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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r 17. 2017

12. 추락할 것인가, 날 것인가, 다크나이트라이즈

정치편



 크리스토퍼 놀란이 총 삼부작에 걸친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서 가장 부각하고 싶었던 영웅의 면모는 다르게 해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놀란의 배트맨은 인간적이다. 억만장자, 15개 이상의 언어구사, 천재적인 지능, 정의감 등 DC코믹스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 배경을 갖고 있다는 오명 아닌 오명을 쓴 배트맨은 –그만큼 정의구현도 수월할 것이므로- [다크나이트 시리즈] 속에서 어떤 고뇌와 고민을 마주보는 지가 드러나면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회복한다.


 한편,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으로서의 각 자아의 힘의 균형이 잡히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장 돋보이는 동시에, 배트맨의 존재 이유와도 다르지 않은 고담시티에 배트맨이 사라지면서 찾아온 미래로서 놀란 감독이 제시한 바가 담겼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러한 배트맨 시리즈의 종결을 대하는 놀란 감독은 두 가지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1) 배트맨은 영원할 수 없는 한편, 영원해야만 한다.
2) 배트맨이 사라진 뒤에도 고담시티는 배트맨의 존재 의의를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배트맨이기에 갖는 일련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고담 시티는 배트맨에게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확실하다. 영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웅을 요구하는 터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고담시티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확실한가?


 과연 배트맨은 선한가?






 1. 선의 이면은 선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트맨이란 역할 그 자체가 한계를 가진 선을 상징한다. 또 다른 DC코믹스의 영웅들과 달리, 배트맨은 외계인도, 신도, 아니다. 인간이다. 배트맨의 다소 과장된 코스츔과 퍼포먼스에 대해 배트맨 비긴즈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서 설명하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인 영웅이 앞으로 갖게 될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 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또한, 배트맨이 없었다면 조커가 등장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배트맨의 선함에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다크나이트] 편에서 제시하는 질문이며, [다크나이트 라이즈]로 이어진다. 배트맨이라는 존재 자체가 악을 담보로 하는만큼, -영웅이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탄생을 정당화할만한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배트맨이 존속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그곳에 평범한 시민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악이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웅의 기본 조건으로 인식되면서, 모든 영웅이야기에 딜레마를 안긴 이 '선'이란 무엇일까. 과연 인간의 선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놀란은 그 대답을 선이 갖는 모순적 성질에서 찾는다.


 기원전 6세기 말의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되는 두 성질의 근원이 궁극에는 동일한 곳에 있으며, 설령 달라보일 지언정 그 둘은 하나의 다른 모습일 뿐임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들어보자. 빛은 그림자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림자가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다.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일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배트맨을 있는 힘껏 비웃는다.


네가 있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아.



 미상불 '선과 악은 하나다.'라는 개념은 [다크나이트]의 조커라는 캐릭터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배트맨이 없었다면 조커는 등장하지 않았다. 선과 악은 각각의 개념 그 자체로서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이다. 선은 그 자체로 악과 내부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마치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둠을 이미 상정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선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기 위해선 악이 선제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크나이트]의 테제는 그러한 성질이 각각 조커와 배트맨이라는 외부적 요소로 등장하여 그 대립구도를 통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 


한편,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이는 더욱 구체화된 예로 드러난다. 



1. 클린 에너지를 가능케 할 수 있는 발전기(선)는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전 단계의 장치(악)였다. 
2. 고담 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고든은 거짓말로 시민을 속였고(선), 8년 간 죄수들을 가석방도 없이 가두게 됐다.(악).
3. 알프레드는 브루스 웨인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선) 레이첼의 편지를 자의적으로 불에 태웠다(악).
4. 탈리아는 브루스 웨인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 고담 시를 파괴하려는 목적을 지닌 집단의 지도자였다.(악)
5. 배트맨(선)과 탈리아(악)은 라스 알굴이 조직한 집단, 어둠의 기사단 출신이다.(악)
6. 베인이 고담 시를 파괴하려고 했던 의도(악)는 사랑(선)때문이었다.
7. 클린 에너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선), 고아원의 소년들에 대한 자금을 끊어야 했다. (악)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관객이 다크나이트를 최고의 시리즈로 꼽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드러난 선과 악의 대립에 비해, 배트맨의 두 번째 시리즈의 테제로 놀란 감독이 선택한 것은 비교적 답을 내기 쉬웠다. 즉, 어떤 곳을 선택해야 할 지 관객은 알 수 있었다. -조커의 저항하지 못할 매력에 이끌린다 하더라도.- 그러나 놀란 감독은 선과 악의 대립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딜레마의 굴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나와 내가 싸운다면, 내가 이기고 내가 지지 않겠는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조커 역을 분했던 히스 레저와 거의 유사하게 생긴 조셉 고든 래빗을 로빈 역에 기용한 것은 결코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은 딜레마를 해소하면서 배트맨 시리즈를 마무리하기 위해 놀란 감독이 선택한 것은 두 가지였다. 바로, 배트맨의 존재의 이유가 된 고담시티에서 발생한 민중의 혁명과 브루스 웨인으로서 갖춘 개인의 혁명이었다. 과연 두 가지 대의는 어떻게 다르고, 각자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Emmanuel Joseph Sieyès (3 May 1748 – 20 June 1836)


What is the Third Estate? Everything.
제 3계층이란 무엇인 가? 모든 것이다.



2. 근대적 포퓰리즘의 현실적 한계


 인류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혁명은 힘없는 민중의 유일한 도구로서 기능해왔다. 혁명Revolution이란 민중의 저항 정신을 통해서 일어난 체제 전복을 일컫는다. 당연히 혁명의 기반은 언제나 피지배층, 즉 민중인만큼 혁명의 목표는 기득권의 탄압을 받았던 계층이 중심을 이루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1789년 한 팜플렛이 발간된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엠마뉴엘 조셉 시에예스가 작성한 이 팜플렛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기존의 제3계층 (민중)을 억압했던 왕권, 성직자, 귀족에게 현재와 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은 없다. 국가의 모든 것과도 다르지 않은 제 3계층에게 권리는 돌아와야한다.


 그러므로 민중이여, 혁명하라. 


 한편, 이러한 혁명은 체제의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 민중의 양날과도 같다. 때때로 혁명은 그 의도가 선할 지언정,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법을 무시하거나,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등 혼란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 또한 혁명 이후의 세상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체제의 상하가 전복된 세상, 과연 그 불분명한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감히 경찰청장인 무슨 권리로 체포하냐고 고든은 베인의 하수인에게 묻는다. 그러자 베인을 따르는 일원은 대답한다. 



 시민이 내게 준 권리다.



 과연 선하기만 한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느냐, 는 질문은 배트맨이 몸을 담고있는 터가 되는 고담시티로 확장된다. 고담시티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로 민중이 몸살을 앓았던 도시라는 점에서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동안 이곳의 시민들의 정신적 지지층이 되어주었던 것은 배트맨과 하비 덴트라는 상징적인 소수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비 덴트도, 배트맨도 사라졌다. 언젠가 '조직범죄'로 상정된 악의 축은 보다 불분명한 형태로 사회에 스며들었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악은 반대의 경우보다 더 위험하다.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주식거래를 조작하거나 세금을 뜯어내는 기득권을 단죄하기 위해서 시민은 어떤 영웅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감독은 물어야했다. 배트맨이 사라진 도시는 어떻게 변해야 마땅하겠는가?





 우리는 정복자가 아니다. 해방자로서 너희에게 이 도시를 돌려주기 위해서 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통해서 독특한 악인을 제시한다. 이 악인은 어떤 목적도 없고, 단순히 존재 자체에 그 의의를 두는 전작의 악인과 달리 고담 시를 파괴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다. 그런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난데없이 도시의 기득권이 기존에 누렸던 권리를 빼앗아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을 억압했던 자들로부터 권리를 되찾아와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억압당한 피지배계층이 이 악인을 반기지 않을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 이러한 제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제 3계층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모든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계층이 이러한 제안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이러한 형태의 사회, 즉, 헌법이란 질서를 통해서 한정되지 않은 사회가 장기적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모든 사회의 계층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을 경고한다. 바로, 언젠가 이웃 나라의 혁명을 멀리서나마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던 한 철학자처럼 말이다. 



Immanue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오늘날 공공체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많은 일들에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며, (...) 여기서는당연히 논쟁이 허용되지 않으며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프랑스 혁명을 목전에서 목격한 철학자와 달리, 프로이센 왕국(옛 독일)의 한 철학자는 제 3계층이란 단어 대시 민중 혹은 국민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들의 계몽을 이끌 수 있는 조건으로서 '이성의 공적사용'을 제시하는 데, 한 인간이 사회의 악을 초래할 만한 법을 대할 때, 자신의 직무를 이행하지 않고 적법하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 반발을 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의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하여금 보다 제한된 사회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할 것이므로 종국에 민중으로 하여금 보다 국한된 자유를 누리게 할 것이라는 게 바로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텍스트 속에 제시한 바였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완전한 자유'를 꿈꾸면서 길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마음대로 담배를 피우거나 금연구역을 무시한다고 해보자. 이에 대해 피해를 입은 사회의 구성원은 정부에 반발을 하거나, 정부가 이러한 행태가 사회 전체의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흡연자는 제한되지 않은 자유를 누리겠다는 이상을 위해서 질서를 무시한 결과, 보다 제한된 자유를 누릴 수 밖에 없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칸트가 제시하고 싶었던 바는 간단하다. 현 사회 체제에 불만이 있을 때라도, 시민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꾀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이자 경제학 교수인 사람은 성직자로서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되, 국가의 조세 제도가 어떠한 부분에서 국민에게 해가 되는 지점을 발견했다면 경제학 교수로서 논문 발표, 강의 등의 공적인 방식을 통해서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성의 사적사용이나 무력을 통한 체제 전복은 앞서 설명했던 이유로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칸트가 내놓은 계몽에 대한 답변은 결코 기득권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이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시대가 동맹하고 공모하여, 다음 시대가 그들의(무엇보다 절실한) 인식을 확장하고 오류들을 정정하는, 요컨대 계몽을 계속 진전시키는 일들이 불가능할 게분명한 상황에 처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진보를 근원적 사명으로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범죄행위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동안만일지라도, 아무도 공적으로 의혹을제기한 적 없는 완고한 종교법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그리하여 개선을 향한 인류의 진보에서 말 그대로 한 시기를 말살해버리고,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순전히 불리하고 무익하게만 하는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것이다. -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시에예스의 <제 3계층이란 무엇인가>와 달리, 온건한 사회 체제의 변화를 통해서 집단으로서의 시민의 계몽을 이룩하는 데 칸트는 기존의 지배계층, 즉 왕권과 귀족들의 역할도 인정한다. 그들의 역할은 간단하다. 시민이 스스로 계몽되는 동시에 사회의 질서를 보다 이롭게 구축해나갈 자유를 권력을 근거로 억압해선 안 된다. 영원한 독재는 시민이 스스로 계몽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마땅히 이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되기에 지양해야 마땅하다. -과연 '계몽'을 인류의 목표로 봐야하는 가, 아닌 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본 장에서 다루지 않는다.- 즉, 만일 칸트가 상정한 것처럼 계몽이란 인간이 미성년의 상태를 벗어나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이룩해야 하는 어떤 종류의 목표라면, 개인의 계몽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는 곧 사회 전체의 계몽으로 나아가게 되는 데, 이 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는 양측의 끝없는 논의와 양보를 통해서만 점점 더 사회는 계몽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에예스가 '제 3계층이란 무엇인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한 제 3계층이 국가의 권력을 돌려받는 과정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등장한 고담시의 시민들처럼 무력과 폭력을 이용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시에예스는 헌법과 법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헌법이란 해당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 세운 일련의 근본적인 법칙이다.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마스 홉스는 인류가 야만 상태를 벗어나서 사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던 이유로 키, 체격 등의 차이로 야기된 불평등을 댓가로 완전한 자유를 누렸던 원시사회를 꼽았다. 타고난 신체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싶었던 인간은 자유Freedom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단일한 시스템에 헌납하되, 그들이 허락한 자유Liberty만을 누릴 수 있게 됐고, 그러한 시스템을 가능케 한 게 바로 헌법이었다. 헌법은 그것이 영향력을 미치는 한, 그 존재 하에 모든 시민이 동일한 조건 하에 놓인다는 것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예스처럼 혁명의 주체가 헌법을 지킨다는 조건을 달면, 거의 모든 혁명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예스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상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다. 


 첫째, 시에예스가 주장했던 것과 달리, 제 3계층에서 선출된 국가의 대표자(국회의원)이 기존의 기득권과 관련이 없을 리 무방하다. 둘째, 과연 국가의 대표자가 충실히 따라야 할 법이 제 3계층을 위한 것일 수만은 없다. 제 3계층 자체가 '단일한' 집단으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한편, 계층에 관련된 그의 설명에는 정작 기존의 가장 강력한 기득권, 대부분의 제 3계층의 삶을 지지하고 있는 '부르주아(자본가)'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3계층은 혁명을 통해서 왕권과 신학자, 귀족들로부터 권리를 되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로부터는 어떻게 법의 질서를 어기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그들의 권력을 담보하는 기제를 갖고올 것인가.


  <제 3계층이란 무엇인가>는 '제 3계층'이라는 가장 불분명한 형태의 계층을 국가로 상정하고, 지나치게 큰 권력을 '돌려주면서', 귀족 계층을 비롯한 기존의 기득권은 국가라는 개념으로부터 배제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순간, 자본가를 비롯한 소수의 기득권이 사회의 지배계층을 손쉽게 차지하는 것과 부르주아의 입맛에 맞게끔 법이 수정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해왔던가. 과연 제 3계층을 위해서 법을 수정하고, 사회가 유지되면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게 그토록 간단한 일이었다면 왜 인류는 왕권 체제 하에 탄압받는 쪽을 선택했을까.


 미상불 혁명의 성공을 목전에 둔 민중의 기대와 달리, 혁명 이후에 민중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권력이 민중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지식인들조차 혁명 이후의 혼란 속에서 계급과 일정한 사회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중심 테제, 선의 이면은 선이 아닐 수 밖에 없다는 그 필연적 굴레와 맞닿아있다. 성공적으로 체제 전복을 했다고 평가를 받는 혁명조차 그 씨앗에 이미 실패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혁명은 과연 구 체제의 타락에 대한 완전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역사는 그러한 현실을 목격한 적 없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제 3계층에 의한 고담 시의 혁명이 성공한 뒤, 고담 시티는 큰 변화를 겪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법부'의 시스템이다. [배트맨 비긴즈]에 등장했던 크레인은 흡사 판사처럼 시민의 높은 곳에 앉아 판사봉을 두들기면서 '죄인'을 처벌하는 재판을 모사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헌법도, 법도,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결과로 살얼음판에 서야하는 것은 현 체제에 반항하거나, 구 체제에 지나치게 순응해 민중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감정적 죄목으로 불려온 부르주아들 뿐이다. 오직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는 '근거가 없는 민중의 뜻'뿐이다. 그런데 과연 민중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민중, -제 3계층- 이길래 시에예스를 비롯한 정치철학자들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그들에게 부여되어야 마땅하며, 그들이 곧 국가와 다르지 않다고 역설했을까. 동일한 사회를 생활하는 개인의 무리에 그것은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생각해보자. 직장인들끼리 점심식사를 통일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 수만명의 삶을 지지하는 거대 사회가 서열을 동반한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의 인간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겠는가. 혁명의 객체가 된 이들을 향한 분노의 불씨가 꺼지면, 모든 죄 있는 자들의 목을 매단 뒤에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오직 또 다른 인간의 욕망이 등장할 뿐이다. 



 과연 모든 것을 민중이란 자의적인 집단의 뜻에 맡기는 사회가 존속할 수 있을까? 완전한 민중주의는 인간의 욕망이 생존하는 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이상이다. 심지어 설령 시에예스가 제시한 것처럼 국가의 대표자로서 기능하는 국회가 왕권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책처럼 보이더라도, 그 안에는 자본과 권력 등의 이유로 계층의 서열을 나눌 수 밖에 없는 씨앗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민은 보다 자유롭고, 안전한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非인간적 존재, 헌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제 3계층을 위해서 수정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을 평등한 상태로서 대할 수 있는 기제로서 그것을 대해야 마땅한 이유다. 적어도 나와 타인이 동등한 헌법이란 질서 하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우리가 야만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사회를 구축한 이유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미개인이 사회를 이룩했는 지 홉스, 루소 등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각자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헌법에 의존하지 않은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인 테제는 인간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상불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던 베인의 무리 조차 개인의 이상이란 목적을 위해서 제 3계층의 욕망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보다 이해하기 쉽다. 헌법을 무시하는 민중주의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며, 헌법이 민중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그 위에 올라가서 자의적인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한편,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민중의 노력이 기득권의 절대적인 권력 유지를 위해서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헌법 하에 평등한 상태를 담보받는 구성원으로서 양측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 말이 들리는 것처럼 텅 빈 것일지라도, 특정한 헌법에 영향을 받는 시민이라면 새겨둘 필요가 있다. 특히 헌법의 질서를 수호하는 한편, 격변하는 체제를 살고있는 집단이라면.


 과연 국가의 대표자가 따라야 할 법이 오로지 제 3계층을 위해서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가능하다고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치뤄야 할 댓가가 어떤 것이 될는 지에 대해선 여타의 혁명을 지지한 프랑스 정치철학자가 그렇듯, 시에예스도 말을 아낀다. [다크나이즈 라이즈]도 아버지의 이상을 이룩하겠다는 보다 나이브한 목표를 펼친 탈리아를 통해 민중주의를 영원한 이상으로 남겨두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해결해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고담시티에서 배트맨이 사라지면서, 배트맨이 영원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3. '페르소나'라는 책임과의 화해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담 시티에서 배트맨이 사라지는 동시에 양측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다크나이트]가 배트맨과 고담 시티의 영원한 갈등을 예고하면서 끝났다면, 배트맨이 사라진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그대로 두되 본래의 갈등을 화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존재의 코어와도 같았던 둘은 서로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분리를 겪어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배트맨이 존재해야 하는 고담 시티는 악인이 들끓는 무법지대여야하고, 고담 시티에 살아야 하는 배트맨은 영원히 배트맨으로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선이 있는 곳에 그만큼 완전한 악이 있다.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가 끊임없이 제시했던 테제가 아니던가. 


 한편,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분립도 성공적으로 획득할 필요가 있었다. 어렸을 적에 겪었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정의를 위해서 '배트맨'의 페르소나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브루스 웨인의 삶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던 집사 알프레드가 지적했든 '인간의 생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학의 연속이었다. 나는 배트맨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돼. 나는 더 강해져야 돼. 지금보다 더. 브루스 웨인을 구덩이로 끌고가면서 베인이 '너에게 죽음은 축복이야.' 라고 말했던 것은 그만큼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으로서의 책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트맨에게 준비된 유일한 결말처럼 보이는 그 길을 어떻게 그가 반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끊임없이 타자의 입을 통해 배트맨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배트맨이 되려고 하는가. 왜 당신은 배트맨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문은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시험받는 심판대를 마주볼 때 드러난다. 배트맨은 강하다. 그러나 배트맨의 마스크를 벗은 인간은 어떤가. 과연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 만든 놀랄 만한 장비도 없는 브루스 웨인은 그것을 얻을 수 있을만큼 강한 존재인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누구도 탈출에 성공한 적 없는 감옥. 인간의 서열 혹은 삶의 맨 하단을 암시할 깊은 구덩이가 제시하는 그 평등한 조건 속에서 브루스 웨인은 '브루스 웨인으로서' 탈출해야 한다는 시험에 놓인다. [다크나이트]에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서 한계를 체감했다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한계를 배트맨은 마주본다.


 한편, 전쟁은 영웅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의 또 다른 층위, 배트맨이 사라진 고담 시티에 내 시민들의 전쟁은 이어진다. 베인을 경계선에 두고 양편에서 반反베인과 찬贊베인 파는 대립한다. 시민은 시민의 나름대로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렇게 캣우먼, 로빈, 고든 등 배트맨이 없는 사회의 구성원이 힘을 합쳐 공동의 적에 맞설 때, 브루스 웨인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법을 고심한다. 각자 다른 이유를 갖고 있되, 공동의 목적을 지닌 그들이 구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날아오르는(rise)것. 그러나 각자의 한계에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먼 이상처럼 보일 뿐이다. 전설처럼 내려온 가능성은 오직 소수에게 허락된 특권처럼 보인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마침내 브루스 웨인은 전설 속에 구덩이를 빠져나온 이의 비결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하면 베인을 막을 수 있는 지 시민들이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아무것도 묶지 않은 상태에서 그토록 멀기만 했던 장애물을 마주할 때,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관객에게 묻는다.


 정말로 할 수 있다고 믿는가?



  누구나 소원이 이뤄지길 간절하게 바란다. 나를 가로막는 지독한 구덩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정말로 '나'는 간절하다. 실패를 향한 두려움은 오로지 소수에게 허락되는 사치처럼 보일 만큼. 그렇다면 우리는 왜 떨어질까? 이토록 간절한 나를 계속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브루스 웨인에게 깊은 구덩이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선,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을 역사에서 삭제하고 싶은 그 고루한 자기 학대의 상태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을 배트맨으로서 존속시키기 위해서, 브루스 웨인으로서 삶을 살기 위해서 두 가지의 자아를 성공적으로 분립시켜야 했다. 즉, 배트맨이라는 페르소나를 벗더라도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축복으로 여길만큼 배트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없는 자기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시켜야 했고, 오로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만이-삶의 소중함을 아는 자만이- 탈출에 성공하는 구덩이는 배트맨으로서의 그가 보다 강력해지는 한편, 브루스 웨인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장의 역할을 맡는다.


 한편, 배트맨과 하비 덴트를 둘러싼 거짓된 신화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배트맨이 사라진 뒤에도 고담 시티가 편안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브루스 웨인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배트맨을 영원히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더 없이 필요하다. 베인이란 악인을 통해서 놀란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브루스 웨인의 개인적인 갈등 해소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시민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얻는 그 과정에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조차 배트맨이란 상징적 인물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것을 '희망'의 정수리에 올려둔다면, 가장 고통을 받는 도시조차 수없이 많은 영웅들의 희생을 통해서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더 배트'의 자동 운행 장치가 고장을 핑계로 고담 시의 시민들을 위해서 배트맨이 희생했다는 것을 알린 것은 마지막까지 배트맨이 고담 시티를 위해서 보여줬던, 가장 희망적인 '쇼'였을 것이다. 배트맨과 고담 시, 양쪽 모두를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물론, 이따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을 우리는 마주본다.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혹은 개인의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순간 인간은 난데없이 찾아온 위기 앞에 선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어쩌다 이렇게 됐는 지 갈피를 알 수 없는 그 순간이야말로 안전띠를 풀어야 할 때일 지 모른다. 뱃속부터 차오르는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때는 지금인 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는 영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고든에게 배트맨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누구나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전하는 것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웅이 될 수 있다. 아마도 민중의 힘이란 권력을 향한 욕망을 그럴 듯하게 해소하는 데 불과한 사회 체제의 무조건적인 전복을 꾀할 때보다 이 사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 이 사회를 보다 이롭게 만들고자 의욕하면서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 정신 자체에 깃든 것은 아닐까. 설령 배트맨처럼 거대하고, 정치적인 위기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장 어두운 순간으로부터 날아오를 수 있다. 발 밑에 절망을 딛고 희망을 향해 고집스레 고개를 쳐들면서 비상을 준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 소중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한 명의 영웅은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임마누엘 칸트 - 계몽이란 무엇인가

file:///C:/Users/Bridget/Downloads/Kant_Aufklaerung.pdf


엠마누엘 조셉 시에예스 - 제 3계층이란 무엇인가

http://pages.uoregon.edu/dluebke/301ModernEurope/Sieyes3dEstat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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