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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r 05. 2017

11. 인간을 이기는 이상은 없다, 타인의 삶

정치편



 차갑고, 딱딱하게 빛나는 은색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는 집으로 올라간다. 여느 때와 같은 귀갓길, 오늘따라 엘리베이터는 좁아보인다. 온 몸을 뒤흔드는 것만 같은 업무를 마쳤기 때문일까. 현관에 들어선 그는 어느 때보다 혼자가 된 기분을 느끼면서 거울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곳에 전에 없이 낯선 눈을 가진 인간이 서 있을 뿐이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누군가 그의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그 때다. 남자는 문을 열어준다. 미리 예약한 창녀는 익숙하게 그의 집에 들어온다. 


- 어떻게 현관을 들어왔지?

- 이 건물은 많이 와 봤거든요. 


 심드렁하게 창녀는 말한다. 짐승같은 찰나의 섹스가 끝난 뒤, 제발 삼십분만 더 있어달라고 그는 창녀에게 애원한다. 이대로 홀로 버티기엔 너무나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창녀는 매몰차게 그를 떠난다. 다른 손님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홀로 남겨진 남자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찰나의 불쾌한 쾌락 끝에 이어지는 허무는 무언가를 닮지 않았는 가. 당에 충성하면서 얻는 감각의 본질에 진정한 차이는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당에 충성하는가.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는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비밀 경찰, '슈타지'다. 당시 동독의 국민은 약 4명 중의 1명 꼴로 슈타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만큼 세뇌된 학습을 당한 결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 그에게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다. 사회주의의 적인가, 아닌가. 사회주의라는 사상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당의 칼과 방패가 되는 것' 이외의 진리를 그는 알지 못한다. 비즐러는 신념을 목적으로 아는 자를 상징한다.


 게오르그 드라이만은 동독의 희곡 작가다. 유난히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그는 대중의 극찬을 받는 인사다. 다소 진보적인 성향을 띈 그의 동지들과 달리, 동독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그는 꺼린다. 한편, 본 이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 본인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 폐쇄적인 사회의 부작용을 그는 차근차근 목격한다. 드라이만은 국가라는 이름의 개인적 권력에 희생된 개인을 상징한다.


 그에게 도청과 감시 등의 작전을 할 것을 헴프 장관은 지시한다. 한편, 게오르그 드라이만의 애인, 트리스타와 헴프 장관이 모종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즐러의 보고서를 읽은 정치적 동지, 그루비츠는 서슴없이 그것을 삭제한다. 그에 대해 비즐러는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우리는 당의 창과 방패야. 그루비츠는 대답한다. 당도 힘이 있는 당원이 있어야지! 고위직의 정치인의 눈치를 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일하는 그루비츠는 신념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를 상징한다. 설령 처음에 서 있는 곳은 동일한 것처럼 보여도, 신념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과, 신념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점차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모든 갈등의 시초가 되는 부패한 국가 권력자 '헴프 장관'은 제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국가보안부의 비밀경찰인 슈타지에게 명령을 내린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제 사사로운 이익을 채우는 부패한 권력자는 필연적으로 피권력자를 압박한다. 예를 들어, 극작가에겐 침묵할 것을, 연출가에겐 당에 불리한 선언서에 서명하지 말 것을, 그리고 배우인 트리스타에게 자신과 성관계를 맺을 것을 그는 명령한다. 이 때, 트리스타는 동독의 유명한 극작가 드라이만의 애인으로, 헴프 장관의 블랙리스트 때문에 그들의 친구들에 일자리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기에 헴프 장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재능이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그녀는 동독에서 무대를 잃고 싶지 않다. 다른 모든 연출가, 작가처럼 배우라는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싶다. 트리스타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예술가를 피권력자로 상정하면서, 이러한 조건을 강제할 수 있는 개인의 힘을 정당화하는 기제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존속해온 헴프 장관의 권력이다. 헴프 장관은 '국가라는 미명하에 퇴색된 사상'을 상징한다.  




 동독의 당원으로부터 '고분고분하다' 라는 평가를 받던 드라이만은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주변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딜레마에 빠진다.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감시를 받는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마저 희생되고 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가. 한편, 드라이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예르스카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절친한 연출가인 예르스카는 동독의 체제에 저항한 댓가로 무대를 잃었다. 드라이만은 그를 보면서 두려웠노라 고백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무대를 되찾지 못한 예르스카의 말로로 인해 드라이만은 동독의 사상에 대립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존경하는 친구의 관이 땅 속에 묻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문했을 것이다. 왜 나는 그들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없는가. 비로소 드라이만은 그의 글에서 동독의 왜곡된 삶들을 조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예르스카는 누구인가.





(1931년 3월 2일 ~ )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선언하며


 예르스카는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소련의 제 1대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국가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결과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에 의해 납치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드라이만의 파티에 간 헴프 장관이 그 전엔 연출이 아쉬웠다고 이죽거리면서 제 이마를 가리키는 것은 고르바초프의 이마에 있는 반점과 유사한 것을 가진 예르스카를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헴프 장관의 발언에 대해서 드라이만은 "이제와서 성명서에서 이름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라고 대답하는 데, 만일 예르스카를 고르바초프의 페르소나로 해석한다면, 이 때, '선언서'는 고르바초프의 선언에 비견되는 또 다른 가상의 선언서 일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예르스카는 동독의 사회주의 사상의 반기를 든 죄로 무대를 잃는 벌을 선고 받는다. 러시아의 폐쇄적인 정책을 쇄신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납치를 당하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고르바초프가 정치적 무대를 잃은 것처럼 말이다. 드라이만에겐 정신적 지주와도 다르지 않았던 예르스카의 결단과 말로가 그에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을 것이다. 그런데 말 나온 김에, 고르바초프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토 마사루 원작, [우국의 라스푸틴]은 일본인 외교관 유우키 마모루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근대 정치를 "흥미롭게" 그린 작품이다.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기 위한 쿠데타에 실패한 뒤, 일리인 제 2서기는 유우키 마모루 (실제 인물: 사토 마사루)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 비상사태 위원회가 고르바초프를 제거하려 한 진짜 동기가 뭔지 아나?
욕망이야.



 당시 反고르바초프 노선에 선 러시아 정치인들은 고르바초프의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경계했다. 공산주의의 수호자들의 눈에 민주화를 향해 열린 입장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물론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기 위한 그들의 대의는 '국가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국가를 위해서 불온한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권력이 증대될 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요원해질 것을 염려했던 탓이었다. KGB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보다 안전한 형태의 권력을 취하길 원했다. 권력이란 지나치게 크면 견제를 당하고, 애매하게 크면 숙청을 당하기 좋다. 그만큼 다루기 위험한 힘이다. 모든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맹목적으로 노력하는 풀에서 생존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결국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향한 그들의 쿠데타는 실패한다. 그러나 쿠데타가 실패한 뒤, 일리인 제 2서기는 마모루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 비상사태 위원회는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그러므로 우리들의 쿠데타는 처음부터 실패해야 마땅한 것이었다고. 






 [타인의 삶]이란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극작가로서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삶을 선택한 드라이만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신념을 되찾는다. 최순실 게이트에 관련된 기사가 연일 언론의 상단을 차지하는 요즘, 대한민국은 수많은 자의에 의한 타인의 삶과 타의에 의한 타인의 삶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정치 사상이든,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인 숭배든, 무조건적인 신뢰는 위험하다. 인간의 욕망을 분명하게 지배하는 사상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요구하는 사상은 수뇌부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 정보에 대한 통제는 소수의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가치로서의 정치적 이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친 "브레히트 베르톨트"의 시집에 빠진다. 브레히트 베르톨트는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좌파작가다. 그러나 관료주의에 물든 동독 공산당에 대한 풍자시를 쓰기도 하는 등, 1953년에는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면서 점차 사회주의 사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브레히트의 시집은 비즐러의 사상의 변화를 상징한다.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단순히 정서의 변화, 혹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감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신념의 배신을 당한 자가, 타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찾는 뼈 아픈 과정이 눈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가 감시해야 할 대상과 비즐러는 감정의 교차로에 서 있다. 브레히트와 드라이만의 작품을 통해서 비즐러는 신념보다 우선하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깨닫는다.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자는 적이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자는 동지다. 그렇게 획일적인 생각을 학습했던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통해서 최초로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간다. 아쉬움과 고마움, 설움과 기쁨, 질투와 응원 등 연속적인 감정의 교차점에서 비로소 무형의 단단한 껍질을 벗은 눈동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정치적 이상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창부라는 수단을 고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욕구는 끝이 없기에, 한 번 해소하면 또 다른 욕구를 찾아서 인간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늘 약한 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게 된다.  작년 말, "문화계 성폭행"의 해시태그를 단 용기있는 고백이 이어졌다. 우리 사회의 이면에도 헴프 장관과 크리스티나와 유사한 "권력형 성폭행"이 놓여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너의 여성성을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네게 불이익을 가하겠다는 은근한 문화계 인사의 압박과, 그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 우리 사회의 남성주의적 세계관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류를 계몽해야 마땅할 문화 예술의 최전선을 수호할 이들의 사회의 도처에 널려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 그 힘을 견제할 세력이 부재한 상태의 권력은 어떤 곳에서나 다수의 피해를 양산하게 된다.


 정치적 이상이란 권력의 혜택을 받는 자의 명령을 받는 약자의 신념은 또 다른 약자의 명분없는 희생을 도울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희생되는 정치적 이상의 가치란 무엇인가. 애당초 정치적 이상이란 기형적인 애국심과 개인의 부패라는 절벽을 눈 앞에 둔 가장 곧은 통로로 기능한다. 보다 높은 정치적 이상을 제 삶을 희생하는 이를 우리는 애국자로 기리는 이유는, 진정한 애국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이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영화에 등장하는 호네카마저-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 국가의 몰락 앞에 타국에 망명을 한다. 마치 조국, 국가, 그런 가치가 존재하기라도 했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그처럼 정치적 이상의 허무함을 깨달은 비즐러가 창녀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두 가지 행위에 큰 차이가 있는 지 묻는다. 그러마 만일 나의 삶의 이유이자, 목표였던 국가의 안보를 위한 신념은 성욕과 더불어 나의 또 다른 욕구를 채워주는 창녀와 다르지 않았다면, 즉, 인간의 삶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정치적 이상이 해체를 당한다면, 무엇을 위해서 인간은 살아야 하는가.


 영화 타인의 삶은 국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인간의 초점이 인간을 위한 삶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비즐러의 행위는 결코 자선의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창녀와 섹스를 마친 다음 날, 자신이 감시하는 작전 대상인 남자의 집에 비즐러는 찾아간다. 생일선물로 그가 받은 샐러드 포크(사치품)과 그가 읽는 서독의 서적,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여자와 그가 하룻밤을 보낸 침대를 그는 차례차례 바라본다. 그것은 너무나 자유롭고, 인간적이다. 너무나 인간다운 그 삶은 비즐러가 평생 그곳에 있는 지 알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국가 권력의 행패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친구를 위한 장송곡을 감시 대상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듣는 그 순간, 비즐러는 고요하게 눈물을 흘린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지. 무엇을 위해서 살았는 지.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 지.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충격에 고요하게 전율하면서 그는 생각한다.


 아, 차라리 이 사람의 삶이... ...


 국가는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가치 중에 서열이 높은 곳에 속하지만 때때로 인간을 배제한 그것은 덧없고, 허무한 것으로 드러난다. 스스로 보수임을 자처하는 국내 정치인은 하나같이 본인이 터를 둔 당이야말로 "국가"란 가치를 가장 잘 수호한다고 외치고, 수많은 사람이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도 불사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아마도 영화가 들려주는 답은 이렇다. 국가는 국민을 위한 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의 조상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한 이유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이웃, 나의 가족, 나의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국가를 수호하는 것은 내 옆에 있는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다.  만일 정치적 이상이란 무형적 가치의 혜택을 입은 권력자가 당신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국민을 탄압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앗아간다면, 우리는 그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마땅히 노력해야 한다.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변화를 꾀해야 하고, 지도자에 문제가 있다면 바꿔도 좋다. 결코 그것은 국가라는 가치에 반하는 것도, 매국을 하는 것도, 국가를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처럼 유연한 가치체계의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된 국가만이 장기간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무조건적으로 국가가 지닌 기존의 체계를 변호하는 것은 보수도, 애국도 아니다. 국가를 위한 길로부터 그것은 무엇보다 멀다. 미상불 타인의 삶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자는 힘 없는 개인을 향해서 그렇게 외치기들 좋아하지 않던가.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해서야. 조국이 네게 베푼 은혜를 잊지마. 우리나라에 블랙리스트따윈 없다고 ... ...  그리고 4년 뒤, 국가라는 가치를 우상으로 섬겼던 좌파들의 성벽, 베를린 장벽은 무너진다. 국민을 탄압하는 국가는 존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이름의 권력은 무섭다. 지나치게 무결해보이는 가치일 수록 더욱 그렇다. 아무도 쉽게 그 아성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만족스럽게 실현될 수 있을까. 과연 그 권력을 쥔 소수의 인간도 그 권력만큼 무결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회, 인간을 이기지 못했던 욕망에 희생된 그리 멀지 않은 타인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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