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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Mar 26. 2017

왜 가상현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

인간 신체의 유한성을 담보하는 현실의 유일성에 의해서


 모든 기술은 그 기능을 발달시킬수록, 현실을 보다 그럴 듯하게 모방하는 데 그친다. 이 때, 나는 현실이란 단어를 신체가 서 있는 터로 규정한다. 신체를 정의하는 성질인 유한성에 의해서 신체는 보편적인 한계를 안은 채 탄생한다. 가상현실은 그러한 신체적 한계가 담보하는 유한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를 제공한다. 그러나 신체 이외의 것을 통해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글을 쓰는 과정을 살펴보자. 연필을 쥐고 글을 쓰는 것은 필연적으로 키보드로 쓰는 글보다 진심이 담겨있다. 만일 이 진심이란 감상적인 단어를 해체한다면, 거기에는 '최초의 생각'이라는 게 드러날 것이다. 오로지 내게 주어진 것을 통해서만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데, 하필 연필을 이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필은 신체가 원하는 그 행위하는 데 방해를 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주먹을 쥐듯 연필을 쥐고, 현실에 존재하는 종이 위에 나는 거침없이 생각을 적어나갈 수 있다. 물론, 그마저도 오랫동안 쥐고 있으면 손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단점은 있다. 그러나 완벽한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는 궁극적으로 발달된 형태를 갖춘 기술로 봐도 무방하다. 반면, 키보드는 이용하기에 보다 복잡하다. 키보드를 치기 위해선, 어디에 어떤 글자가 있는 지 익혀야 한다. 즉, '연습'을 해야 한다. 어른이 돼서도 독수리타법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어른들은 키보드라는 매체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임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만큼 키보드가 빠르게 친해지기 어려운 물품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모니터에서 발산하는 빛은 눈동자 깊숙이 파고들기도 한다. 절대로 이 빛을 영원히 버틸 수 있는 안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연필과 종이라는 매체가 내가 글을 적는 데 유한한 자유를 준다면, 모니터와 키보드는 무한한 한계를 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폰이 크기를 키우기 무섭게 판매량이 급감한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아이폰 6+ 가 나온 후, 나는 그 기계의 이용자들이 하나같이 그들이 손목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미상불 그러한 통증은 스마트폰 세대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인간의 신체를 무시한 갖가지 스마트폰이 주는 통증을 '일상적'인 것이라 치부하면서 외면하고 있을 뿐, 정작 우리의 신체는 -눈, 어깨, 목, 허리, 손목, 손가락 등-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절대로 아이폰의 크기만은 키우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절대로 미적인 특성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인류의 신체를 무섭게 침범하고 있는 데, 바로 ''다. 가장 집중의 힘이 필요할 때, 스마트폰은 신경을 흐뜨려놓고, 뇌를 대신한다. 스마트폰을 든 인간은 뇌를 외부에 맡겨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한다. 편의성을 용의성으로 오도한 나머지, 기술의 원인과 결과가 흐트러진 전형적인 결과다. 과연 인간이 컴퓨터에 들어가서 사회가 따라간 건지, 사회가 컴퓨터에 들어가서 인간이 따라간 것인 지 알 수가 없다. 문 밖으로 몇 발자국 나가는 게 귀찮다고 스마트폰을 든 순간, 다른 일을 하느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경험한 바는 대부분의 스마트폰 이용자에게 있을 것이다.

 한편, 가상현실(VR)은 신체가 서 있는 터 위에(above) 부유한다. 현재 가상현실의 기술은 두 가지 장애를 안고 있다. 현실의 또 다른 층위를, 현실의 완전한 바깥에 세우면서, 완전하게 비현실적인 것들로만 채워진 세계를 창작한다는 데,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과 내밀하게 맞닿아있고, 두 번째는 가상현실 그 자체가 '갇힌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열린 듯한 가상세계는 실은 완전하게 닫힌 세계와도 다르지 않다. 무엇이든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myth)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신의 계급에 올려놓고, 공학자들이 창작하는 세계만을 주워담을 수 있는 그 세계에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존의 어떠한 시스템도 가능하지 않다. 오로지 현실을 모방한 비현실적 세계만을 담보하는 일종의 화면과 그 화면과 신체 사이에 어설프게 끼어있는 중간자로서의 자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가상현실 속 자아의 존재의 의미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작품 속에 녹아든 창작자의 자아같은 감상은 던져두자. 정말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신체와 단절된 자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것이다. 만일 신체와 단절된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면, 갇힌 세계 속에 구현된 신체 없는 사회를 대하는 자아는 어디로 가야하는 가.

 이에 대해 가상현실 찬성론자들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다'는 명분 하에 '장애극복의 가능성'을 든다. 어찌저찌 그곳에 기존의 사회를 완벽하게 모방한 현실의 층위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결국, 가상현실을 통해서 마트로 "걸어가서" 내가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면, -그 "걸어감"의 감각까지 가상현실은 제공할 수 있을 지는 차치하고, 그러므로 두 발로 걸어가는 그 감각과 나의 뇌를 연결시킴으로써 또 다른 자아를 창작한다는 기술 자체가 현실에 불가능하다는 결론 앞에 결국 불필요한 현실의 층위 속에 별다를 것 없는 아바타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상정하고-,  우리 집 문 앞에 그 음식을 배달해놓는 것은 어떤 층위의 현실에서 발생할 문제냐는 것이다. 결국, 나의 태초적 신체가 놓인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결국 나는 그 음식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먹어야 한다. 왜 신체를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도피처를 창작하는 가? 왜 나는 여행을 가는 대신, 집안에서 '편리하게' 둔탁하게 생긴 안경을 끼고, 베니스의 강물 위를 떠다녀야 하는가? 왜 나는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누군가 베니스도, 강물도 아닌, 이미지를 구현한 데 그친 것을 느끼고 '진짜'같은 것을 느껴야하는 가? 그리고 나는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어제 나 베니스에 다녀왔어. 아니, 그냥 우리집 거실에서 안경끼고 가상현실로 체험했어. 멋있지? 아, 과연 그 경험에 일말에 의미랄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가상현실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즉, 신체적 한계가 줄 수 있는 마이너스적 요소를 현실에서 삭제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기술을 쌓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폰이란 전례가 보여줬듯, "편리함"이란 지나치게 완벽해보이는 미명 하에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게으르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인류에 대해서 스마트폰이란 기술이 갖는 충격이 완화된다면, 마치 모든 것을 부숴대는 할리우드의 영화를 봤을 때 미국을 찬양하게 되다가 극장 밖으로 나오면 일상의 허무함에 빠르게 젖게되는 것처럼, 정말로 이곳에 있어야 할 게 무엇인 지 인류는 깨닫게 되고, -절대로 신체의 유한성을 벗어나서 인류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음을 깨닫고- 오직 현실 위에 선 나의 신체를 편안하게 하는 상품들을 적극적으로 구매할 것이다. 오로지 신체와 맞닿은 곳,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모방하는 기술만이 성공을 거둘 것이다. 

 당신의 현실이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을 지, 나는 관심없다. 오히려 나는 현실의 다양한 층위를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단, 현실을 신체가 서 있는 터로 규정한다면, '현실'의 유한성이란 금세 그 모습을 드러내고, 기술의 방향은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그곳이 존재를 가능케하는 터인 신체와 정확하게 닮았다. 현실과 신체는 각각 존재의 연장된 터를 보장하되, 유한하다. 이곳에는 '터'라는 경계와 '시간'이라는 한계가 있다. 인간이란 현실의 그 특성 그대로, 현실의 한 가지 모습으로서, 현실의 연장 선상 서 있을 수 있는 신체를 허락받은 존재들이다. 현실 속 신체를 넘어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당연히, 인간의 신체적 조건을 외면한 채 제멋대로 발달하는 기술들은, 가상현실 구현을 비롯하여, 공학자가 추정한 잠재적 효용성과 깨어나지 않은 가치가 얼마나 크든, 인간의 시선 이면에서 몸집만 부풀린 채 쇠락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비롯한 신체를 무시한 기술은, 문자 그대로, 인류의 손에 의해서 -혹은 마우스를 쥔 인류의 손에 의해서- 직접 버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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