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과거를 마주보지 못하는가?
어린 아이들은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오직, 그들은 두려움을 밟고 일어섰다. 그렇게 그들은 어른이 됐다.
약자의 비명은 날카롭고, 더 강하다.
스티븐 킹의 작품세계는 간단하다. 그것들은 세가지 부류 중 하나로 나뉜다. 스릴러, 미스테리, 호러 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장르를 위한 장르'는 없다.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IT에서 '빌 덴브로우'라는 작가 캐릭터로 보여주는 '서사 그 자체를 위한 서사'라는 본인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IT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스티븐 킹의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메타적 페이소스(독자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장치)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먼저, 이곳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의 설정을 살펴보자.
- '창녀'라고 소문난 여자아이.
- 뚱보라고 놀림받는 전학생.
- 말더듬이.
- 유대교 랍비의 아들.
- 남성 동성애자인 안경잡이.
- 항상 어딘가 아픈 천식 환자.
- 흑인.
기존의 주류 미국 장르소설에서 볼 수 없는 조합의 캐릭터는 소설가에게 거대한 장벽을 예고하듯 서사 위로 붉은 풍선처럼 떠오른다. 그들은 약자고, 희생자의 역할을 주로 도맡으며,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의 예상을 깨고, 힘을 합쳐 초월적인 악인 '그것'에 대항한다. '그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린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어른들은 볼 수 없을만큼 순수하게 '악의 존재'를 믿는 이에게만 현신한다. 혹시 '그것'이 다시 등장하면, 어린 아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모여서 '그것'을 무찌르겠다고 약속한다. 비록 무섭고, 두렵고, 힘들고, 겁이 나더라도 말이다.
스티븐 킹의 IT:Chapter2는 원작 소설처럼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미국사회의 전형적인 폭력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알 수 없는 미국의 남성들은 단순히 동성애자를 봐서 기분이 더럽다는 이유로 'Faggot호모' 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정당화된 폭력을 그들에게 저지른다. 그리고 이것을 페니와이즈라는 이름의 'IT'이 받는다. 폭력을 시작한 것은 미국 사회지만, 피해자를 끝장내는 것은 악의 근원 그 자체다. 미국 사회의 보수적인 남성들이 폭력을 저지른 동성애자의 목숨을 끊는 것이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설정은 '악의 근원은 불가해하다.' 라는 스티븐 킹의 가치관을 봤을때 의미있다. 이번 화는 'IT'이란 존재가 드러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스티븐 킹의 소설 전반에 드러나는 세계관을 주목해본다.
우선, 스티븐 킹은 한국 남성이 피해자를 대하는 정형화된 논리에 속지 않는다. "모든 남성이 그런 건 아니니까 O, O, O, OK!"를 이효리처럼 외치는 한국 남성들과 달리, 스티븐 킹은 정확하게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보수의 병폐를 몇십년에 걸쳐서 소설 전반에 드러낸다. 특히 그는 '보수'라는 이름 하에 가부장적인 남성과 그러한 사회에 기대서 약자를 괴롭히는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다. "너희들은 가정 내에서 여성을 탄압했고, 거리에서 동성애자에게 폭행을 저질렀고, 학교에서 약한 자를 괴롭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지 않았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정확한 판단과 사실적인 묘사로 미국 사회가 등장시킨 서열에 독자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진 바람에 지나치고 말았던 폭력의 진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도대체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처럼 지독하게 잔혹한 악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독자로 하여금 던지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 스티븐 킹의 소설을 여타 공포 작가와 다르게 만든다. 문제는 현실적이되, 근원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현실적인 문제 의식의 속에서 미국 사회가 외면한 약자가 있다. 스티븐 킹은 미국 내 주류 문화가 외면한 그들을 인식의 구석에서 끄집어내어 전면에 내세운다. Chapter:2 에서 '실패자 클럽'이 'IT'을 무찌르는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 것이 미국 인디언 '쇼코피와 족'처럼 말이다. 최근의 '아웃사이더'에 등장하는 인디언까지, 스티븐 킹은 백인 남성 주류 작가답지 않게 끊임없이 미국 사회 내 '인디언'의 존재를 상기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단 한번도 그가 창조하는 악은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은 적 없었다.
그러므로, IT을 이해하기 위해선 스티븐 킹의 시선에서 서사를 바라봐야 한다. 지금까지 그는 60여권의 소설을 통해서 권력을 탐욕하고 죗값을 치를 줄 모르는 미국 사회를 대변하는 남성들의 더러운 뱃속과 흔히 싸이코패스라고 불릴만큼 역겨운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주목했다. 그동안, '외계인', '마법', '그것' 등 끊임없이 새롭게 창작하는 제3의 존재를 통해서 스티븐 킹이 미국 사회 그 자체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반감을 표현한 것은 종교인이 갖고 있는 왜곡된 욕망의 근원을 적확하게 꿰뚫는 시선을 그가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IT은 그가 약 50년 전부터 미국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동성애 혐오, 인종차별, 여성탄압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대하는 것을 보여준다. IT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인물들의 설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 당시 미국 문학에서 주로 피상적인 차원에서 '약자'로 그칠 법한 캐릭터를 그는 문제 해결의 전면에 내세우거나, 적어도 '캐릭터'를 제공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스티븐 킹 작품 세계 전반에 걸친 메타적 페이소스,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선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서열 내에서 더 약한 자를 악용하는 인간들을 향한다. 아니, 스티븐 킹은 사실상 가장 천재적인 방식으로 가부장적인 남성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신의 노릇을 문학 속에서 자처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IT'이란 존재를 발견 -혹은, 발명?- 한다.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통해서 스티븐 킹은 기존의 호러소설계 고루한 논쟁을 끝낸다. 그는 선과 악을 서사에서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 그렇게 분명하게 선을 긋기 위해서 그는 악의 정당화를 다른 작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에서 찾는다.
바로, IT(설명할 수 없는 악의 근원)의 존재다.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과거를 마주보는 용기
IT은 단순히 '악의 근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광대밖에 안되는게!' 라는 말에 주눅이 드는 것처럼, 진심으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는 '실패자 모임'의 주축들의 말에 작아지는 것처럼, 그것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현실적인 차원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먼저, 그것은 '나쁜 기억'을 의미한다. 결코 어른이 되서도 치유하지 못한 채 묻어두는 쪽을 선택한 기억, 말이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어린 시절처럼 자기방어기제는 고맙게도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현실의 방향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단단하고, 높은 벽을 세운다. 그 기억을 마주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강할수록, 보다 회피성을 띌수록 벽은 보다 강력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실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기억은 여전히 오도가도 않은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때, 보다 약한 인간일수록 쉽게 허물어진다. 마치, 그 벽처럼.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IT'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명사 'IT'에 과감하게 작가는 함축시킨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졌던 이들이 어떻게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공포영화의 법칙대로 '이렇게 하면 끝이 나겠지!' 라는 방식은 보기 좋게 주인공들과 (관객들을) 배신한다. 마이크의 설명대로, 그들은 '집단 의식'을 통해서 페니와이즈를 무찌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다. 그 이후가 중요하다. 과연 '믿는 구석에 발등이 찍힌 이들'은 어떻게 문제를 극복하는가? 내 생각처럼 일이 흘러가지 않았을때, 인간은 어떻게 그 상황을 마주보는가? 페니와이즈가 보란 듯이 부활하고, 어린 아이로 돌아간 어른들은 각자의 기억에 갇히게 된다. 계속 함께일 줄 알았던 그들은 따로 떨어져서 Chapter:1 에서 드러난 최악의 상황을 마주 보게 된다. 때로 그것은 죄책감, 혹은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나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괴로움을 주는 상황들이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 상황, 그 자체였을까?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를 크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면, 1986년에 발간된 IT은 단연코 초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986년에 출판된 소설을 2019년에 영화로 보면서 나는 '샤이닝'에 등장했던 알콜중독 호텔 관리인이 미치광이로 변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떠올렸고, 미저리의 애나가 소설의 줄거리를 제 마음에 들게 바꾸겠다고 사람의 다리를 전기톱으로 잘랐던 것을 떠올렸으며, 닥터 슬립에서 어린 아이를 악용해서 본인들의 이득을 취했던 이들이 얼마나 뻔뻔하게 굴었는지 떠올렸다. 그만큼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는 반복되는 페이소스의 패턴이 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피해자에 공감하게 만들고,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함께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적어도 소설이 끝날때까지- 악은 언제나 거기에 있어야 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 꾸준히 등장한 것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악의 근원을 무찌르기 위한 약자들'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소설, '언더더돔'과 '아웃사이더'에서 그랬듯이, 작가는 메타적인 악을 표현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차원의 악인을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복되는 약자의 패턴처럼 강자의 것도 존재한다. 바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하수인처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수인들은 늘 어떤 선을 넘고 만다. 처음에는 강자에 대한 두려움, 혹은 권력에 대한 욕심, 개인적인 복수에서 시작했던 일이 악에 대한 집착으로 변모한다. IT 시리즈에서 헨리 바워스가 점점 더 IT의 속삭임에 미치는 나머지, 스스로의 내면에 잠재된 악을 극단까지 끌어올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고 어린 아이들을 살해했던 싸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그것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아웃사이더'의 교훈을 떠올렸다. 남들이 보면 지나치게 약해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평가를 듣게 만들만큼, '무조건 보호주의'를 외치는 그 한심한 가정교육탓에 자기 자신의 힘을 스스로 얕잡아봤던 홀리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친다.
"만일 당신이 또 다른 설명을 듣는다면,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요. 어떻게 사이코패스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후기로 갈수록 '컬트'에 가깝게 변하는 그 'IT'의 존재를 스티븐 킹은 정말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수십년동안 그가 출간했던 작품을 관통하는 스티븐 킹의 서사의 이면에는 '이 세상에는 마법이 있다.' 는, 언젠가 그가 아들에게 책의 서문을 통해 보냈던 메세지가 지반처럼 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소설은 단순히 미치광이 늙은 천재 작가가 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변해서는 안된다. 바로 그 점을 위해서, 우리는 스티븐 킹의 신념을 배신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장르 소설이 아니다. 스티븐 킹은 서사를 통해서 메세지, 교훈을 던지고 있다. 바로 그 메타적인 페이소스가 독자로 하여금 그의 소설을 이해하지 않되, 감동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래서 홀리는 진심을 다해서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악한 행위 너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원인'이 있을까요? 그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건, 과학적인 질병이건,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것들을 무찌르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과연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두렵게 만들었던 바로 그 적일까? 아니, 그 적에게 대응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수치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을 하게 만들고, 기억을 지우게 만든다. 헨리 바워스는 페니와이즈나, 스티븐 킹 작품세계 속 여타의 다른 악인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것들은 악에 집착했고, 제 할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저편에 서 있는 이들과 우리는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할 일은 단순히 사사로운 욕망에 집착하느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자들이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 속에서 'IT'이 초자연적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음'이다. 결코 우리는 싸이코패스나, 머리 위에 내려오는 돔이나, 광대 분장을 한 악의 근원이나, 마을 사람으로 분장할 수 있는 초자연적 악을 통제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것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특성을 띄고 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 용기를 내기 위해서 선을 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IT은 보여준다. 만일 IT이 여타의 공포소설과 다른 게 있다면, 단순히 공포를 주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공포에 대한 감각'을 수단으로 삼아서 '희망'이란 목적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거의 언제나 '어린 아이', 아직 순수하기 때문에 어른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 악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약자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겁을 먹은 나)와 존재하지 않는 것(미치광이 광대)의 존재적인 특성을 고의로 서사 속에서 왜곡시킨 이유다. 현실에서 미치광이 광대는 존재하지 않지만, 스티븐 킹은 '마을 사람 전체를 오염시킨 외면의 병' 따위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동시에 현실이었다면 쉽게 용기를 낼 수 없었을 어린 아이들이 서사 속에서 두려운 것을 직면하는 것으로 그것이 실은 가능한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IT에서 페니와이즈가 패배하는데 이유가 있다면, 이미 각자의 '(마주치기 무서운) IT'을 가진 우리에게 충분히 용기를 낼 자격과 권리,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IT을 읽으면서 전에 볼 수 없는 캐릭터를 통해서 스티븐 킹이 이 소설을 정말로 애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빌 덴브로우'다. '호러 소설 작가'로서 가진 신념을 빌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는등, 수많은 부분에서 빌은 스티븐 킹 그 자신과 몹시 비슷하다. 스티븐 킹은 호러 소설 작가인 빌을 '실패자 클럽'의 리더로 세우면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소설을 쓰면서 나약했던 나 자신과 화해를 했다면, 다른 아이들도 충분히 그 과정을 손끝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직감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2019년 리메이크 영화에 추가된 쇼코피와 족의 유물이란 소재를 통해서 과거의 상징물을 구하는 장면은 영화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캐릭터를 다루는 구성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내용의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 또 있었다. 나쁜 기억밖에 없는 어린시절,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좋은 기억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악몽같진 않았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떠올리며, 좋지 않은 기억밖에 없었다, 고 종종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치 '실패자 클럽'에 친구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만일 그들을 한데 어우러지게 만든 연대가 없었다면, 그 '좋은 기억'이 없었다면, 애당초 그들은 데리로 돌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혼자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그들은 피해자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고, IT을 물리쳤다. 마치 맹세의 장면처럼 연대한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가졌고, '좋은 순간'을 가질 때 서로에게 의지했으며, 그것을 갖게 될만큼 '좋은 사람'인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모두가 스스로 만족스러울만큼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패자 클럽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자살한 이가 있다. 바로, 스탠이다. 영화에서 그것을 그리는 과정은 소설처럼 유려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화는 스탠이 죽기 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지막 나레이션으로 띄우면서, 그의 죽음에 영화 속에서 반복된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장치를 부여한다. 스탠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 영화 말미에서 그는 '두려움'을 고백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용기를 내고, 문제를 극복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한, 헨리 바워스 역시 '어린 아이'로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희생된 '피해자'라는 점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폭력의 연쇄작용, 늘 보다 더 약한 피해자를 향해서 돌아가는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 스티븐 킹이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을 끊어내지 못한 채 악에 굴복하는 이야말로 또 다른 악이 된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악을 대하는 방식이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의 과거를 극복하고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된다. 스탠은 노력했다. 적어도, 그것이 전부였을지언정, 그는 노력을 했다. 악에 굴복한 헨리 바워스와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스티븐 킹의 소설과 안드레스의 영화는 바로 그 '정말로 중요한 문제를 마주보지 못할만큼 겁을 먹었지만, 저마다의 용기를 낸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할 몫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재밌어요, 소설이 재밌어요?
우선, Chapter: 1의 경우, 소설처럼 흘러가지 않는데 무척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할 만한 왜곡이었다. 실제 소설은 어른이 된 이들이 마이크의 전화를 받고 Derry로 돌아가는 과정과 어린 시절을 교차편집하면서 길게도 보여준다. (약 400페이지에 걸쳐서 보여준다.) 제 아무리 극악무도한 러닝타임을 고집한 리메이크 영화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상 그 모든 과정, -베벌리의 폭력적인 남편에 대한 대응과 스탠의 아내가 그의 자살을 알게 된 경위-처럼 홀린 듯이 읽게 되는 것을 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Chapter:2는 보다 더 원작에 가깝다. 전편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각자의 비밀이 교차편집을 통해서 생동감있게 드러난다. 한편, '페니와이즈'라는 이름을 가진 'IT'이 매 순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나오기 때문에, 보다 그 공포영화 특유의 감각을 제대로 살린 안드레스 감독의 실력이 빛을 발한다. 스티븐 킹이 인물의 감정 묘사에 지나치게 세세하게 공을 들였던 초반 소설과 달리 2019년에 리메이크된 영화는 보다 더욱 흥미진진한 음악과 짧은 박자로 활동성있고, 빠른 전개를 약속한다. 또한, 단순히 '페니와이즈'를 봤기 때문에 무섭다, 는 피상적인 설명을 넘어서 영화는 보다 짧은 시간에 'IT'이 어린 아이들의 삶을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를 각자의 약점을 통해서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베벌리의 경우, 그것은 아빠에게 저항하지 못했던 나, 빌의 경우,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던 나, 리치의 경우, 동성애자로서 다른 친구들을 무서워했던 나, 가 그에 해당한다. 즉, 그들은 단순히 '광대'를 봤기 때문에 겁에 질린 게 아니라, 광대라는 소재로 연결된 어른의 나와 어린 아이의 나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을 회복하는 것, 그 자체에 겁에 질린 것이다.
그러므로, 페니와이즈가 보다 무서운 형상을 할수록 어린 아이들의 용기는 강해진다. 언젠가, 어린 시절에 나를 용서하지 못했던 어른들은 뒤늦게 기억을 마주하면서 진정한 성장을 이뤄낸다. 더 이상 'IT'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악용해서 모습을 바꿀 수 없다. 아무리 그가 변신을 거듭해도, 진정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어린 아이들, 마침내 궁지의 끝에 몰린 바람에 진심을 다해서 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외에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을만큼 절박한 이들의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외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공포영화의 끝은 잔혹하다. '다음'을 약속하기에 그렇다. 지금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속편을 예고하는 감독들의 잔인한 방식때문에 영화가 끝나도 공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한번 더, 스티븐 킹-안드레스의 영화는 금기를 깬다. '우리는 실패자들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라는 어린 아이들의 힘있는 나레이션을 마지막으로 사상 최악의 러닝타임과 수없이 끔찍한 호러CG를 보여준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음은 없다. 그리고, 없어야 한다. 아니, 우리의 손으로 없앨 수 있다. 스티븐 킹은 바로 그 '어린 아이가 보여줄 수 있는 작지만, 거대한 용기의 힘'에 인류가 전진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기대를 건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을 건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실은 실패자 클럽의 아이들같은 약자였음'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작고, 더러운 비밀들'을 가졌던, 힘 있는 이에게 덤비지 못했고, 악성적인 소문에 내가 다치게 내버려두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었던 바로 그 어린 시절의 구석을 가진 어른에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는 것을 그는 일러주고, 그러므로 악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법없이 우리를 안내한다. 언제나 실패한 지점에서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성장'이다. 여타의 공포서사와 달리, 약 60권이 넘는 소설을 통해서 그가 말한 것은 늘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스러운 장면은 밤에,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있을때 발생한다는 금기를 넘은 것처럼 돌이켜보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기억해?"
1990년도 원작 영화에서 마이크는 전화를 돌리기 무섭게 그것부터 질문한다. 얼마나 네 인생을 기억하고 있어? 그동안 회피하지 않았어? 외면하기만 했던 것이 돌아온다면, 이제 어떻게 할거야? 마이크의 전화는 우리가 묻어둘 수 있을 줄 알았던 과거로부터의 연락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끔찍한 종류의 성장소설이다. 단순히 공포영화기 때문에, 광대가 나와서 사람들을 죽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보라.' 는 메세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과연, 절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느 날로부터 연락을 받는다면, 당신은 겁이 날 지언정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떠날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스티븐 킹의 공포서사의 끝에는 늘 소수자의 권력을 위해서 희생된 '실패자들을' 향해서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적인 메세지가 붉은 풍선처럼 무시할 수 없을만큼 밝게 떠오른다. 그리고, 당신이 망설이는 동안, 페니와이즈의 풍선은 핏빛의 시한폭탄처럼, 언제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