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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r 24. 2017

13. 마지막 한 사람 마저도, 마션

정치편

 

 한 남자가 실수로 화성에 버려졌다. 그의 이름은 "마크 와트니', 식물학자다. 그가 소속한 단체인 NASA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크 와트니를 구출하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액수와 전문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약없는 구출 작전에 이용되는 인적, 물적 자원의 희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NASA는 선택의 기로게 선다. 이 때, NASA의 Director인 테디 샌더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NASA라는 조직과 팀원들을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건 '한 사람' 보다 큰 문제야." 그에 대고 미치 핸더슨은 대답한다. 

 "아니, 그렇지 않아."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유명한 질문이 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지 말이다. 테디 샌더가 지적한 것처럼, 언뜻 마크 와트니 구출 작전은 다수와 소수의 이익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익의 크기와 양을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문제다.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


Once they had left their homeland they remained homeless, once they had left their state, they became stateless; once they had been deprived of human rights they were rightless, the scum of the earth. 

고향을 떠나면 고향없는 자가 되고, 국가를 떠나면 국가없는 자가 된다. 한편,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당하면, 그들은 권리없는 자가 된다. 이 지구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다.

 <Chapter 9: The Decline of the Nation-State and the End of the Rights of Man.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한나 아렌트: The Need of the World-based Constitution


 1914년 8월 4일 이후, 유럽은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다. 흔히 "유럽전쟁"으로 불렸던, 세계 제 1차 대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위기는 연쇄작용을 거친 또 다른 부작용을 안기면서, 유럽 전역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불행한 상황을 마주한다. 어느 때보다 국제 사회의 힘이 절실한 상황을 두고, 한나 아렌트는 국가를 기반으로 갖는 헌법이 갖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일견 인간의 기본권이란 인간에게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계전쟁의 종결 직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두 개의 거대한 다국가 스테이트가 붕괴하면서, 그에 따른 난민이 다수 발발함에 따라 인권의 민낯은 낱낱이 드러난다. 인간의 기본권을 명시하는 곳은 헌법이다. 그리고 그 헌법은 대개 국가를 기반으로 갖는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국민이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를 잃은 이들에게 국가가 보장하는 헌법이 적용될 리 없다. 그러므로 국가를 잃은 인간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마저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인간이 아니라, 지구의 찌꺼기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국가의 경계 너머를 부유하는 난민을 대하는 데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전체주의적인 국가의 태도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인권의 정당성의 유효성을 명시할 수 있는 세계를 기반으로 갖는 헌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인간의 기본권이란 간단하다. 인간은 태어난 그 자체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기본적인 삶을 누릴 최소한의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기본권을 국가 이외의 차원에서 보장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예를 들어, 국가보다 더 큰 단위, 세계를 기반으로 갖는 헌법을 세운다는 가정을 해보자. 바로 그러한 헌법을 통제할 수 있는 초국가기구가 필연적으로 요구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초국가기구의 존재가 국가간 자유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서 대부분의 정치철학자는 막다른 골목을 직면하게 된다. 이 세계에 유일하게 유사한 역할을 맡고 있는 UN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세계 기반 헌법을 만든다면, 해당 헌법에 의거한 법의 집행을 위해서 UN은 독립적인 사법부를 제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기반 헌법에 의거하여 누구나 UN의 사법부에 국가로부터 당한 인권 침해에 대해서 제소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UN의 사법부의 판결에 해당 국가는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UN의 사법부의 판결이 강제성을 갖기 위해선 그것에 순응하지 않는 국가를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 그렇다면 UN은 세계 경찰 기관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나라의 국민은 오직 그 나라의 법을 따르듯, 초국가기구의 경계 하에 놓인 모든 국가는 오직 그 초국가기구의 법을 따라야 한다. 즉, 세계 기반 헌법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 간 전제주의로 향할 수 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을 우리는 마주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할 인간으로서 모두는 고민을 해야 한다.


 과연, 전체주의자의 냉소적인 주장대로, 국가 개념을 배제한 인간의 기본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인본주의의 두 번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크 와트니의 화성에서의 삶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통없이 죽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을 그 상황에서, 그는 살아남겠다고 결정한다. NASA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살아남는 쪽을 선택한다. 마크 와트니에게 화성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그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땅이다. 온갖 종류의 미신, 종교, 타인에 대한 의존은 화성에서 무용지물이다. 과연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 지, 없을 지에 대한 문제는 화성의 온 인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마크 와트니는 결심한다. 


I'm not gonna die. 
여기서 난 안 죽어.


 흔히 서양권에서 "산다"는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 존재하다Exist와 산다Live다. 전자가 존재하는 데 만족하는 삶이라면, 후자는 자아를 실현하는 나로서 살아간다는 데 의미를 둔 삶의 방식이다. Exist와 Live의 좁힐 수 없는 간극에서 마크 와트니는 생존하다Survive를 택한다. 미상불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선제적으로 생존한다. 이 지구의 찌꺼기도 아닌, 지구 밖의 잉여인간인 식물학자도 다르지 않다. 마크 와트니는 필사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생존을 선택했다. 물론, 존재하는 것만 목표로 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감자만 먹고 싶지 않다.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인을 만나고 싶다. 지금의 나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형태로 존재하는 데 만족하는 한편,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는 노력한다. 앞서 말한 존재하다Exist와 산다Live의 차이는 한 가지다. 非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Exist의 형태로 존재한다. 오직 인간만이 Live의 형태로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흔히 Exist를 두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가 사물과 다름없이 존재하는 데 그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사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욕구한다. '인간답게 사는 최소한의 범위'에 대한 시각 차이는 존재할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보장이, 단지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면 안되는 이유다.


  한편, 마크 와트니의 생존방식을 지탱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정만이 아니다. 마크 와트니의 행위의 이면에는 누군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필사적인 믿음이 뒷받침한다. 마크 와트니가 화성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그가 처한 상황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배에 안테나의 파편이 박히면, 그것을 뺀다. 구조대가 돌아올 때까지 생존하기 위해서감자를 기르기로 결정한다. 물이 없으면, 만든다. 혹은 화성의 날씨가 열악하므로,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방사능에 피폭될 위험이 있는 물질을 그는 땅 속에서 꺼낸다. 화성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는 오직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제가 가진 지식을 십분 활용한다. 미상불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로 결정한 인간의 행위만큼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탱하는 삶의 방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필사적으로 삶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태도는 '아무리 열악한 상황일지언정, 누군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과연 위기에 처한 인간이 인류에 대해서 갖는 믿음을 우리는 배신할 수 있을까.






 다시, 마크 와트니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화성과 지구, 나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크 와트니는 본래의 터전을 잃은 채 낯선 땅에 철저하게 고립됐다. 그런데 그가 처한 상황이 낯설지 않다. 바로, 우리 사회의 난민이 처한 상황이다. 잉여인간은 두 가지 범위 내에서 다룰 수 있다. 첫번째, 국가 내 잉여인간에 관한 문제고, 두번째, 자국 외 잉여인간에 관한 문제다. 먼저, 전자부터 살펴보자.


 비교적 난민 문제와 거리가 먼 대한민국조차 잉여인간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잉여인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현재진행중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변두리에 선 자국민을 적극적으로 외면하자는 목소리가 '보수'라는 미명 하에 힘을 얻는 기이한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해 11월, 서울시는 대한민국의 장기미취업자, 저소득층해당자를 우선선발하여, 서울시에서 거주하는 청년 3,000명에게 청년수당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지난 7월, 본격적인 지원자 모집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대해 정부와 합의되지 않은 형태의 사회복지이며, 포퓰리즘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청년수당 2차 지급은 무산됐다.

 그런데 과연 포퓰리즘은 무엇일까. 지난 시간, 헌법을 배제한 시민의 권력이 어떻게 사회를 무너뜨리는 지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통해서 확인했다. 포퓰리즘은, 그것을 가리키는 수많은 의미에도 불구하고 대략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바를 오직 민중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인간 이외의 시스템의 종속되는 것을 거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그 목적은 부패한 소수가 거머쥔 권력 체계를 전복시키는 데 있다. 흔히 포퓰리즘의 예로 부패한 소수의 권력층이 민중의 권리와 가치를 억압할 때, 민중의 무기가 되는 '혁명'을 들 수 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를 처벌하는 가?" 에 대한 경찰의 질문에 시민은 "민중의 권리"라고 대답하는 게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둔 혁명의 목적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최소한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데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문제와 궤를 같이 할 지언정, 그 수단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고착된 체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데 헌법에 명시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최대 단위인 국가 차원에서 노력을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미상불 일부 보수 층을 위시한 대한민국 정부는 '포퓰리즘'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복지를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문제와 하등 관련이 없다. 포퓰리즘을 근거로 무조건 복지를 축소시키는 것은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데 지나지 않는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청년실업이 최고치를 기록했는 데도 불구하고, 마치 주식투자나 기계처럼 입력값을 넣는 만큼 결과값을 내라고 강요하고,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린 청년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가 기본으로 갖춰야 할 올바른 자세로 보기에 어렵다. 과연 그것을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보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국가는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궁극적인 기관으로서, 자국 내 경계의 인간이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끔 최소한의 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건복지부를 통해서 청년수당 지급을 할 수 없도록 압력을 넣고, 공기업은 성과평과제를 도입하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계층과 직업군의 인간의 가치를 수치로 평가하려고 하는 현 정부의 태도가 몹시 실망스러운 것은 애당초 사회의 변두리에 선 국민을 경계 속으로 진입시키는 방도를 찾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한 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야." 가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라면, 그 경계에 진입할 수 있는 배경조차 갖지 못한 이는 필연적으로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러한 정부는 얼마나 신뢰를 받을 수 있고, 건강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을까. 만일 사회의 복지가 필요한 청년들이 "국가의 세금만 얻어먹고 펑펑 놀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봐" 염려가 된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잉여인간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체계에 대한 고민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의무를 다 하라고 강요하면서, 사회의 경계 밖에 서 있는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인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정부가 나태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 기반 헌법을 통해서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자국 외 잉여인간에 대한 문제다. [마션]에 등장한 화성이란 장소는, 쉽게 말해,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잃고 변두리에 선 난민의 현실과 맞닿아있다. 단 한 사람의 인간이더라도, 그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인류는 마땅히 그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영화 마션이 관객에게 던지는 메세지다. 과연 그 메세지가 '이상주의idealism'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게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한 한나 아렌트의 목적이었다. 과연 어떻게 그 문제가 해결되는 가, 에 대한 대답은 앞서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과 직결된다. 과연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한 다수의 노력은 다수의 이익과 소수의 이익이 대립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나는 밝혔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다수의 이익은 소수의 이익보다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마크 와트니를 구해야 마땅했다. 어떻게 마크 와트니를 구한 이유가 큰 이익을 위해서 작은 이익은 희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일까.  특히 마크 와트니를 귀환시키는 데 소비된 물적자원과 희생된 인적자원을 고려하면, 언뜻 이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단지 '마크 와트니'라는 한 남자의 생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간단하다. NASA는 마크 와트니를 구하면서 그의 생명으로 대변되는 인류의 권리,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즉, 마크 와트니의 생명을 구하는 행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가진 권리의 정당성을 비명시적인 토대를 기반삼아, 가시적인 형태로서 전세계가 재확인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러한 숭고한 과정에 참여하는 국가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필연적인 결함이 있지만, 이 장에서 논의하지 않는다.- 과연 몇 개의 생명과, 얼마의 액수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필수적이며, 그 자체로 인간이란 개념과 맞닿아있는 선천적 권리보다 큰 개념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앞서 나는 '비명시적인 토대를 기반으로' 마크 와트니의 생명을 구했다고 적었다. 과연 NASA는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미국의 헌법을 뒤적거렸던가. 아니다. 오로지 누군가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인간의 기본권이란 이미 인간 그 자체에 내재된 것이며, '인간'이라는 공유된 터를 통해서 그 정당성을 입증받고, 필연적으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본권을 존중하면서 본인의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태도는 보편적인 인권이 발생하는 근거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명시적인 기반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외려, 인간의 기본권을 담보하는 것은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실천 속에만 드러나있으며, 그 외의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인류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자국민과 타국민으로 나뉠 지언정, 인류라는 틀 안에서 누구도 나뉘지 않는다. 인류라는 분류에서 잉여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 기반 헌법에 대한 필요성은 요구될 지라도, 인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는 태도에는 인간이란 공유된 터를 통한 '마땅함'을 기반으로 가지므로, 그것을 강제할 권력을 쥔 기관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헌법이란 시스템(법)을 받치고 있는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가까워야할 것은 또 다른 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지 모른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이 나날이 증가하는 현 시대에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 그녀가 주장한 것처럼 이상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이다. 미상불 난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 테러리스트의 존재는 언제나 가장 좋은 비판의 근거였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를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는 난민 문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히려 테러는 난민 문제 해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테러리스트의 세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이상을 초월하여 인류를 계몽시키는 것, 테러를 당한 지역을 복구시키는 것, 궁극적으로 테러리스트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초국가기구의 지도 하에 국가끼리 협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인류로서의 우리를 위한 일이다. "우리"가 왜 "그들"을 구해야하는가? 자국민에게 사용될 수 있는 자금을 왜 우리와 관계없는 난민에게 사용해야 하는 가. 난민을 가장한 테러리스트가 입국할 수 있는 그 위험성을 왜 떠맡아야 하는가. 간단하다.


 언젠가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 국가마다 국가를 잃을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 위기는 각자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에서 절대적으로 배제될 수 있는 이는 누구도 없다. 그릇된 사상이 주류가 될 위험은 도처에 존재하고, 인간을 그 목적으로 삼지 않는 정치적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특히 한반도는 핵무기를 위시한 전쟁의 위험에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다. 언젠가 우리도 난민이 될 수 있고,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상불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태도가 나의 기본권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어떠한 근거로 자국 외 잉여인간을 수용해야 하는 가를 둘러싼 난민 문제의 최종적 해결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이 글의 원제는 "왜 그를 구해야 하는 가"였다. 그러나 고민 끝에 나는 "마지막 한 사람일 지라도"로 글의 제목을 바꿨다. 원제에 대한 유일한 대답으로 글의 제목을 바꾼 것이다. NASA가 마크 와트니를 구한 이유는 간단한다. 한 인간보다 큰 존재는 없다. 오직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생명과 삶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는 결코 서류에 명시된 형태로 수렴되지 않는다. 인류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로부터 그것은 보장을 받는다. 그것은 전체주의자가 비판했던 대로 이상적이거나, 가식적인 것도 아니며, 인간에 대한 처우로서 과연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행위에 정말로 이유가 필요할까. 


 세계 기반 헌법의 개념이란 인권을 명시하는 형식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지 않는 국가에게 인간의 권리란 이해하기 몹시 힘든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을 구조하면서 인류의 기본권을 재확인시키는 마크 와트니의 크류는 마침내 마크 와트니와 손을 잡는다. 그들이 조우하는 장면에서 크루 내 가장 출연 비중이 적었던 '벡'의 클로즈업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시선을 통해서 한나 아렌트가 명시한 '방관자onlooker'로서 관객이 그 장면의 당위성을 새삼스레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결코 '감성적'이거나, '감상적'인 차원에서 이해돼선 안된다. 그러므로 인권의 논리적인 당위성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마크 와트니를 구해야하는가. 마크 와트니를 구출하는 두 시간의 러닝타임, 혹은 몇 달간의 영화 속 인물의 노고에 대해서 당신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인류의 테두리에 속한 당신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류에 속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동일한 존재 방식의 터를 공유한 또 다른 사람을 구함으로서 나의 인권을 재확인시킨다는 것을 말이다.


 과연 인간의 기본권,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기반은 어디에 있는 가.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는 그 대답을 실천할 수 있다. 당신과 나의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마크 와트니가 실천의 형태로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받길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으면서. 오직,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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