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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Jan 23. 2018

당신은 악인 가, 한나 아렌트



 마침내 악인이 체포됐다. 인류는 그를 심판대에 세웠다. 최악의 인간이 있는 곳에서 나는 최고의 선善을 발견하고 싶었다. 악인의 심판을 통해서 세워지는 정의를 목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류가 고요히 분노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예상했던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악이 없었다.


 




 1906년 독일, 유대교 중산층의 집안에 외동딸이 태어났다. 독일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유대교 가족에서 자란 그녀는 유대인으로서 거의 스스로를 자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성인이 된 그녀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무의식 속에 잔존해온 정체성을 직면하는 동시에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최초의 자각이었다. 개인의 삶 속에서 벌어진 참극의 씨앗은 시대로부터 불어온 바람의 잔해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지 않아, 20세기 초 유럽을 뒤덮는 정신의 전염병이 발병한다.


 나치였다. 


 1939년 8월 1일, 아돌프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명령한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시작될 즘, 이미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홀로코스트는 그 장렬한 분노를 총공한다. '인류 청정'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한 참혹한 살해 현장에서, 가장 무익하고, 의미있는 폭력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외동딸은 가까스로 수용소를 살아남는다. 프랑스로 도망 친 그녀는 머지 않아 그토록 동화되고 싶었던 국가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무국적자. 독일 태생의, 독일의 학교를 다녔고, 독일의 철학을 배웠던 유대교 집안의 여자에게 그 사실은,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국적이 없는 존재로 방황한다. 또 다시국적을 얻기까지, 약 18년의 세월이 흐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50년, 길고 긴 무국적자 생활을 종결짓고, 나치의 횡포를 피하고자 꾀했던 대부분의 유럽인 지식인들과 함께 그녀는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나치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역사상 최악의 악인 중 한명인 그의 재판 장소, 재판 과정, 재판의 의의를 두고 각지의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소란스러운 논의가 한창인 때, 뉴욕에서 교수직을 역임하고 있던 한 유대인은 조용히 뉴요커에 편지를 보낸다. 해당 잡지에 기고를 위해서 재판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였다. 독일에서 온 천재 철학자의 뜻을 뉴욕의 가장 권위있는 잡지는 받아들인다. 그렇게 악을 향한 역사 인식의 전례없는 전복은 예루살렘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예상 외의 광경이었다. 가족과 친구, 민족을 잃어야 했던 유대인이 발견한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참극이었다. 아니, 그곳에는 그녀가, -누구나- 기대했을 '권선징악'은 없었다. 악인은 끊임없이 악을 모른다고 주장했고, 희생자의 지도자는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때, 재판관은 물었다.


- 당신은 그 일을 행할 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악인은 대답했다.


- 물론, 생각했죠.


 그 순간, 철학자는 악의 참상을 발견한다. 





우리는 악을 대체로 초자연적인 어떤 것
즉 사탄의 체현으로 봤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이런 깊이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는 사유할 능력이 없었다



 한나 아렌트의 영화를 논하면서 그녀의 개인사도 빠뜨릴 수 없다. 미상불 영화에서 그녀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테제로서 등장한다. 몹시 가늘고, 길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이어지는 교수와의 관계 속에서 제자는 그녀가 배운 바를 눈 앞의 진실과 결합시키고, 스스로의 정신에 깃들었을 지 모를 편견을 모색한다. 그 중에 하나는 '존재자와 생각의 불가분성'이었다.


 20세기 초,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개념의 판도를 뒤짚는다. 기존의 존재는 존재자를 차등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존재자는 존재를 담고 있는 터다. 존재는 존재자 속에 깃들어 있고, 존재자를 존재하게 만드는 무언가다. 즉, '존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떻게 존재가 존재하는 가?' 가 존재론을 탐구하는 학자들의 관심사였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탐구가 존재자와 그 외의 존재하는 것들(사물)의 존재성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의 존재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다르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사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언뜻 데카르트 철학과 유사해보이는 이러한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 점이 있다. 데카르트는 존재의 근거로 사유를 든 반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사유를 동일선상에 둔 것이다. 존재가 무엇이건, 인간은 그 어떤 존재하는 것과 달리 독창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 존재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즉, 우리는 왜 존재하는 가. 어떻게 존재하는 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가.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를 하면서, 사유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그렇게  사유라는 끈을 쥐고 존재와 관련하여 다음 단계의 논의로 인류를 이끈다. '실존(existenz)의 탄생이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복은 한나 아렌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주인공은 하이데거의 강의를 수강한 뒤,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과 열정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사유와 (존재자의) 활동성이 하나가 되는, 열정적인 사유라는 개념이 내가 보기엔 섬뜩하다.' 즉, 한나 아렌트는 사유야말로 인간과 非인간을 가르는 척도임을 인정한다. 사유하지 않는 것은, 비록 존재할 지언정,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마치 사물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치, 본인은 견고하게 세워진 관료주의 속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불과했다고 자백하는 악인처럼 말이다.


 이러한 담론은 공직자의 질문을 금지시키는 형태의 국가 통치를 경계했던 임마누엘 칸트의 일침을 떠올리게 만든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저작을 통해서, 만일 국왕이 -칸트가 생존했을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체제의 국왕 체제였으므로- 최소한 공직자가 자기 업무에 대해서 질문을 하거나, 회의를 던지는 권리조차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명분을 위해서 압제를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도 정당화를 얻을 수 없는 시대적 폭력에 불과하다고 계몽주의의 아버지는 역설한다. 미상불 그러한 체제를 향해서, 혹은 체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회지도자를 향해서 '회의를 담은 질문'이 하위 계층의 허락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대로 시스템 속에서 사물로 전락할 것이다. '사유'를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영화 말미에서 근원적인 것은 오직 선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악은 극적으로 치닿을 수 있되, 인간 본성의 근원에 닿지는 못한다. 악惡이란, 지나치게 선한 자에 대항하는 것, 거대한 이상이 전복을 당했을 때, 이기적인 발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그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사유가 부재한 상태'에서 발현되는 부정적인 현상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존재의 당위성을 습득하고, 즉, 긍정적인 형태로 발생하는 여타의 감정과 다르다. 국내에는 '악의 평범성'이라 번역된, 한나 아렌트가 명명한 the banality of evil은 인류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인간과 퍽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국가에 저항하기를 포기했고, 시대 속에서 절망을 습득했으며, 주어진 직무에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 상태는 언제나 우리에게 발발할 수 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의 그 달콤함은, 세계 속에서 사유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계급 속에서 명령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받는 자본주의의 관찰자라면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간단하다. 인간은 사유하며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유를 포기한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만일 '옳고, 그름'이 전복된 사회에서, 그 사유를 허락받지 못한 상태일 지언정, 폭력을 가하는 주체와 타협을 위한 모색조차 하지 않는다면, 사유하지 않고 시스템 속에서 순응을 해버리는 것 또한 시대를 탓할 수 없는 '광대'의 범죄라고 한나 아렌트는 결론을 내린다. 나치 붕괴 이후, 아이히만은 도주를 위해서 약 10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이 교수형을 당한 이후에도, 오늘날 인간은 역사의 악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추적을 하고 있다. 과연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것은 누구였을까. 한 시대에 칼집을 낸 악인이었을까, 국가에 희생된 역사였을까. 혹은 나와 다르지 않은 개인이었을까. 오로지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도 증인의 선서를 읽는 "평범한 악인"의 목소리는 울려퍼진다. 



[참고자료]

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https://www.google.co.kr/search?ei=XRNmWuuSGMi38QWdqapo&q=hannah+arendt+new+yorker&oq=hannah+arendt+new+yorker&gs_l=psy-ab.3..35i39k1j0i203k1l3j0i30k1l6.87655.91060.0.91131.24.22.0.0.0.0.235.2461.1j13j3.17.0....0...1c.1j4.64.psy-ab..7.17.2456...0j0i131k1j0i10k1.0.-JtUYj7UH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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