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편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실종됐다. 실종자의 아름다운 미소가 내셔널 뉴스에 등장하기 무섭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미 전역은 동정을 보낸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에게 그렇게 끔찍한 일이. 게다가 어렸을 때 누구나 읽었던 그 책의 저자들의 외동딸이라니. 사람들은 생각한다. 반드시 이 예쁜 여자를 찾아야 한다.
오직, 한 사람만 제외하고.
The search for abstract and speculative truths for principles and axioms in science, for all that tends to wide generalizations, is beyond a woman’s grasp.
과학의 격언과 원칙에 대한 추상적이고, 고찰을 요구하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폭 넓은 일반화를 향한 모든 경향에 비추어보면,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서양철학의 역사는 여성혐오에 대한 역사와 다르지 않다. 한 때, 대한민국에 생소하게 등장한 페미니즘의 정의를 논의할 때,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니다, 라는 의견이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정반대의 입장에서, 여성의 인간성에 대한 전체적, 총체적인 왜곡은 서양철학의 대다수의 철학자가 시도했던 실험이었다. 특히 서양의 정치철학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타자화되고, 남편의 소유물로 인식되고, 혹은 시민권을 받을만큼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역할을 제외하고-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게끔, 생물학적인 차원의 필연성에 의거하여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존재로 치부하는 데,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등 정치철학에 깊게 관여했던 백인 남성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대 정치철학자를 넘어선 뿌리깊은 여성혐오자, 장 자크 루소가 있다.
모든 여성혐오자의 인생이 그러하듯, 장 자크 루소의 인생은 '철저하게 여성에게 소외된 삶'이었다. 거의 부르주아 계층에서 양육된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달리, 장 자크 루소는 가난한 서민 계급의 출신이었다. 한 분야에 뛰어나게 두각을 드러낸 재능도, 부모에게 물려받을 유산도, 어떤 말할 만한 자본금도 없던 그는 13세에 시계공이 됐으며, 그마저도 -그를 비롯하여 어떤 종류의 일도- 오랫동안 이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대한 열정만은 남달랐기에 각종 소설과 철학서로 문단에 데뷔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an outcast from society 사회에서 소외된 자' 라는 별칭에 걸맞는 삶을 그는 살아야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계급 사회에 대한 그의 열등의식과 여성에 대한 책임 전가가 존재한다.
루소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각종 직업을 전전하던 사춘기 시절에 그는 우연히 Palm Sunday에서 여성 후원자, Madame de Warens 를 만나고, 그녀의 보호 하에 살게 된다. Madame de Warens는 사업이 실패한 뒤 남편인 M. de Warens과의 결혼을 취소하고, 오로지 자신의 재능에 의존해서 생활을 이어갈 만큼 당대 사상에 반추했을 때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로, 어린 루소가 철학자가 될 수 있게끔 교육하고, 그를 위해 직업을 구해주었으며, -그러나 루소는 그 직업들을 대단히 싫어했다.- 살 곳을 그녀는 마련해주었다. 루소의 자서전 <Confession>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보면, 어느 날, Madame de Warens는 그를 침대로 인도했는 데, 그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은 연인이 된다. 물론, Madame de Warens는 고상한 취향을 가진 귀족계급이었고, 어떻게든 루소와 결혼할 의사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훗날 Madame de Warens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연상태를 옹호하는 루소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게 되는 볼테르의 이론에 맞서서 그녀가 루소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이론도 있지만, 판단은 각자의 몫에 맡긴다.
루소의 집요할 만큼 광적인 저술활동에 대한 충동의 결말을 다 푸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단, 여성혐오와 관련된 그의 저술활동의 주요 내역을 잠시 살펴보자.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루소가 발견한 사회 불평등의 기원은 '언어에서 비롯된 자본을 위한 욕구'였다. 그 글에서 루소는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유대관계에서 비롯된 언어가 보다 완성된 소통의 형태를 갖추어나가게 요구하고, 이에 따라서 나와 너의 구분이 발생하고, 종국에 그것은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구분하는 욕구로 발전해서, 종국에 인간은 종족을 위한 측면에서 보다 완성된 형태의 자연 상태를 포기하고, Society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평등 상태와 자유를 계급에 헌납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루소는 <사회계약론> 등 일련의 저술 활동을 하면서, 인간이 겪는 비극의 길목에 그릇된 교육이 서 있음을 발견한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자유가 없음을 시사한 <사회계약론>과 같은 해 출간된 <에밀>에서 등장하는 그의 요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Once it is demonstrated that men and women neither are nor, and should not be, constituted the same, either in character or in temperament, it follows that they should not have the same education.
우선, 성질과 성격의 차원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구성되지 않았고, 그래선 안된다는 게 증명이 된다면, 그들이 동일한 교육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과연 어떤 종류의 교육이 남성과 여성에게 바람직한 것일까?
Boys want movement and noise, drums, tops, toy-carts; girls prefer things which appeal to the eye, and can be used for dressing-up-mirrors, jewelry, finery, and specially dolls. The doll is the girl’s special plaything; this shows her instinctive bent towards her life’s work. Little girls always dislike learning to read and write, but they are always ready to learn to sew.
남자아이가 활동적이고, 소음과 드럼, 높은 곳들과 장난감 카트를 원하는 반면, 여자아이는 남들이 보기 좋게 자신을 치장하는 것을 선호하며, 이에 대해선 거울, 보석, 화려한 옷, 특히 인형 따위가 있다. 인형은 여자아의 특별한 놀이기구다. 이것은 그녀가 평생동안 해야 할 일에 대한 본능적인 경향(끌림)을 드러낸다. 소녀들은 늘 읽거나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바느질하는 것을 배우기 위한 준비는 갖추고 있다.
이토록 그릇된 사상의 근원이 어디일 지, 끊임없이 여성으로부터 소외당한 루소의 삶을 상기하면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여성의 교육이 없고선 루소가 철학자가 될 길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같은 견지는 배은망덕하기까지 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과연 한명의 남성 철학자가 의도한 대로 여성은 규정되어야 할까. 답을 내리기 위해서 영화 <나를 찾아줘> 속 에이미의 독백을 인용하고 싶다.
You think I let him destroy myself and live happier than ever?
No fucking way.
그 남자가 날 파괴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내버려둘 줄 알았어?
지랄하지 마.
What opinion are we to form of a system of education, when the author (Rousseau in Emile) says...‘Educate women like men, and the more they resemble our sex the less power will they have over us.’ This is the very point I am at. I do not wish them to have power over men, but over themselves.
교육의 체계에 대해서 우리가 형성하는 의견은, <에밀>의 저자 루소에 의하면, '여성을 남성처럼 교육시켜라. 점점 더 여성이 우리의 성별을 닮게될 수록, 그들이 우리에게 갖는 힘은 보다 약해질 것이다.'*(하단에 적시).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할 말이 있다. 나는 그들(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점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힘을 실행할 수 있길 바란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페미니즘의 가장 강력한 지류를 형성한 철학자,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그의 저서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을 통해 여성의 이성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억압하는 남성에게 폭발적인 저항의식을 드러내면서, 특히 루소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I want to steer clear of an error that many writers have fallen into, namely giving women instruction that has beenappropriate for ladies. . . . (중략) But Rousseau and most of his male followers have strongly maintained that the whole tendency of female education ought to be directed towards one goal—to make women pleasing.
수많은 작가들이 저지른 실수, 즉, 여성에게 숙녀로서 적절한 교육을 갖추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피하고 싶다. 그러나 루소와 남성동료들은, 보다 '남성을 기쁘게 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만 여성을 교육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울스턴크래프트에 의하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명백하다. '힘'이다.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 귀결된 차이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바 없는 우열을 규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자연 상태에서 발발한 차이에서 더 나아가, 일부 남성 작가는 여성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오로지 사랑에만 치중된 삶을 사는 매력적인 정부로 드러내는 등, 그들의 인간성을 고의로 삭제하기에 이른다. 여성의 성적매력에 이끌리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여성의 역할을 남성을 유혹하는 데 고정시키고, 그들이 보다 고귀한 목표를 위해서 정진하는 것은 미연에 막는다. 그 결과, 남성의 그릇된 교육 하에 자란 여성은 잘못된 토양에서 자란 식물처럼, 굉장히 건강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갖추게 된다. 여자는 남자의 눈에 예쁜 존재로 자라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여성이야. 라는,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는 그 교육이 그들의 불행을 설명한다.
장 자크 루소가 여성을 가정의 중심으로 규정하면서 자녀 양육의 의무를 지우고, 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가시적인 것만 좇는 생물로서 여성을 섣불리 규정한면서, -정확히 매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지적한 부분이다.- 여성의 개인성을 삭제하는 전체적인 시도를 한다면,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철학계에서 끊임없이 자행되온 남성의 여성을 향한 성적대상화, 일반화로부터 개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체를 규정하는 편견을 해체하는 것을 시도한다. 물론, 장 자크 루소가 어머니나 여자 형제를 경험한 적도 없고, 거의 유일하게 그를 받아들인 첫 여자의 교육이 아니었다면 그가 철학자가 될 수도 없었다. 당연히 여성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인 매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더 합리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소를 비롯한 유럽의 남성 철학자는 그 꼴을 두고볼 수가 없었다. 장 자크 루소부터 로맹 가리까지, 여성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유럽의 백인 문인들은 여성에게 '여신이 되어달라. 아름다워 달라. 나를 위해서!' 라고 지껄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게 진실로 여성을 위한 길인 것처럼. 가증스럽게도.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남성중심적인 사회다. 여성은 사회에 참여할 만큼 이성이 없다고 치부했던 남성을 향해, 그녀는 남성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것, 여성의 폭력적인 어투를 고수한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양자를 향한다. 그녀의 것도 예외는 아니다.
In fact, it is a farce to call any being virtuous whose virtues do not result from the exercise of its own reason.
페미니즘이 철학이 아니다, 라는 주장에 대해서 페미니즘을 대학에서 수업한 나로서는, -심지어 두 명의 남성철학과 교수에게 배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다. 첫째, 정치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거나, 둘째, 쉬운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여성을 피해망상에 걸린 동물로 취급하면, 모든 게 편해지는 그, 역사적으로 입증된 길말이다. 그리고 그 길은 너무도 오랫동안 많은 남성이 걸어왔다. Those ‘instructive’ works regard woman (in true Moslem fashion) as beings of a subordinate kind and not as a part of the human species. 여성을 인간의 한 종류가 아니라, 종속된 존재로 규정하는 그 '교육적인' 작업들에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포함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어머니도, 여자 형제도,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도 없는 환경에서 여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주장한 그 버릇없는 남성철학자의 그 저작은 오늘 날까지 철학계의 '필독도서'라고 불리고 있는 지경이다. 함부로 유식한 척 지껄이는 것은 무지한 자들의 특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것은 -심지어 '고전'으로 추앙받는 것은' 과연 한 사람이 갖고있던 무지만의 책임일 지 나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여담 삼아 말하자면, 일평생 여성의 이성을 옹호하던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은 훗날 유명 남성 작가와 결혼을 한 뒤, 자신의 저작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으로 등장한 작품을 읽은 사람들은 '어린 여자가 이렇게 글을 잘 쓸리 없다'고 반응했고, 때 아닌 남편의 대필 논란에 그녀는 사후까지 시달려야 했다.
참,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의 이름은 매리고, 그녀가 결혼한 남성 작가는 그 유명한 '퍼시 셸리'였으며, 그녀의 문단 데뷔작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She’s(Amy) someone who can play any role that she wants, from the Cool Girl who men want to hang around with, to the woman men are afraid of. She’s willing to kind of go there. That was what was at the center of Amy. It’s basically nothing. It’s someone who is made of a bundle of stories pulled together over the years.
영화 <나를 찾아줘>를 논하면서, 소설 <Gone Girl>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찾아줘>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에 대해서, 한 때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를 취미삼아 분석했던 나로서는 박장대소를 금할 수 없었다. 데이빗 핀처가 감독한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의 원제는 <Gone Girl 사라진 소녀>로, 미국의 미스테리, 스릴러 작가인 길리안 플린은 그 데뷔작부터 끊임없이, 여성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는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저항을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 드러내면서 남성적 사회에 규정될 수 없는 개인의 인간성을 드러내고자 시도한다. 한편, 남성적 사회의 피해자로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내세우는 게 그녀의 작품에 주요한 특징으로, 1인칭 화법과 3인칭 화법을 적절히 이용해서 인물의 내면을 다각도로 비춰서, 비극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게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ㅆ다. 특히, 세 번째로 출간된 소설 <Gone Girl>은 Over 130 weeks on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 List, 37 weeks at #1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130주 이상 올랐으며, 37주동안 1위) International Author of the Year, 2013 (National Book Awards, UK) (2013년 영국의 내셔널 북 어워드 선정 올해의 세계 작가) 라는 형용할 수 없는 쾌거를 이루면서, 스릴러 소설로 페미니즘을 소재로 상업성과 문학성을 양편에 잡았음을 보여줬다.
모든 훌륭한 작가는 동일한 주제를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되, 매 번 색다른 소재를 이용한다. 길리안 플린이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그녀의 데뷔작인 <샤프 오브젝트>에서 여성성을 강요하는 가정에서 소외된 주인공이 자신의 해소할 데 없는 공격성을 내면화하는 관찰자를 내세운다면, <다크플레이스>가 약자로서의 남성에 내재된 수동성을 부각시키면서, 어떻게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일반화가 개인의 가정에서 비극을 발생시키는 지에 대한 역사적인 추적을 한다. 한편, <나를 찾아줘>는 금발의 예쁜 여자로 대변되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해서 미국 사회가 고착시킨 수동적 이미지, 순응성 등의 타자화 그 자체에 대한 완전한 해체를 시도한다. 쉽게 말해, <Sharp Object>에서 <Gone Girl>로 발전하는 메세지, 끊임없이 완벽한 여자로 묘사되는 주인공이 제시하는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남자의 입맛에 맞는 여자로 나를 규정하지마. 그렇게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길리안 플린은 작품 전반에 걸쳐서 극단적인 성미의 여성상을 제시한다. 나는 화가 나 있다. 나는 공격적이다. 나는 폭력적이다. 나는 남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1인칭 화자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의 공격성이 향하는 방향은 한결같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그것을 대하는 방법은 다를 지언정, 남성중심적인 사회다.
억압받은 상태에서 기른 분노의 창구로 폭력을 이용하는 인물은 극단적으로 기형적인 미국의 남성중심적 사회를 꿰뚫 수 있는 창과도 같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는 길리안 플린의 작품 세계 내내 던지는 메세지 중 하나다. 남성은 성욕이 있고, 여성은 성욕이 없다, 남성의 취향에 맞춰서 쿨한 척 하는 여성은 멋있다, 등의 미국 사회를 쥐고있는 왜곡된 사상에 길리안 플린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의 주인공(개인)을 통해서 저항을 시도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 번만 더 나를 '부드럽고, 온화하고, 상냥하고,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자로 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 처절한 외침을 두고 한국의 남성 관객은 '역시 여자는 악녀야. 결혼은 하지 말아야 돼.' 라는 교훈을 얻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찾아줘에서 결혼을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은 관객들은 영화의 은근한 어법에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 그것도 여성의 공격성을 이용한 페미니즘의 구현은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 전반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며, 길리안 플린 그 자신이 페미니즘의 지류에 속하는 작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길리안 플린의 작품 전반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또 있다.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남성중심적인 사회는 남성을 위한 게 아니다, 라는 점이다.
길리안 플린은 남성적 사회에서 길러진 극단적인 폭력성에 대비되는 수동적인 공격성을 지닌 약자로서의 남성 인물을 늘 작품에 등장시킨다. 결국, 한쪽 성별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는 사회에서 어떤 개인도 완전하게 승리할 수 없다, 는 그녀의 작품세계가 발전하면서 보다 세련된 형태를 갖추어나가는 데, 특히 <Gone Girl>은 남성적 사회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남성의 이야기를 제시하고자 했던 전작과 달리, '일견 수동적이고, 나약하고, 쉽게 여성에 겁을 먹고, 본래 악한 천성을 지니지 않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여성의 처우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남성적 악'의 완성된 전형으로서 닉 던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남자가 어린 여자랑 바람도 피울 수 있고,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의 책임을 아내에게 돌릴 수도 있지. 결국, 아내가 살고자 원하는 방향은 무시하고, 자기가 편한대로 아내의 돈으로 시골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것도, 결국 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잖아.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면 시부모랑 관계도 좋아지고, 안 그래? 그러니까... ... 에이미가 나쁜년 아냐?
반드시 장편소설을 만드는 데 지켜야 할 법칙을 한 가지 꼽아보자면, 보다 완성된 형태의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서, 보다 완성된 형태의 악인을 만들라는 것이다. <나를 찾아줘>에서 악인은 에이미고, 주인공이 닉 던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에이미라는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닉 던이라는,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어떻게 발전됐는 지 전혀 관심없는 평범한 미국 남성이라는, 비가시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 지 알 수 없는, 보다 완성된 형태의 남성적 악인을 통해서 어떻게 주인공이 그 악을 극복해나가는 지 보여준다. 마치 거울 속에 등장한 또 다른 자아로서의 상대를 드러내는 왜곡된 거울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창작한 이러한 캐릭터는 그녀의 데뷔작인 <Sharp Objects>부터 <Dark Places> 등의 플롯을 이루는 주요 인물로서 등장해왔다. 만일 당신이 거의 모든 남성관객처럼 예외없이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작가가 거의 모든 작품에 걸쳐서 세련되게 드러낸 그 점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믿고있는 바에 해당 이야기를 비추어서 스스로의 왜곡된 신념을 강화시키는, 흔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을 뿐은 아닐까.
물론, 영화 <나를 찾아줘>는 관객의 감상이 성별에 따라서 몹시 차이가 난다는 평을 듣는 영화다. 그러나 만일 남성관객인 당신이 닉 던에게 이입하고, 에이미를 악녀로 치부했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닉 던은 물 흐르듯 사회에 몸을 내맡긴 채 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 지,그로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평생동안 저항해서 싸워야 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평생 에이미가 자신을 타자화하려는 남성들로부터,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회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힘껏 타인을 가장할 동안 말이다. 이처럼 권력구도에 의해서 사회를 대하는 성별의 관점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남성과 여성의 이중관점을 통해서 제시하는 문학작품은 <나를 찾아줘>외에도 다수 있다.
그러나 <나를 찾아줘>가 특별한 이유는, 에이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이다.
<Gone Girl>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또 한 축으로서의 에이미를 분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에이미가 쓴 거짓 일기는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고백하듯,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입맛에 맞춰쓴 또 다른 자아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길러진 여성이란 궁극적으로, 남성의 환상의 산물임을 꼬집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길리안 플린은 에이미를 통해서 그 모든 것에 서슴지 않고 역겨움을 고백한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다. 금발이건, 갈색머리건, 예뻤건, 아니건, 여성은 인간이다. 그 중에서 에이미는 정신적 폭력을 당하고, 삶을 침범을 당하면, 어떻게든 생존하는 법을 익히는, 인간 그 자체였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이란 수단마저 거침없이 사용할 준비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겪어온 삶이 평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 ...그러므로, 당신도 어메이징 에이미에 걸맞는 남자가 돼야한다.'는 것을 에이미도 남성에게 일러주긴 했지만.
한편, 영화 속에 은근하게 제시된 또 다른 층위의 언어가 있다. 바로, 닉 던의 가정사다.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에는 흥미로운 인물에 대한 철학이 등장한다. 즉, 어떤 인물도 '그러한' 부모가 없고서야 '그 지경'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다 축소된 형태로 드러나긴 했지만, 닉 던의 어머니는 상냥하고, 온화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축이었다면, 닉 던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고, 여성에게 공격적이라는 점이 닉 던과 마고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소설 속에 보다 분명하게 제시되는 이 부분은 영화에서 사건 중심의 플롯이 완성되면서 보다 은근하게 그 위치를 점하는 데, 인물을 이해하기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데 더 없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어떻게 '에이미'라는 인물이 탄생했는 가, 를 생각해 보자. 평생동안 에이미는 '자기 자신은 부족하다'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나로서는 부모를 만족시키는 데 충분치 않다, 어메이징 에이미를 나는 이길 수 없다, 는 감각이 그녀를 지배한다. 미상불 길리안 플린에 등장하는, 비극적 사건의 단초를 제시하거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주인공은 거의 모두 이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또 다른 나를 가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처럼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에서, 모든 사이코패스적 캐릭터가 저지른 행동의 책임은 반쯤 부모로 대변되는 가정, 즉 최소 단위의 사회의 창작물이라는 메세지를 시사한다. 결국,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그처럼 개인적이고, 사소하며, 폭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곳, 가정이라는 것이다.
닉 던도 다르지 않다. 평생동안 어머니를 향한 폭력을 저지른 아버지를 그는 닮고 싶지 않다.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그는 무한히 동정을 느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를 닮게 마련이다. 그 지독한 폭력의 굴레에서 마고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르는 축에 속하기로 결정하면서 남성의 폭력을 피하고, 타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우위를 점하는 여성이 된다면, -에이미를 향한 마고의 성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닉 던은 그저, 수동적인 남성상을 택한다. 매사를 물 흐르듯 흘려보내는 평범한 미국 남자로서 그는 자신을 보호한다. 어딘 가에 내재된 여성을 향한 공격성으로부터, 아버지를 닮고싶지 않다는 그 지리멸렬한 욕구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한편, 이러한 닉 던의 성미는 미국 사회가 주장하는 '나쁜 남편'의 누명을 쓰게 되기 더 없이 적절한 터가 된다. 미상불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에는 언제나 미 전역 사회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나쁜 오빠', '나쁜 남편' 따위가 등장하는 데, 이는 그만큼 미국이 제시한 가부장적인 사회가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가장 끔찍한 일이 발생한 순간,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은 남성을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 폭력적이고, 악독한 "남자"란 생물이 또.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는 여성이 창작하고, 남성에게 덧씌운 '역차별'의 굴레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남성이 자기 자신에게 씌운 함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남자는 바람도 피울 줄 알아야 돼. 우리 엄마가 아픈 데, 넌 며느리가 돼서 그 정도도 못해줘? 여자는 마르고, 예쁜 게 최고지. 왜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아?" 의 그 정신적인 폭력에 대한 댓가는 -정확히, 닉 던이 에이미에게 저지른 폭력- 보이지 않는 덫이 돼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되고, 종국에 남성 스스로를 옭아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데지 콜링스가 자신의 고급 취미를 위시한 성적인 환상에 에이미를 투영시킨 댓가로, 그 타자화된 여성의 손에 죽음을 맞게되는 것처럼, 닉 던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낳은 또 한 명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길리안 플린이 작품 전반에 걸쳐서 '남성중심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수동적인 남성'을 드러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어떤 성별을 다른 성별의 우위에 둔다는 행위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작품은 제시한다. 심지어 '닉 던'처럼 훌륭하게 미국 사회에 적응해서, 쿨한 여자를 만나는 것을 개인적 영달로 취급하는 남자조차 말이다. 길리안 플린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남성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닉 던과 같은 남성의 변주 인물은 끊임없이 창작했고, 그에 대비되는 여성을,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 데 여성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등장시킨다. 실은, <Gone Girl> 이전에, '(남성의 폭력에 의해서) 실종된 여성들 중에 예쁜 여성에 대한 수사는 빠르게 이뤄지고, 그렇지 못한 여성에 대한 수사는 진척이 느리다.'는 것도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주요한 변주 소재였다. 이 역시 에이미를 비롯한 길리안 플린의 작품세계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초점을 맞추는 부분으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의 인간적 가치는 그 외모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에이미의 카메라 너머의 남편을 바라보는 냉담한 눈길은 남성 관객의 전신에 아찔하게 소름이 돋게 만드는 역할을 동시에, 악인을 향한 차디 찬 경고와도 같은 것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 자칭 남성 철학자는 말했다.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페미니즘은 일반화를 시도한다. 아니, 페미니즘은 그 모든 성별을 근거로 시도한 일반화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학문이다. 페미니즘을 두고 피해의식이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떤 종류의 개인적 피해의식도 전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머멘텀을 얻을 수 없다. 언제나 권력의 혜택을 누리는 자,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폭력의 가해자는 말한다. 당신의 상처를 잊어라. 어차피 득이 되지 않는다. 결국, 미래를 보는 게 좋지 않느냐.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로 투영된 과거의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페미니스트는 개인의 상처를 마주 볼 용기를 내야 한다. 매리 울스턴크래프트가 겪은 사회는 지독하게 남성중심적이었다. 약 두 세기가 지난 후, 길리안 플린이 겪은 사회가 그러했고, 내가 겪은 사회가 그랬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나는 글을 썼다. 만일 여성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면, 이처럼 역사적이고, 일관적이되, 다층적인 지류를 형성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나를 찾아줘>는 양성의 관객에게 공감대를 확장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적 요소를 일부 삭제하는 대신,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탓에 원작소설이 제시하는 메세지가 보다 은근하게 제시된 측면이 없잖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히 성별이 고착한 편견에 규정된 인류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것, 이 영화 <나를 찾아줘>를 비롯한 페미니즘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이다. 과연 영화의 중반부, 남성의 성적환상을 집대성한 '날씬하고, 아름다운, 금발여자'라는 자아의 근원을 향해서 에이미가 최종적 파괴를 시도하는 것에 아찔한 전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폭력은 여성이 남성에게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적합한가, 아닌가는 적절한 논의거리가 아니다. 감히 길리언 플린의 작품을 샅샅이 읽었던 인간으로서 말하자면, 어떻게 한쪽 성별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회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삶과 가정과 종국에 사회를 기형적으로 물들게 하는 지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원작자의 의도대로 잘 본 것이다. 정말로 <나를 찾아줘>의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한가? 영화도 좋지만, 소설을 읽어라.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그 메세지 그대로. 참, 시간이 없다고? 괜찮다. 영화 후반부, 닉 던과 에이미의 진실을 곁에서 관찰한 남자의 입을 통해서 저자는 할 말을 다했으니까. 그러니까,
JUST DON'T PISS HER OFF.
그 여자를 화나게만 하지 마라.
*저자 주:
루소는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What is most wanted in a woman is gentleness…A man, unless he is a perfect monster, will sooner or later yield to his wife’s gentleness, and the victory will be hers. 여성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온화함이다. 만일 남성이 완벽한 괴물이 아니라면, 그의 아내의 온화함에 머지않아 항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리는 그녀의 것이다. 글쎄, 현대의 여성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 아내가 남편에게 승리하기 위해선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참고사이트]
http://www.huffingtonpost.com/2014/09/26/gone-girl-premiere_n_5891804.htmlhttp://www.
womeninworldhistory.com/lesson16.html
http://www.patheos.com/blogs/faithpromotingrumor/2010/05/feminism-and-the-social-con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