪어야 할 책임을 어떻게 짊어지는 지 보여준다. 아델은 주변 사람에게 제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델은 용기를 내서 엠마의 연인이 되기로 결정한다. 아델의 연인이 된 그녀는 일련의 책임을 겪는다. 아델은 학교의 친구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본편에서 삭제됐으나 가족과의 갈등도 겪는다. 한편, 아델은 엠마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세계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듯한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 바로 그러한 선택의 결과로서 첫사랑과 고통스럽게 헤어져야 하는 책임을 그녀는 안게 된다. 책임의식은 사랑의 문제도 피해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타자간 가장 밀접한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사랑에는 무엇보다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앞서 실존주의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택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을 제한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신도,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책임의식'이다. 개인의 선택은 전체에 대해 선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선할 수 없다고 사르트르는 주장한다. 나는 나의 선택과 행동의 총합이며, 그 외의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이러한 내가 되고 싶다'는 가치에 대한 강조다. 이러한 내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이러한 내가 가장 옳은 인간상이라고 믿는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가장 옳은 인간상의 범주는 나를 비롯한 전 인류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앙가주망(engagement)'이다. 나는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그 자유에 대한 근거로 필연적으로 타인을 나의 선택에 앙가제(engage)시킨다. 만일 내가 실존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나는 실존주의자가 되는 것이 선한 것이며, 이것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내가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전 인류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고, 개인의 애정관에 사회가 제재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편, 책임의식을 가진 인간은 불안하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것은 그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의 조건이 된다. 나는 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기에 불안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고려를 한 결과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향한 비판 –실존주의는 인간을 무한한 선택지 앞에 세우고, 어떠한 근거도 없는 선택을 제멋대로 하게 만들면서, 종국에 허무로 이끈다는 요지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이런 전제를 차용한다.
사람은 자신의 삶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실존주의는 그 사상의 정당성을 책임의식에 깊게 의존한다. 내가 어떤 인간이 되고자 지향하는 바는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나의 가치 판단을 부여하는 것이고, 곧 그것은 전 인류가 ‘이렇게 되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함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책임의식을 갖고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뛰어들어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며, 자기가 그려내는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문장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만일 ‘사람은 그가 영위하는 것을 이루고 있는 모든 관계의 총화이고, 조직이며, 그 전부다’라는 그의 실존주의적 입장이 옳다면, 거짓말을 하고, 부정을 저지르며, 자기를 기만하고, 폭력을 일삼는 이들은 ‘나는 본래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사람인 데, 어떠한 연유로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다.’ 라는 변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존주의가 허망하고, 무한한 선택지 앞에 인간을 세운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의 가치 판단이 서 있는 발판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 비판에 논박하기 위해서 실존주의자들은 책임의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프랑스의 급진주의적 사고나 독일관념론, 기원전의 동양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개인의 책임의식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주장은 일견 모순을 드러낸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결코 악을 선택할 수 없다’면서 ‘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신과 인류를 위해서 가치를 선택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선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물론, 일정한 형태의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그는 저서에서 그가 인정한 대로 일부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형성되어지는 모럴'이라는 사르트르의 임마누엘 칸트처럼 인간의 의식 내부에서 그 동일한 근원을 찾는 데 실패하고, 인간의 도덕을 개별적 행위의 차원에서 비교적 얕게 접근했다는 반증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상으로 나를 포함한 전 인류를 삼기 때문에 책임 의식을 갖고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결국 ‘모든 인간은~’ 으로 시작하는 모든 명제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가진 보편적 성질에 기댄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과연 개인의 선이 사회가 정한 선에 위배될 수 없으며, 인간은 선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이 신이 주조한 모든 종류의 보편성을 해체시키는 사조로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지. 실존주의의 시대로부터 벗어난 현대인의 판단에 달렸을 것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파란색이 갖고 있는 의미의 외연은 파란색의 스펙트럼만큼 넓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아직도 잊지 못한 추억으로서, 새롭게 시작되는 삶을 예고하면서 ... ... 한편, 파란색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영역이다. 처음 사랑이 시작될 때, 조명과 햇빛을 이용해서 비춘 파란색은 빛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진전되면서, 유년시절의 눈부셨던 파란색은 없다. 그들의 집, 대문, 곳곳에 파란색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엠마는 노랗게 머리를 물들였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하는 엠마와 친구들을 보면서 따분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엠마의 붉은색 손톱을 카메라는 비춘다. 아델과 엠마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더 이상 그들에게 처음같은 파란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델은 엠마와의 생활에서 감정의 간극을 느낀다. 동시에 그녀가 없는 삶에서 예전의 활기를 되찾는다. 파란색은 그들의 주변을 멤돌지만 예전과 같지 않다. 결국 엠마와 아델은 헤어진다. 그리고 아델의 삶을 파란색은 뒤늦게 감싼다.
엠마를 만나기 전까지, 아델에게 파란색은 차가운 색이었을 것이다. 미상불 차갑고, 시원해지고 싶은 욕망을 인간은 파란색에 담는다. 그러나 엠마를 만나고 난 뒤, 파란색을 가장 따뜻한 색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표적을 해석하는 정해진 가이드라인은 없다. 인간의 모럴에 공통성을 부여하기에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모든 색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로, 조합하는 대로 존재할 수 있다. 파란색의 본질, 즉 파란색의 물건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개별적인 파란색, 나만의 가장 따뜻한 파란색을 그녀는 만날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정의된 색의 범주를 넘어서 자신의 내적 세계를 기존에 존재하는 색에 새롭게 담는 것이 감독의 눈에는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실존주의를 닮은 모양이다. 굳이 한 가지 성질로 묶이지 않은 색의 변주를 통해서 감독은 인물의 심리, 복선 등을 이용하는 장치로 다양하게 드러낸다. 붉은색으로 손톱을 칠하면서 자신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엠마의 전시회에 가는 그 순간까지 파란색 원피스를 입으면서 엠마와 가장 행복했을 때를 떠올리는 아델의 마음은 각자의 정의할 수 없는 색에 담겼다. 지금, 당신의 파란색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 손끝을 대면 심장부터 고통이 차오를 만큼 냉기가 도는 파랑이라도 좋다. 당신만의 파란색을 갖고 있다면, 당신이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했다면, 당신의 파란색은 이미 파란색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언젠가 누군가 제 심장을 덮혔던 가장 따뜻한 파란색을 만난 것처럼, 파란색의 본질에 얽매이지 않는 모든 이의 삶, 그 어딘 가에 당신만의 온도를 갖춘 파란색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