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편
좁은 방의 공기가 답답하다. 중년 남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린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건, 오래된 가죽소파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내는 담배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마른 침을 삼킨다. 나에게 온 질문에 내가 했어야 할 대답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목 안을 까끌거리듯 스쳐서 사라질 뿐이다. 벌써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남자를 사람들은 독려하기 시작했다. 별 게 아니라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기죽지 말라고. 한 마디도 나는 하지 않았다. 나를 두고 하는 말에, 끝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당초 사람들은 나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대로 끝나면 안된다. 또 다시 무너질 수 없다. 이렇게 바보처럼 당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일어났다. 그 남자가 보는 곳에서 그의 등을 있는 힘껏 찔렀다. 그제야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바뀌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 그곳에 내가 없었던 것처럼 굴었던 사람들이 불에 댄 어린 아이를 보듯 달려온다. 하나같이 동정 어린 목소리로 내 팔을 붙잡고 속삭인다.
"알지? 우리는 최 선생님 편이야."
최 홍은 상처 입은 여자다. 친구들 앞에서 거짓말로 자신을 꾸미는 애인에게 상처를 받는 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할 만큼, 그녀는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제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이유림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성관계를 맺기 위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불쾌를 넘어서, 당혹스러울 정도다. 반면, 이유림은 상처를 입은 적 없는 남자다. 올해 스물 여섯살인 그는 인근의 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중인 여자친구와 6년 간 연애를 했다. 홀어머니가 떠받들어 키운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에 대한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게 용감하다", 스물 여섯살의 영어교사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말은 없다. 그래서 이유림은 뻔뻔하다. 교생실습을 나온 대학생을 성추행하고, 강간하느라 애인을 배신해도 그는 당당하게 외친다.
내가 너 좋아한 죄밖에 더 있냐?
한 번도 상처입은 적 없는 남자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본 적 없으니까, 주는 것도, 받는 것의 의미도 알지 못하기에 무작정 그는 다가간다. 그 여자가 좋고, 좋고, 또 좋으니까. 그것 밖에 생각할 수 엇으니까. 당연히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여자는 이런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방패의 대결은 그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창과 방패의 대결, 마지막에 패배하는 쪽은 누구일까.
당신이 제 남편인 것처럼 저는 당신의 아내예요.
만일 당신이 시몬 드 보부아르에 대해서 들어봤다면,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맥락으로 그녀를 접했을 것이다. 실존주의, 혹은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 관계. 이번 화는 독특하게 철학자의 사상보다 삶에 대한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당시 소르본 대학과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 교수 시험을 준비하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적" 운명의 상대, 장 폴 사르트르를 만나서 계약결혼을 맺는다. 진심으로 상대를 아끼고, 진솔하게 다가서되,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는 게 그들이 맺은 계약결혼의 핵심이었다. 물론 그들의 결혼관계가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에 의하면, 대개 그들의 관계는 질투와 애증의 대 서사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실한 관계라는 미명 하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 어떻게 섹스를 했는 지에 대해서 시시콜콜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한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관계는 자유와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서 순탄하지 않았을 지언정 결혼이란 가치가 맹세하는 핵심, 헤어지지 않는 것이란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내 인생에 없어선 안될 사람,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부분으로 치켜세우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관계 속에서 보부아르의 사랑을 열정적으로 받은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1947년, 실존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이 됐을 때, 미국에 강연 여행을 간 보부아르는 메리 골드스타인이란 미국인 친구에게 넬슨 앤그렌을 소개를 받는다. 거의 단숨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약 삼년간 연애를 이어나간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정을 갖고 있었으나,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무엇도 그들의 사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도 자유롭게 주고받는다. 언젠가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에게 자신의 연인에 해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수많은 국내 평론가는 시몬 드 보부아르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라고 일컬으면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을 '파격적'이라고 묘사한다. 아마도 시몬 드 보부아르와 넬슨 앨그랜의 사랑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나는 1920년대부터 이어진 그들의 관계를 '충격'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싶지 않다. 당연히 사람들은 타인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타인의 시선에 드러난 '타인의 관계'는 신선하고, 충격적일 지도 모른다. 어느 것보다 두 사람만의 일이어야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만의 일은 아니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실존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인간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버팀목이 되는 사랑에도 인간의 존재처럼 보편적 성질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오로지 수많은 형태의 사랑 중 한 가지에 그것은 불과하다는 점을 말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게 파격적이든, 급진적이든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연애는 두 사람의 일이다.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연애란 "그들의 연애"다.
누군가는 이렇게 비판할 지도 모른다. 관계에 정해진 형식이 없다면 인간은 방탕하게 연애를 즐길 거라고, 신이나 인간성 등 보편적 성질에 기댄 질서가 요구되는 인간의 삶의 형태처럼 이성적 관계도 방종해지지 않기 위해서 일종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통해서 그렇게 인생에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었던 게 사랑에도 필요할 지 모른다. 바로, 자유와 책임의식이다. 비록 정해진 형식이나 보편적인 형태가 부재하더라도, 나와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자로서 사랑에 임하는 사람은 무엇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설령 '계약결혼'이란 단어로 세상 앞에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 것처럼 보일 지언정, 서로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는 동시에 책임을 가져야 마땅한 모든 사랑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수많은 관계 속에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 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야 한다. 그들만의 연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든 타자가 개입할 자격과 권리는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연인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고. 비록 '사랑'이라는 단어에 개별적 관계와 감정들이 뭉뚱그려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연애의 목적]은 손꼽히는 비운의 영화다. 붉은 색 일색인 포스터와 '앙큼하게 버티고, 뻔뻔하게 집적대고' 처럼 영화의 본질을 비켜간 홍보 문구, '저기서 잠깐 키스만 하고 갈까요?' 등의 주옥같은 대사들로 연애의 목적이란 결국 '섹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그렇고 그런 영화 취급을 받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후에 'xx의 목적'의 타이틀을 붙인 성인 영화가 연달아 등장하면서 이 영화가 던지고 싶은 메세지는 짐짓 공중으로 흩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남성적 권력 행사를 마땅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대, 여성이 약자가 되기 쉬웠던 풍토 속에서 어떻게 한 여성이 생존을 도모했고, 사랑을 성취했는 지 말이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닐 때, 연애는 생존의 장이 된다. 방금 전까지 '사랑해'를 외쳤던 두 사람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지, 내가 상처를 입을 지 말이다. 과연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 중에서 강한 건 어느 쪽일까. 답은 쉽다. 언젠가 뚫린 경험이 있는 방패가 제일 강하다. 한 번 상처입은 경험을 가진 방패는 어떻게 하면 더 단단하게 나를 지킬 수 있을 지,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 지 알고 있다. 가장 지독한 생존의 궁지에 몰렸을 때 최 홍은 선택을 한다. 언제나 방패인 줄 알았던 여자는 궁지에 몰렸을 때 창으로 변한다. 모든 사람이 이유림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을 본 '재수없는 여자'는 그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마침내 교장실을 빠져나가는 그녀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든다. 언젠가 데미지의 안나 바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사랑의 위기 앞에서 그녀들은 자신을 지켰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등을 찔러야 하는 것만큼 독한 궁지를 경험해본 자가 있을까.
만일 이 영화에서 최 홍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인간에 대한 공포를 느낀 적 없을 확률이 크다. 과연 이유림이 최 홍을 '따먹었는 지', 최 홍이 이유림을 '꼬셨는 지'. 기대를 가득 안은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학생들과 "최 선생님, 몸은 좀 괜찮아? 우린 최 선생님 편이야." 라고 말하는 교사들의 시선은 언젠가 최 홍으로 하여금 학교를 관두게 만들었던 그 시선들과 정확하게 맞닿아있다. 무엇보다 '진실'에 관심을 갖는 대중은 정작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선택할 뿐이다. 결국 최 홍으로 하여금 이유림을 배신할 수 밖에 없던 것은 바로 그 시선이었다. 어딜 가도 꼬리표가 붙는 교직생활, 끝까지, 어딜 가도 자신의 과거를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애의 목적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추문이 불거지자 최 홍은 인터넷 상에서 온갖 합성을 당한다.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는 대중의 입에서 "미친 스토커"로 낙인을 찍힌다. 반면 이유림은 동료 남교사들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그것은 교생과 교사라는 위계의 차이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 어떻게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생존하는 지 그녀는 알고 있다. 두 번 다시 억울하게 꼬리표를 단 채, 뜬 눈으로 설운 밤을 지새는 그 지옥으로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기만을 바라며 아침부터 만지지도 못하는 생닭을 정성스레 튀겼던 그 날, 붉게 튀긴 진심 위로 수돗물을 틀면서 최 홍은 생존을 선택한다. 우리는 최 선생님의 편이야. 뒤늦게 간드러지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정작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편을 나누지 않는 무관심이었다는 걸.
그렇다면 왜 그녀는 그에게 돌아갔을까. 온 몸을 덮는 외투를 입을 만큼 추운 겨울, 이유림의 치기 어린 욕설을 담담하게 듣는 최 홍은 말한다.
나, 이제 혼자 잘 수 있어. 그래서 고마워.
이유림을 희생양으로 생존하는 것을 택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최 홍은 "너, 학교에 못 다니게 만들 수 있어." 라고 말했던 그 선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을 인정할 용기를 내는 대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쪽을 선택한 가해자를 이해했을 때, 모든 것이 별 게 아니었다는 것을, 결국 인간은 생존의 현장에서 선택을 하게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이 겪었던 상처에 그토록 연연할 필요가 없었단 것을 그녀는 깨닫는다. 그리고 그녀는 유예기간이 끝나기 전, 제가 상처를 입힌,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입은 남자를 찾아간다. 언젠가 자신이 상처 입었던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하게 자신이 상처를 입힌 그 남자에게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안아주고 싶지 않을까.
한재림 감독이 보여주는 연애 이야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원래 연애가 그렇다. 그 관계에 놓이지 않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선 이해하기 힘들다. 행동의 뒤편을 흐르는 내밀한 감정의 전선은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알기 힘든 법이다. 바로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항상 두 사람의 연애에 관심을 갖는 타인이 그의 영화에는 등장한다. 한재림 감독의 연애 이야기는 현실에 없을 법한 극적인 상황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사실적인 것은 그가 두 사람의 관계를 미묘하게 파고들어가는 시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연애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연애란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모텔을 나왔을 때, 첫 눈은 내렸다. 최 홍이 이유림에게 준 유예기간은 끝났다. 새싹 돋는 봄까지 최 홍은 또 다른 유예기간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여느 때처럼 결정은 두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상상은 관객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