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성차별주의자를 사랑할 때
롭 마샬 감독에겐 그 명성만큼 잊고 싶은 기억이 많다. [게이샤의 추억]이 개봉했을 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던 배우와 중년 남성의 로맨스를 그리는 바람에 소아성애 논란을 겪었고, 같은 영화에서 '여성의 처녀성을 경매에 붙인다'는 설정으로 오리엔탈리즘에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으며, [나인]이 개봉했을 땐, 남성 감독의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데 일련의 여성들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장면을 '가엾고, 매력적인 남성의 방황'이라는 Context컨텍스트 내에서 정당화를 시도하는 바람에 여성혐오자라는 낙인까지 들어야 했다. 이 글은, "여성과 섹스하는 것을 사랑하는 여성혐오자"에게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반성하게 만드는 한 여성을 집중해서 귀도를 재해석하는 것을 시도한다.
"희대의 카사노바이자 영화 감독인 귀도와 그를 둘러싼 7명의 여인들이 선보이는 환상의 쇼!"
구글에 나인을 검색하면 등장하는 영화 소개의 첫 문장이다. 그 문장이 말하듯, 영화 [나인]은 방황하는 남성 감독이 일련의 여성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만 놓고 보면, 원작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원작이 '자기 자신에 갇힌 감독'을 표현하기 위해서, 초반부부터 강렬한 폐소공포증의 상황과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허공의 이미지를 차용한 꿈을 통해서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에 성공하는 동시에 펠리니의 창의력에 감탄하게 만드는 반면,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표현하는 귀도는 그저 여러 차례의 성공 끝에 제멋대로 영화를 만들어도 되는 감독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기색이 강하다. 즉, 페데리코 펠리니의 귀도가 진심을 다해서 '작품'을 만들고 싶은 데 실패만 거듭하는 감독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성에게 의존을 한다면, 롭 마샬의 귀도는 여성을 만나고 싶어서, 그가 말하는 대로 '그저' 욕심이 많아서 성공을 바탕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중년 남성에 그칠 뿐이다.
두 명의 귀도는 남성 감독이 재기하기 위해서 여성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 펠리니의 귀도가 여성과 진심으로 섹스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제 아무리 주체적인 여성도 남성의 성적 욕구를 풀어주는 도구로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온 것은 명백하다. 단, 펠리니의 귀도는 '여성에게 의존하는 남성'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남자는 지독하게 불쌍하다' 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롭 마샬의 귀도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기분이다.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여성에게 기탁하여 해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남자가 가족과 친구에게 거짓말을 거듭하며 섹스를 하면서 영감을 갈구하는 모습은 왜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배우가 저런 역을 선택했는 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참고로, 두 영화 사이에 약 '7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있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쪽에 성차별적인 메세지가 짙은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 이후로 롭 마샬 감독의 뮤지컬 영화에 팬이 됐던 나는 엉성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나인]이 개봉했을 때부터 정확히 십년간 이 영화를 주기적으로 관람했다. 제 아무리 귀도의 시선에서 주조된 환상 속에서 현란한 춤과 노래로 표현된 그녀들의 존재가 "창부"와 "상처받은 여성", "어머니" 역할에 분류될 지라도, 그 속에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이성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가장 내밀한 욕망을 내가 귀도에게 투사시켰기 때문일 지도 모르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속에 일말의 여성 중심의 서사가 깃들어있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근, 귀도의 아내 역할(상처받은 여성)을 맡았던 마리옹 꼬띠아르가 영화 산업에 남녀평등을 기대할 순 없다면서,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을 더욱 분리시킬 뿐이라는 발언을 한 것을 발견했을 때, 기이하게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나인의 또 다른 캐릭터가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 상처받은 아내 역할을 맡은 루이자와 달리, 정작 그 남편이 성적으로 접촉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던 그의 뮤즈이자, 감히 그조차도 범접할 수 없던 선망의 대상인 '클라우디아' 였다.
영화 [나인]에서 각 여성 캐릭터는 최대 2번에 이르러, 귀도의 환상 속에서 뮤지컬 영화 형식에 걸맞게 각자의 캐릭터가 표현하는 시그니처 무대를 선다. 예를 들어, 클라우디아와 정확한 대비를 이루는 루이자는 바람을 피우는 유부남에게 상처받은 아내를 표현하기 위해서, 귀도의 환상 속에서 남성 집단이 환호하는 동안 스트립쇼를 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Take it all' 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커리어, 가족, 인생, 모든 것을 희생시켜야 했던 그녀가 여전히 바람을 피우고, 거짓말을 하는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가져가라'고 울부짖는 것이다. 그런데 일견 여성 서사에서 등장할 법한 이러한 설정은 루이자가 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무대 위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창녀가 되면서 그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 감독인 귀도가 루이자를 영화 관계자만이 참여하는 스크린테스트에 초대한 뒤, 그가 신인 배우였던 루이자와 나눴던 대사를 다른 여성 배우들과 꾸준히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양심의 가책없이 보여주는 장면에 의해서 촉발된다. 그리고 루이자가 알게 된 순간, 귀도가 변명을 늘어놓는 현실 속 장면과 교차편집이 되면서 여성 관객이 아내가 느끼는 배신감에 깊게 이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래의 하이라이트에서 루이자는 남성 집단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치는 것을 피하지 않듯 도망치고, 도망치듯 피하지 않는 긴장 어린 희롱에 적극적으로 당하는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주장하며, 관객석에 앉은 귀도를 향해서 가슴을 풀어헤쳐 보여줄 때, 왜 여성, 그것도 정숙하고, 충실한 아내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해서 창녀의 이미지를 차용해야 했는가, 에 대해서 나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그녀의 스트립쇼가 정점을 향해 치닿는 것이 아내가 남편을 포기할 때 느끼는 감정과 어떤 종류의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심정적 노드nod 가 컨텍스트context와 서브-텍스트sub-text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을 도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아내는 남편을 포기하기 위해서 '창녀'로 분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루이자가 주목을 받아야 마땅한 독무대에서, 마리옹의 신체는 남성의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드러난다. 어떻게 하면 루이자를 가장 매력적인 창부로 드러내게 할까, 고민한 흔적이 그녀의 독무대 전반에 역력하다. 이름 모를 남성들은 그녀의 신체를 쥐기 위해서 싸우고, 그녀가 보여주는 장면들에 흥분하여 달려든다. 그리고 귀도는 관객석에 앉아서 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쇼가 끝나고, 현실 속 루이자는 귀도를 떠날 것을 암시한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라고 체념하듯 루이자는 귀도의 존재론적 바탕에 욕심이 결부되어있음을 이해한다. 그의 욕심에 희생된 아내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또 다른 여성 배우들이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여성 배우에 투사하여 깨닫고 나서야 자신의 존재가 남편에게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는다. 즉, 더 이상 남편에게 '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가 아니라 더 이상 남편에게 줄 게 없기 때문에 루이자는 그를 떠나게 된다.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심을 채우기에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영원한 욕심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비교했을 때,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남성의 욕심에 희생되는 아내를 창녀로 부각시키면서, 루이자는 매우 설득력없는 캐릭터로 전락한다. 왜 아내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만났을 때 '상처입은 모습'만 부각돼야 하는가? 왜 아내는 남편에게 모든 것을 주고 텅 빈 상태로 퇴장해야 하는 가? 그리고 왜 그 여성은 '아내로서 상처입음'을 '창녀'로 표현될 수 밖에 없었을까? 일련의 합리적인 질문에 롭 마샬은 대답하지 못했고,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라고 단언했던 마리옹 꼬티아르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정숙하고, 조신하고, 남편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알지만, 결국 그의 환상 속에서 창녀로 전락하는 아내 역을 맡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한국 남성 영화평론가가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다'는 외신 기자들의 문구를 앵무새처럼 답습하며 해당 영화를 평가하는 동시에,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공감대 형성이 실패한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평소에 페미니즘을 영화 전면에 내세우거나, 페미니스트 요소가 차용된 영화에 꾸준히 참여했던 배우, 니콜 키드먼의 경우는 어땠을까? 미상불 그녀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파 앤드 어웨이,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등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라면 누구나 맡고 싶어하는 영화에 주연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스텝포드 와이프, 매혹당한 사람들, 스토커 그녀의 커리어에 손해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꾸준히 남성 가부장제를 비판하거나, 페미니즘적 요소를 차용한 영화에 출연했으며,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성공시킨 커리어를 기반으로 아쿠아맨, 디스트로이어 등 최근에 개봉한 영화까지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UN Women Goodwill Ambassador이기도 한 그녀는 경력이 부족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여성 영화인들과 작업하는 행보를 보여주며, 명실상부 할리우드에서 페미니스트 롤모델을 맡고 있는데, 이같은 행보의 배경으로 페미니스트로서 신념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대답할 만큼 페미니스트적 신념이 강한 여성 배우로 손꼽힌다. 톰 크루즈와 22살 때 결혼한 이유로 '할리우드에서 남성들에게 성추행을 당하기 싫어서 권력을 지닌 남성과 결혼했다.' 라고 고백하면서 자기 자신의 신체 결정권에 대해서 확고한 주관을 드러냈을 때, 할리우드는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줄만 알았던 여성 배우'가 일으킬 파문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니콜 키드먼이 영화 [나인]에 출연했다는 것 자체가 평론가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롭 마샬의 커리어 중 가장 여성혐오적인 영화라고 평가받는 [나인]에 니콜 키드먼은 왜 출연을 결심했을까? 그것도, 왜 '영화계에만 존재할 법한 완벽한 여성'을 상징하는 '클라우디아' 역할을 맡게 됐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클라우디아로 출연했던 이유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은 가장 페미니스트적 시선을 갖추는 게 요구된다.
할리우드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서사를 연출할 때 '상대역'의 여성 캐릭터를 세 가지 카테고리 중 하나를 기반으로 창작한다. 바로, [창녀, 어머니, 동료] 다. 서로 겹치는 요소를 갖고 있을 지언정, ex) 창녀인 어머니, 어머니인 동료, 동료인 창녀 등. 이와 같은 분류에 해당되지 않는 여성 역할은 거의 없다. 그리고 언뜻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클라우디아'는 창녀의 배리에이션에 해당하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미상불 클라우디아는 연기력이나 커리어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그녀의 섹슈얼한 매력과 고혹적인 자태에 대해서마 남성 캐릭터에 의해서 끊임없이 찬양을 받는다. 미디어에서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느라 너무나 바쁜 나머지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하지도 않았던 그녀가 마침내 후반부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객들은 귀도가 주시하는 카메라 너머의 시선 속에서, 거의 처음 등장하는 클라우디아의 미적 형상에 놀라서 숨을 멈추는 한편, 그 예고된 완벽함을 평가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다고 칭송받은 클라우디아에게 주름이 있어서도 안되고, 머릿결이 나빠서도 안되며, 여성으로서 몸매나 비율에 흠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니콜 키드먼은 그 모든 비판적인 시선을 물리칠 만큼, 상업적으로 완벽한 여성을 연기한다.
시나리오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 귀도는 무작정 영감을 얻기 위해 클라우디아를 카메라 앞에 세운다. 미상불 클라우디아는 전반부에서 드러나지 않을 지언정, 끊임없이 귀도에게 시나리오를 요구했고, 캐릭터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귀도를 포함한 남성 제작자는 '클라우디아만 있으면 돼!'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점으로, 귀도는 파파라치를 피해서 달려간 유럽의 뒷골목에서 클라우디아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데...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는 남성이야. 이기적이고, 욕심에 찬 남성이지.
그런데 그 남성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이 네가 되어주면 좋겠어.
"모든 것을 욕심내는 나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한 번쯤 예술계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남성 예술가가 했을 법한 공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상은 종종 '뮤즈'라는 변명 하에 여성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형태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예술가에게 본인의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앞세우는 것은 위험이 크다. 그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나인]은 영화감독이 뮤즈를 찾는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에, 실제 감독이 '뮤즈'를 갈망하는 내적 시선이 캐릭터 속에 더욱 관통됐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가와 동일한 직업을 가진 캐릭터는 '페르소나의 주형'이고, 그가 하는 대사는 '페르소나의 주물'이라면, 이와 같은 '페르소나'를 중심으로, 굉장히 기이한 형태의 관통이 세 남자를 지나간다. 롭 마샬과 영화 속 귀도, 귀도가 창작하고 싶은 남성 캐릭터가 그에 해당한다. 물론, 클라우디아는 귀도의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그것이 귀도의 페르소나임을 눈치챈다. 그리고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역할은 영화 속 현실의 층위에서 자신임을 눈치챈다. 귀도는 클라우디아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너는 이탈리아를 만든 뮤즈야. 이탈리아는 남자들이 만든 국가지. 그리고 그 남자를 여자가 통제하는 거야!" 그러나 이렇게 남루할 만큼 여성혐오적인 아이디어를 자신있게 꺼내놓으면서 출연을 요구하는 남성 감독에게 클라우디아는 분노하지 않는다. 단. 그녀는 부드럽게, 그러나 날카롭게 일침을 날린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아니, 여자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 클라우디아는 귀도를 사랑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상한 방식 대로 In a Usual Way' 클라우디아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 일러주듯,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나는 너를 사랑했다.' 고 그녀는 노래한다. 너는 나의 친구였으며,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에는 무언가 중요한 게 결여되어있다. 그것은 '결말에 대한 희망'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In a Usual Way는 다른 여성들의 노래처럼 귀도를 향해 보내는 사랑의 노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각자의 지독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와는 결이 다르다. 차라리 이것은 사랑했던 남자에게 보내는 장송곡과도 같다. 노래가 끝날 때, 클라우디아는 귀도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면서, '보고싶을 거야.'라고 말한다. 도무지 여성혐오적인 사상을 버릴 수 없는 남자에게 '인간'이 되고 싶었던 여성은 마지막 예의를 담아서 작별 인사를 보낸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이성애자 여성이 "클라우디아의 딜레마"를 경험할 것이다. 이 세상에 '가부장제'를 경험하지 않는 남성이 거의 없다는 전제 하에, 여성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성차별주의자 남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이와 같은 고민은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 사안의 심각성이 짙다. 모든 것에 욕심을 부리는 귀도는 예외적인 남성상이 아니다. 대부분 가부장제에 오염된 정신을 가진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이해하지 않거나, 그러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고, 동료가 그를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마도 클라우디아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자, 함께 일했던 영화감독,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귀도는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귀도에게 클라우디아는 여전히 '그 클라우디아 The Claudia' 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부드러운 미소, 차분한 말투 등 여성에게 부여되는 수동적인 미덕을 소중하게 지키면서 남성의 애환을 달래주고, 성적인 매력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영원히 남성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 ...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
결국, 언젠가 마리옹 꼬티아르가 창녀로 분해서 온 사방에 옷 가지를 풀어헤친 독무대에서 클라우디아는 단 한 가지를 벗는다. 바로 그녀에게 '여신성'을 부여했던 가발이다. 노래가 끝날 즘,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본래 모습이 되어 말없이 귀도를 내려다본다. 마치 이러한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듯, 이것이 나라고 선언하듯. 그리고 클라우디아는 제 아무리 그녀가 성차별주의자인 남성을 기이한 방식대로 사랑했지만, 그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를 떠나는 쪽을 선택한다. 아마도 그러한 클라우디아를 통해서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터닝포인트를 귀도가 경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면서 귀도가 다른 여성들과 섹스를 이어가는 것은 진정 그가 원하는 대상인 클라우디아를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클라우디아는 감독이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삼은 애첩 중 한 명이 되기엔 지나치게 권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범접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정신적 장애를 다른 여성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감독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던 뮤즈는 관객의 기대와 어긋나게 그의 인생에서 퇴장하는 쪽을 선택한다. 동시에 가장 상업적인 매력을 표현할 줄 알았던 클라우디아는, 단 한 차례도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은 채 자신의 무대를 떠난다.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도, 감독의 뮤즈도, 여신도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말이다.
해당 글을 쓰기 전, 나는 '한국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남성 평론가들이 <나인>에 대해서 작성한 글들을 꼼꼼이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는 글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영화는 귀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글의 초점은 귀도에게 맞춰져 있었다. 초점이 집중된 것은 때로 다른 인물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한 뮤지컬 평론가의 글은 나를 기가 막히게 했다. 그는 해당 영화가 관객과의 공감대를 상실했을 지언정 여성들은 '훌륭한 볼거리'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자신에 차 평가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휴식같은 여인', '농염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 '창작의 샘이 막혀 구원의 손길을 원하는 귀도에게 관능적인 노래로 유혹하는 여인' 등 그 남성 평론가는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각 여성 배우의 매력을 어떻게 참신하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 에 골몰하며 여성들의 신체만 탐닉하듯 바라본 것 같았다. 심지어 주디 덴치 조차 '귀도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여성으로서, 소아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정서적 불안을 해결해주는 장치로 전락했다. 아마도 최선을 다해서 역할을 소화했을 이들은 '아찔한 매력을 지닌 성적 욕구 해소의 도구' 로 드러났다는 자체로 한국 남성 평론가의 시선에서 인간은 아니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여성주의를 커리어 내내 주장해온 니콜 키드먼까지 '서 있는 그 자체로 여신의 우아함을 보여준, 고개의 위치를 바꾸는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매력'을 발산했다는 평가를 들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니콜 키드먼이란 배우를 제대로 이해했고, 그녀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캐릭터에 공감했다면, 아니, 적어도 그녀가 불렀던 노래에 의미가 있었다면, 이것은 정확히 니콜 키드먼이 '클라우디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과 정반대의 해석이다. 과연, 한국 남성 지식인들은 롭 마샬의 <나인>이 왜 저평가를 받았는 지 이해는 하고 있을까? 더 이상 펠리니건, 그 어떤 감독이건, 여성을 섹스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그치는 영화는 등장해선 안 된다는 인식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니콜 키드먼'이란 여신 앞에 침을 흘리는 남성 관객만이 존재할 뿐이다.
지금,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남성에게 매력적인 여성'이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영화 [나인]에서 드러난 것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남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몹시 피곤한 일이다. 영화 나인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귀도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거나, 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요컨대, 이곳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전부 다 귀도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바를 각자 상징화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이 "남성"이라 허락받은 욕구는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며,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는 것이 롭 마샬이 의도하지 않았고, 페미니스트가 이해했던 이 영화의 결말은 아닐까? 도대체 정숙한 아내와 아찔한 애첩과 정신적 지주와 영원한 뮤즈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주제에 '남성의 욕구'를 본인의 안위보다 먼저 둔다면, 당신의 인생은 루이자에 가깝겠는가, 클라우디아에 가깝겠는가?
롭 마샬의 경력 중 가장 여성혐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만큼, 영화 [나인]을 읽는 법은 현실과 뗄래야 뗄 수 없다. 마리옹 꼬티아르는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킬 뿐이며, 여성과 남성은 본래 다른 존재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20세기에 등장할 법한 '갇힌 성관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여성이 롭 마샬이 원하는 대로 창녀로 전락한 아내를 표현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반면, 페미니스트임을 끊임없이 주장했던 니콜 키드먼은 그러한 남성 감독이 범접할 수 없는 뮤즈로서 그를 거절하는 역할을 맡는다. 지금, 당신이 되고 싶은 것은 '남성의 욕구에 희생을 당한 뒤 창녀로 표현되는 아내'인가, 감히 그가 범접할 수 없을만큼 높은 위치, '동등한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는 뮤즈인가? 남성 권력에 순응하여 자신의 신체를 도구화하는 것은 꽤 매력적인 선택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성들은 절대로 그렇게 행동한 '결과'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숙한 아내의 이미지', '남성에게 순종하는 여성의 미덕' 등 "이미지"에 대한 찬양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뿐이다. 같은 영화인데,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한 여성과 페미니스트임을 주저하지 않고 밝히는 여성이 선택하게 된 역은 다음과 같다. 남성의 시선에서 주조된 이미지에 자기 자신을 억지로 욱여넣고, 뒤늦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성과 그 남성을 거절할 줄 아는 여자가 그것이다. 남성의 욕구를 운운하며 상처를 주는 남편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뒤, 'Take it all'을 외칠 것인가, 그가 범접하지도 못하는 대상이 돼어 'In a Usual Way'를 부르며 떠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물든 남성이 여성을 향해서 자신의 지적인 우월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참교육"에 나서겠다고 거들먹거리며 주장하는 결론과 달리, 니콜 키드먼이 클라우디아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은 놀랍게도 그와 정반대의 것이다.
바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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