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편
일제강점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아가씨, 히데코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훈육을 당한다. 오로지 남자들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필요한 것을 학습한다.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 것의 처벌로 문어와 섹스를 해야했던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관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진다.
그렇게 성장한 그녀는 무대 위에서 전통 기모노를 입고, 춘화가 그려진 야설을 낭독하며, 인형과 섹스를 하는 포즈를 취한다. 그녀를 보면서 남자들은 말한다. 역시 대단합니다. 역시 아가씨는 아름답습니다! 분명히 이들의 눈에 전통 기모노를 갖춰입고 올바른 발음과 적절한 속도로 야설을 낭독하는 히데코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마치 요정집에서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하는 여자들을 향해 우리나라 남자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필 하고 많은 계집아이 중에 숙희가 그녀 앞에 등장한다. 숙희는 히데코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말한다. 아가씨는 탁월하게 아름답다고. 수많은 남자가 그녀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한 건 매한가지인 데, 히데코는 숙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궁금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들의 사랑은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여성 간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라캉이 위상학 등 수학 분야의 용어를 사용한 것, 라캉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적 개념을 오남용한 것 등을 비판하면서 라캉을 "습자지 지식꾼"(superficial erudition)이라 칭하였다. (중략) [2] 리처드 도킨스는 라캉이 "사기꾼인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굳이 수학 전문가의 의견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중략) [3] 프랑수아 로스탕은 라캉 저술을 "사이비과학자의 무의미한 횡설수설로 이루어진 앞뒤 안 맞는 물건"이라 하였으며, 노엄 촘스키는 라캉은 "웃기는 자이며 자의식과잉 돌팔이임이 분명하다"고 했다.[4] 과거 라캉 분석가였던 딜런 에반스는 나중에는 라캉주의는 과학적 기반이 부재하며 환자들을 돕기보다는 해를 끼친다며 라캉주의를 포기하고 라캉의 작품들을 "성전" 취급하는 라캉 추종자들을 비판하였다.[5] 리처드 웹스터는 라캉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모호함과 오만함, 그리고 그 결과 생겨난 "라캉교"(Cult of Lacan) 뿐이라고 매도하였다.[6] (출처: 하단에 적시)
현대 철학자 중 자크 라캉만큼 학계에서 비판을 받는 자는 드물다. 과연 프로이트부터 이어지는 여성차별적인 사상이 어떻게 라캉의 그릇된 사상에서 발전했는 지 영화 [아가씨]를 통해서, 레즈비언 일반의 욕구 원리와 남성을 배제한 여성의 욕구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은 자크 라캉의 여성이론이 갖는 필수적인 결함은 여성의 욕망을 남성 욕망의 그림자로 치부하는 데 있을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본래 유아-어머니-남근-아버지라는 인간관계의 네 축이 존재하는 데, 이 때, 어머니는 기표로서의 남근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여성은 결여된 존재다. 본질적으로 결여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아버지의 남성성의 결과로서 자리잡은 남근으로 상정하고, 이에 집착하게 되며, 남성의 사랑을 정의하는 상징계보다 열등한 상상계(쉽게 말해, 자신이 창작한 허구를 사랑하는 것)에서 욕구 실현의 실마리를 얻을 수 밖에 없다. 자크 라캉이 기호논리학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욱여넣고, 소쉬르 언어관에 의거하여 인간 존재를 언어에 종속시키는 오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이 장은 깊게 논의하지 않는다. 단, 두 명의 정신분석학자의 실상 본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 여성에 관련된 입장은 그 결과가 틀릴 수 밖에없다. 이미 전제 차원에서 여성을 정의하는 기준을 남성의 생물학적 속성의 유무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입장을 바꿔보자. 남성을 정의하는 기준이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어떨까.
남성이 여성에게 이따금 독선적이고, 공격적이며, 거친 행동을 하는 것은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여근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안으로 파고든 여근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신처럼 여근을 탈락받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근이란 남성이 경험한 바 없는, 상상속에서 욕망한 대상, 즉, 허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여근과 남성의 욕망이 되는 상상속 여근과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서 남성은 여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허구를 좇는다. 그러니 여성들이여, 남성들이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강박증 증세를 보여도 조금 참아라. 없어서 그런 걸 어떻게 하겠는가? 하하하.
이에 관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등장하는 히데코와 숙희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영화 <아가씨>는 히데코와 숙희라는 인물을 통해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루면서, 남성이 배제된 여성의 본능적 욕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성적 취향이나 본능 따위의 보편적 인류를 아우르는 선천자처럼 개별적 자아를 규정할 수 없지만, 해당 존재자 일반의 속성을 정의할 수 있는 요소의 다양성의 근거로 성별을 두는 위험한 시도를 저지르면서, 그 시도 자체에 필연적으로 함의된 바와 같이, 한 쪽의 성별을 다른 쪽의 지배 하에 놓이게 만드는 남성중심적 여성규정이 가능하다는 전통적 정신분석학과 철학적 사고관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여성을 정의하는 기준의 시발점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신체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성차별적, 근거없는 학설은 오늘날까지 정신분석학의 지류로서 강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라캉의 사랑이론에 대하여 '남성은 강박증을 앓고, 여성은 남성의 욕망이 되고자 하는 히스테리를 앓는다. 그러나 남성도 여성적이면 히스테리를 앓을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 못 미치는 이론을 철학이랍시고 이야기하는 자들마저 사랑에 대한 이론을 강의한다는 전제 하에 지껄이는 데, 요즘 유행하는 '웅앵옹 초키포키'는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가를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입증된 호르몬에 불과하다. 다수의 연과결과가 입증했듯, 성 호르몬을 위시한 남성성과 여성성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지수의 차이에 의해서 발발하는 개인적 차이를 배제한 채, 보편적으로 여성에게 남근에 대한 본능적 시기가 있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남성 정신분석학자'가 자의적인 실험을 통해 내놓은 결과를 임의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지 더 말할 수 없다. 특히 존재의 구조를 언어로 치환하면서, 논리적 차원에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라캉의 시도는 다수의 학계의 유명인사가 지적했듯, 흥미롭지도, 대수롭지도 않으며, 과학적 근거가 부재한 사이비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과학'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본인이 직접 고안한 근거없는 논리에 의거해서 발생한 결과값은 필연적으로 힘을 잃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자크 라캉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일부 인정하여,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동시에 -남근의 유무의 여부- 심리학적 차원에서 그것을 발달시키고자 시도했다면, 프로이트는 그것을 오로지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물론, 프로이트는 후기 논문에서 남성과 여성이 필연적으로 생물학적 차이를 가질 지언정, 사회적(후천적), 정신적(선천적) 요인에 의해 개인 차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입장에 놓인 필수적인 결함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지만, 여성 존재의 정의와도 같은 여성의 인식 원리를 남성의 신체 일부라는 기준을 통해서 확립하려했다는 점에서 여성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프로이트의 그릇된 사상관은 동성애를 대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동성애는 프로이트(非동성애자) 철학에서 非여성인 철학자가 여성에 대해서 규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끊임없이 왜곡을 당하는 소재다. 쉽게 말해, 프로이트의 철학에 의하면 동성애란, '선천적 요인을 거스르는 후천적 요인(가족관계)에 의해서 발발된 정신병'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히데코의 경우, 남성에 대한 피지배적 억압을 장기간 교육받았다는 점에서 남근에 대한 욕망을 잃었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철학에 의거하여, 히데코가 '어떻게 하면 야설을 효과적으로 낭독하는 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고 남성에 대한 어떠한 생물학적 반응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앞서 '자아'편에서 살펴봤듯, 프로이트의 의식이론의 세 축중 '성충동'을 담당하는 이드는 그 자체로서 선천적이며, 건드릴 수 없는 아성으로서 기능하는 데,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완전한 방향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인간 의식은 무지계(알 수 없는 세계)에 해당한다. 무지계는 선천적이며, 비가시적이다. 선천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의 특성은 임의교정불가능성이다. 본래 내가 갖고 태어난 것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의식 세계는 선천적으로 그곳에 있고, 비가시적이므로, 인간이 임의대로 교정을 할 수 없다. 일부 정신분석학자의 이론을 받아들여, 욕망을 본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본능적인 것이 선천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이란 가정 하에 욕망은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발현될 수 있을 지언정 -인간 의식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것이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은, 본래 그러한 욕망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가능하다.-,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는다.
오히려 욕망은 그것을 억제하려는 후천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생존하는 경향이 있다. 본래 그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개념의 본질상 그것은 본능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진대, 무지계에 속하는 본능은 앞서 말한대로 임의교정불가능성을 가진 것이다. 모든 상황이 그것을 억제하려고 할수록 욕망은 생존해서, 보다 강력하게 의식 속에 자리잡는 데, 이 때, 인간 의식은 그 속에 내재된 본능을 마주하게 된다. 한편, 그것은 프로이트가 지적한 바대로 후천적 요인을 상기하면서, 거세게 반발하는 과정을 겪는다.
나는 아버지에게 실망했으므로, 남성을 욕구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나는 어머니에게 실망했는 데, 왜 여성에게 위안을 찾고자 하는가. 왜 나는 이성을 사랑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에서, 동성에게 이끌리는 가.
결국 무지계(알 수 없는 세계)에 내재된 본능에 해당하는 욕망은 의식을 생존하고, 보다 분명한 형태로 인간 의식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욕망의 가장 내밀한 형태인 성적 취향은 본능의 지류로서 선천적인 것이므로 교정될 수 없다. 어떤 행위를 억제하는 것은 가능할 지언정, 궁극적으로 어떤 종류의 본능 자체를 억제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이 결심한다고 해서 변화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외려 욕망은 억압할 수록 건재함을 드러내는 경향을 지닌다. 억압을 하려고 할수록 자아는 욕망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프로이트의 동성애 이론이 옳았다는 가정을 해보자. 굳이 연역적인 추론을 도모하지 않아도, 귀납적으로 나는 그 사실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남성에 실망한 여성이 동성애자가 된다는 그의 이론이 옳다면, 진작 이곳은 남근에 대해서 실망한 여성들의 천국이 됐을 것이며, 성관계에서 탈락한 남성의 아비규환이 울렸을 것이다. 미상불 히데코란 인물은 영화에 걸맞는 극단적인 상황을 부여받았을 뿐, 성적인 억압을 교육받는 동아시아의 여자의 인생을 축소시킨 인물과 다르지 않다. 그녀가 남성을 위해 저속한 이야기를 읊는 무대는 그들이 겪는 삶을 축소한 터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여자는 가부장적인 교육이 미덕으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성적 욕구를 발현시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당연히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는 법도 그들은 배우지 못하며, 남성의 성적 충동을 장려하기까지 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성범죄의 위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있다.
지금은 종영된 JTBC의 프로그램 <마녀사냥>에서 왜 모텔비는 남자만 내야하는 가, 에 대한 토론을 했던 게 우습다 못해 여성을 비참하게 만들기까지 했던 이유는 남근을 핑계로 성적 욕구를 발현시키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남성과 달리, 한국여성은 성적 욕구를 발현시키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배우는 데, 이곳에 성평등이 도래했다는 전제 하에 그러한 토론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감히 밤에 돌아다니는 여자, 감히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감히 남자가 무서운 것도 모르고 숙박업소에 출입한 여자는 이 곳에서 '성폭행을 당해도 마땅한 여자'로 취급을 받는 것이 과연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오히려 동아시아의 여성은 '일부러 따먹지 않은 가지의 복숭아'처럼 '처녀'가 아니면 안 되는 사회에서 남성의 상상 속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 존재의 의의 자체를 거세당한다. 반면, 히데코는 다른 여자보다 남성이 여성에게 제공하는 쾌락에 대해서 보다 자주 노출될 수 있었다. 히데코가 남근에 욕망하지 않는 것은, -정신분석학자 및 라캉교의 교인들은 충격을 받겠지만 내 알바 아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오로지 남근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여성은 남근에 별 관심이 없다. 이성애자의 경우, 그것이 나의 성충동을 해소할 수 있는 객체로서의 대상으로서 욕망할 뿐, 그것이 나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마땅했으나 결여된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동성애자의 경우, 아마도 그것에 전혀,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그 자체로 남성과 같이 완전하며, 굳이 시시때때로 나를 배신하는 튀어나온 성기의 유무가 나를 정의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에 시달린 경우는... ... 글쎄,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대다수 니체 이론의 표절에 가까운, 얕은 정신분석학을 시도하면서 비교적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접근방식을 차용했다면, 라캉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깊은' 정신분석학을 시도한다는 미명 하에 그것을 '굳이' 기호논리학과 결합하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기괴한 혼종을 양산했다. 라캉이 고안한 기호를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까지 여성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규정하고,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노고에 불쾌한 감탄마저 튀어나올 정도다. 오늘 날까지, 인간을 구별하는 근거로 과학적 지식이 결여된 성별을 주저없이 들면서, 여성의 욕망, 사랑, 인식원리, 성충동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라캉과 프로이트와 같은 남성철학자에게 말하고 싶다.
제발, 좀, 모르면, 닥쳐라.
모든, 남성이 지껄이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읽었죠? 여자들은 억지로 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존재라구요."라는 하정우의 대사와 그 맥락과 영향력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몰라서 지껄일 수 있는, 같잖은 허구에 불과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남성이란 이유로 지식을 점유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아, 사회의 불평등을 발판삼아 여성을 규정하려고 하면서 창피한 줄도 몰랐던 놀라운 시도들의 일환이다.
참, 프로이트가 다수의 실험결과를 조작해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했던가?
히데코와 숙희의 성관계는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라는 데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며, 남성을 배제한 여성의 욕망실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젠더를 뛰어넘은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위를 회복시킨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후천적 요인, 선천적 요인 등의 억압을 받기 때문에 여성 상대를 대안으로 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억압의 지배 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쾌락의 형태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원초적 욕망의 형태를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유년시절부터 히데코가 성적으로 억압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면, 그녀와 숙희의 성관계는 "나는 나의 성생활의 목적을 찾을 권리가 있다." 육체적 외침과 다르지 않았다. 즉, 두 사람의 성관계Sex는 관계Relationship의 단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왜 그들이 서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과연 숙희는 어떤 인물인가?
네 애기 장난감같은 좆대가리에 내 손 올리지마.
앞서 말했듯이, 히데코가 낭송을 하는 무대는 그녀의 억압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후견인인 이모부의 협박은 그녀를 그곳에 앉히는 역할을 한다. 히데코는 생각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바로 그 무대에서 숙희는 히데코를 구출한다. 매일 히데코가 읽어야 했던 책들을 그녀는 파손시키고, 자살을 시도하는 그녀를 구출하고, 그녀를 제 욕망의 수단으로 삼았던 남자들을 피해서 그녀를 구해낸다. 이모부가 무지의 경계를 가른다고 주장한 뱀은 남성의 남근으로 대변되는 남성성을 숙희는 주저없이 파괴하면서, 근거없는 성의 경계를 부순다. 그제야 내 삶의 고난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히데코는 깨닫는다. 히데코가 '남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인형'으로부터 '삶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 되는 데, 그녀를 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마다않는 숙희라는 존재가 있었다. 오로지 본능에 의해서 동성을 사랑하며, 우연에 의해서 히데코를 사랑하게 된 숙희라는 존재가.
우리나라에서 개봉시기를 잘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강남살인남에서 비롯된 일련의 여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를 목격하면서 우리나라 여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이 만든 세상에서 결코 지지 않겠다. 나를 일상적인 공포로 몰아넣는 잠재적 가해자에게 절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 나는 당신들이 준 자유보다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일부 남성들은 이것을 '남성혐오'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이 발생한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히데코가 낭송을 하기 위해 선 무대는 그녀의 억압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일본 혹은 한국 사회에서 "여자다운 여자"로 자란 여자들이 히데코라는 캐릭터에 그토록 깊게 공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오로지 그녀의 '사랑이야기'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히데코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외하고 공감을 하기 굉장히 어려운 인물이다. 그토록 비좁은 무대 위에 서지 않았을 뿐,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남자의 성욕을 효율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자'가 되라는 주문을 여성들은 히데코처럼 은연중에 학습해왔다. 히데코가 선 무대는 동아시아라는 가부장적 국가의 축소판과 다르지 않다. 본 장의 철학자로는 라캉과 프로이트를 들었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의 국가에서 성역할의 불평등은 양성의 묵인 하에 굳어진 사회적인 문제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동아시아의 여성들은 유교의 영향 하에서 남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여성의 역할을 인내했고, 남성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히데코가 맡았던 역할의 성질은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했던 게이샤와 몹시 흡사하다. 물론, 남자들은 게이샤를 아름답다고 극찬한다. 그들이 게이샤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과 게이샤로서 얻은 결실을 숭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게이샤는 남자들이 만든 것이다. 당신들이 그들에게 남성을 위해 존재하라고 주문하지 않았다면, 남성을 위해서 미모를 가꾸고, 남성을 위해서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게이샤(기생) 문화는 이곳에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자들을 위해서 연주하는 여자를 만든 것이 남자듯이, 남자의 시선에 억압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여자는 남자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오로지 그것을 향유하는 남성들만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려들지 않는다.
물론, 히데코라는 인물이 그렇게 남성의 권력에 종속적이지만은 않은 인물이다. 히데코는 극을 이끌고, 관객을 감상한다. 완벽하게 무대에 적응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저항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 배경에는 코우즈키의 협박이 있었다. 미상불 영화 포스터에 등장한 '언제나 지하실을 떠올리렴' 이라는 문구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에게 처벌을 내리겠다'고 말하는 태도는 일부 동아시아 남성들 사이에 만연한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동아시아라는 무대에서 성적인 쾌감을 즐길 수 없도록, 오직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게 훈육된 여자들은 제 아무리 폭력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지언정, 남성이 자아낸 공포로 인해서 수동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히데코를 닮았다. 미상불 이것은 동아시아만이 안고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에게 '성'은 태생적으로 갖고 있되, 후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이곳에서 여성이 성관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여성은 부정을 저지르면 안되고, -남성이 하면, '원래 남자는 다 그래.'가 되고, 여성이 하면 '어떻게 여자가 그럴 수 있어?' 라는 시선을 받는 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심지어 여성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안타까운 부분이다.- 여성은 성욕을 조절할 수 있고, 심지어는 성욕이 없으며, 여성의 생식기는 그것의 색깔, 감촉, 형태 등에 따라서 등급이 나뉘고, 여성의 신체는 남성의 성욕을 적절하게 자극할 만큼 노출돼야 한다. 너무 많이, 너무 적게도 안된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는, 성욕은 생식기는 나의 것이되, 나의 것이 아닌 딜레마를 안은 터다. 남녀의 우열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자란 모든 여성은 어떤 면에서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자책하는 히데코를 닮았다. 처음부터 나는 욕구를 가질 권리가 없는,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 이하의 무엇일 뿐이었다.
아마도 라캉이 여성은 남성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 대상이 되고 싶어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주장한 것이 일견 옳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러한 방식으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훈육되어왔기 때문이다. 라캉같은 자들이 여성을 안답시고 나불거린 탓에 여성이 '그러한 것'으로 정의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라캉은 여성의 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여성은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저 욕망하면서, 남성의 상상을 재현하는 상상계에서 멎는 우를 범한다고. 그러한 점에서 상징계로 나아가는 남성보다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고. 그러나 다시 한 번, 나는 여성의 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온 모든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가 여자가 아닌 데 어떻게 여자를 아냐, 이 머저리, 똥개새끼야.
<아가씨>라는 영화가 갖는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성범죄의 피해자인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불쌍하다', '안타깝다'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고,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성을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대다수의 '약자의 이야기'를 한다고 나서는 남성 창작자가 여성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들의 이야기가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의 지류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편, 동성애라는 소재를 통해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많았지만, <아가씨>처럼 함부로 여성을 규정하는 남성 권력에 대한 억압을 파괴하고, 여성의 인간성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영화는 여지껏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상불 영화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한 번도, 왜 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좋아할까? 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들은 서로를 향한 애정에 이끌리는 자신들을 인정한다. 이는 동성애라는 소재를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젠더와 성적 취향을 넘어서 공감할 수 있는 소재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기쁨을 알아가는 인간에 대한 문제-로 충분히 끌어올렸다는 것에도 분명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아가씨'라는 영화가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생각하면 나는 눈을 감고 싶어진다. '찐뽀'와 '만꼬'를 발음하면서 즐거워서 웃기라도 하면 검은 장갑으로 얼굴을 틀어막혔던 히데코를 보면서 '여성다운 여성'으로 자라야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떠올리지 않은 여성 관객이 있을까.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 만일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상에 대해서 당신과 나는 직시할 의무를 갖는다. 영화는 사회의 수면 위로 돌을 던지지만, 정작 그 물에 살고 있는 것은 당신과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누구의 '아가씨'로 살고 있는 가. 만일 누군가 당신을 아가씨로 만들고 있다면, 잊지말길 바란다. 히데코와 숙희의 결정을. 이 세상에는 남성이 정의하지 않은, 나만의 자유, 그 자체라는 길이 있다는 것을.
[자료출처]
경북대신문 - 라캉이론으로 보는 성차
http://knun.net/news/pdf_down.php?no=1518&page_no=10&type=ezview
자크 라캉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D%81%AC_%EB%9D%BC%EC%BA%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