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은 동등이 아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진폭을 가진 사상의 흐름이라면 단연코 페미니즘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상 이토록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급속하게 진행된 경우를 찾아보기 드물다. 지금도 온,오프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페미니즘은 피해망상이다." 남성적 사회에서 자란 여성으로 나는 이 문제를 예의깊게 주시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페미니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반어법이 아니다.
1. 동등은 평등을 담보한다. 그러나 평등은 동등을 담보하지 않는다.
should they be beautiful, every thing else is needless, for, at least, twenty years of their lives. 여자는 예쁘기만 하면 다른 건 상관없다. 한 이십년동안은.
18세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th Strictures on Political and Moral Subjects] 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남성이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세 가지를 든다. 이성Reason, 덕Virtue, 경험Experience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에게 기본적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논증은 무지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남성조차 자신들이 어떻게 이성과 덕과 경험에서 여성보다 우월한 지 추적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또한 당대의 사회적 차별은 정치, 법, 안보, 종교 등 사회의 각 직업군을 지배했던 남성이 남성적인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행한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남성주의적 사회 전반을 향한 그녀의 고독한 저항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귀결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의 가해자는 남성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매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이 책을 썼을 때는 18세기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그녀의 저작에 실린 여성에 대한 차별에 공감한다. 요컨대, "여자가 예쁘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18세기의 여성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면, 21세기에도 여성은 동일한 딜레마를 겪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특정한 나이를 넘으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으므로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현대의 남자들은 여자에게 경고한다. 실상 여성에 대한 차별의 또 다른 이름은 경고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남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외롭고, 고단한 삶을 이끌게 될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남성의 마음에 들게끔 외모를 가꾸지 않으면 당신은 폭력을 받아서 마땅하다. 남성의 애정을 무시하면 당신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 감히 남자보다 우월해지려고 한다면 당신에게 언어 및 신체적 폭력을 가하겠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모든 여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폭력을 무기로 갖는 차별을 지속적으로 학습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차별에 저항할 수 있을 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처럼 여성에 대한 차별이 18세기에서 21세기에 변한 게 없는 걸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그 거대한 진폭과 동력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이나 실존주의 등의 타 철학적 이념에 비해서 더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페미니스트가 획득했던 권리의 수혜 위에 선 현대의 페미니스트는 또 다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반反페미니즘이 교묘하게 변태하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에 더 없는 적기라고 나는 믿는다.
그에 앞서, 글의 제목과 내용에 대한 차이에 혼동을 받는 이들을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수정하고 싶다. 나는 '동등이나 동일을 강요하는' 페미니즘을 믿지 않는다. 현대 페미니즘의 첫 번째 오류, 그리고 완전한 방향의 상실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누구도 그 오류에 대해서 쉽게 인정하지 못하지만, 평등이란 가치는 누구도 동등 혹은 동일하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개인 간 동등, 혹은 동일을 지향하는 목소리야말로 인류의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서 최우선으로 제거해야 할 장벽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평등에 대한 오해는 그것을 '동등'과 착각하는 데서 유인한다. 우선, 동등의 뜻을 살펴보자. 동등은 등급이나 정도가 같음을 의미한다. 수학에서 이는 '동치'라는 개념으로 종종 치환되어, "두 명제 p, q에서 p이면 q 이고, q이면 p일때의 p와q의 관계" 등으로 나타난다. 즉, 1과 1의 관계는 동일한 가치값을 지니기에 두 가지는 동등하다. 정삼각형은 세 변의 길이는 모두 동일하기에 동등하다. 동일성은 동등함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하학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곳에서 '동등'은 필연적으로 -학문에서 통할 법한- 권위를 잃는다. 완전하게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개인 간 관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동일을 강요할 수 있는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 간 동등을 지향하는 이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념을 오인했거나, 고의로 그것의 의미를 흐리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평등에 관한 매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서 인류가 사회에 계약된 형태로 묶이게 된 원인을 여성이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찾는 루소에 대한 거센 논박으로 시작한다. <에밀>의 저자, 장 자크 루소에 의하면 여성과 남성의 역할 차이는 분명하다. 여성은 남성의 눈에 아름다워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며, 남성에게 복종하는 형태로 살아야 한다. 즉,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지 않기에, 평등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서양의 정치철학 지류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일은 루소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평등'을 논의하는 정치철학이 '동등' 과 '평등'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 어떻게 인간이 평등을 획득하게 됐는 지, 그 지류를 간단하게 살펴봐야 옳을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는 인류가 사회Society를 구축하게 된 과정에 논의하면서,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 각자 창의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회가 구축되기 이전의 자연적 환경부터 인류는 불평등하다는 것을 가정하는 데 일말의 이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토마스 홉스는 야만 상태가 "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 고독하고, 더럽고, 야만적이고, 짧았다" 고 지적하면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회, 즉, 사회가 허락한 정도의 자유(liberty)가 아니라, 완전한 혼란을 야기하는 자유(freedom)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개인은 거대한 힘을 모아서 "사회"라는 아성에 건넸다고 주장했다. 즉, 사회에 평등하게 복종하는 댓가로 인간은 동일한 만큼의 안전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존 로크는 자연 사회가 “peace, goodwill, mutual assistance, and preservation 평화롭고, 선의를 갖고 있었으며, 상호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보존할 수 있는 것” 이라고 믿었다. 존 로크가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전의 철학자의 것처럼 비관적이지 않았다. 존 로크는 자연 사회가 사회 이전에 존재했을 지언정, 도덕이 부재한 곳은 아니었으며, 자연의 법이 통하는 곳이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연 상태의 인류는 자연의 법칙 하에 평등했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명시된 것이 아니었으며, 보다 완전하게 자신의 이익을 보존할 수 있는 기제를 인류는 요구하게 됐고, 따라서 인류는 누구나 평등하게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서, 동등한 처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구축했다.
한편, 장 자크 루소는 근대의 주요 정치철학자 중에서 가장 야만 상태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철학자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류는 사회가 누리지 못한 모든 종류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로웠고, 자유로웠으며, 고독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가 발달하고, 자기 재산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각자 사회와 계약을 하는 형태로 사회를 구축하는 데 동의한다. 즉, 인류는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그 완벽한 사회를 저버리고, 보다 불평등한 사회를 구축해나가게 됐다. 설령 신체적 힘 등의 특성이 동등하지 않았을 지언정 불평, 불만이 없었던 평등한 세상에서 인류는 자기 재산을 보존하고,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기꺼이 '제너럴 윌'에 의거하여 누구나 동등한 계약을 사회와 맺음으로써 불평등한 사회를 인정하게 됐다.
바로 이와 같은 이론을 정치철학에서 '사회계약론'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은, 세 명의 정치철학자가 논의한 인류가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을 논의하는 데, -'여성'은 철저하게 소외가 되어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등을 근거로 평등 혹은 불평등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루소의 이론마저 개인은 동등한 종류의 계약을 사회와 맺기에 "평등하게" 불평등을 당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1과 1이 동일한 가치값을 지니고, 동등성을 획득하면, 그것들은 평등한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개념이 인간사史에 적용이 가능한가? 1과 1이 동등하기에 평등한 것처럼 개인 간 동등은 필연적으로 평등성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인류의 평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옳을 것이다.
즉, 평등하면, 동등한가?
여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교육론임을 자처하는 <에밀>의 저자, 루소에 의하면, 여성은 사회를 구축하는 데 동의할 만한 이성을 갖지 못한 존재기 때문에,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할 수 밖에 없으므로, 사회계약론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즉, 루소가 말한 불평등한 사회란 남성 간 기회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한 사회를 의미했다. 그런데 사실 인류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한 것은 인류가 자연상태를 버리는 대신 사회에 종속되기로 계약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에 대한 정도에 차이가 애당초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때, '재산'이라 함은 신체적 차이, 자본, 성격 등을 포함한 포괄적인 것이다. 그 어떤 개인도 완전하게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동등한 위치에 선 적 없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불평등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불평등하다. 나와 타자는 필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차등적인 입장에 서서, 차별적인 평가를 받는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 사회적인 지위, 타고난 장점과 약점 등에 의해서 벌어진 격차뿐만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춘 단체가 등장한 이후부터 나와 상대는 근거가 뚜렷한 차별에서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차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단순하게도, 나와 타인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 간 재산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개인의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설명대로라면, 이것이 '평등'이란 개념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타인이 평등한 선상에 서 있기 위해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인류의 평등을 연구해야 마땅한 이들이 눈여겨봐야 할 진실이 서 있다.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는 동등을 전제하지 않는다.
현대의 페미니즘을 두고 일어나는 오해는 바로 위와 같은 명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데서 기인한다. 평등은 동등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평등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장하는 근거로서, 차이를 가질 자유를 보장한다. 반대로, 동등은 'equal'의 개념을 제시한다. 왜 젠더 이퀄리즘gender equalism이 아니라 feminism인가에 대한 대답은 쉽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가치의 동일한 결과값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은 필연적으로 차이를 가진다. 성 호르몬에 의거하여, 남성과 여성에겐 생리적, 생물학적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며, 각 개인마다 그 호르몬의 정도에 따라서 다시 남성적인 여성, 여성적인 남성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개인은 '성평등' 이란 미명 하에 1+1=2의 1+1과 2처럼 동등한 값을 지닐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성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성별이 인간의 평등에 제약을 가하는 기제로서 사용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에 관한 평등이란, 개인이 성적 자아를 선택하는 문제에 한해서 누구나 동등한 자격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음을 담보한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 가 아니라, 성적 자아를 선택하는 문제에 관해서 타인의 간섭 혹은 강제없이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는 성적 평등을 지향할 수 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성별이란 상위 카테고리에 의거하여 'equal'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反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평등을 주장한다는 것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것을 강요하고 있다.
"네가 페미니스트라고? 좋아, 그럼 넌 남자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서려 하지마. 네가 평등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감히 남자보다 잘 나려고 하지 말라고. 넌 남자와 '평등'해야 하니까. 알겠어?"
이와 같은 주장은 '평등'과 '동등'을 오인한 기본적인 종류의 착각이다. 평등은 동등을 강요하기는 커녕, 외려 동등하지 않을 권리를 그 자체에 담보하며, 이는 어렵거나, 복잡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서양의 근, 현대 정치철학자가 제시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한 가지 공동체에서 그러한 바로 명시된 바 없이 시민은 -평등하게, 혹은 평등 그 자체로서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는 가, 에 대해서 타인과 다른 나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리로서 시민은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즉, 나는 타인과 차이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면서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다. 또한, 평등함은 필연적으로 동등하지 않음을 내포할 수 밖에 없는 데, 예를 들어, 당신이 마라톤 경기에 출전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타 경쟁자와 동일하지 않은 실력 차이와 환경을 가지고 있을 지언정, 마라톤의 법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에 따라서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들은 차등적인 결과를 낸다. 반드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혹은 차등적인 처우를 당하는 게 평등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외려 평등이야말로 차등적인 결과값의 가치를 보존시키는 근거로서 기능하며, 차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법률에 평등하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페미니즘'에 대한 오도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적 페미니즘은 근대와는 다른 목표를 갖고,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반드시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무게의 쌀 가마니를 들 필요는 없다. 반드시 여성이 남성과 같은 근육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페미니즘을 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여성들과 동일하게 짧은 머리를 갖거나, 남편의 아침을 차려주는 주부가 되고자 했던 꿈을 버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살림을 하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아는 여자도 페미니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 행위가 피지배와 지배의 차원을 넘어서, 그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고, 그녀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행위를 두고 反페미니즘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여성에게 남자와 동등한 기본권을 달라'는 외침은 결코 '여성은 남자와 동등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명제에 그럴 듯한 차이가 없어보인다면, 그것은 언어가 드러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페미니스트는 "성동등"이란 개념을 완전하게 포기할 때, 비로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평등은 동등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무엇이든 동등해야 한다는 강제야말로 평등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남자보다 키가 크지 않기 위해서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를 추구해야 할 여성상으로 믿는 것은 反페미니스트적인 행동이다. 진정으로 페미니스트가 목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가 왜 남자보다 키가 크면 안 되냐"고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즉, 169cm인 나의 남자 애인의 옆에서 8cm 하이힐을 신고 여성이 편안하게 미소를 짓는 데, 양자가 어떤 종류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 사회가 진정 성적으로 평등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이 도래하는 사회에서 남성은 마치 미덕처럼 키가 클 필요도 없고, 사회적으로 주입된 남성성에 부족한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나와 타인이 동등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페미니즘의 이념에 의거하면, 어떤 종류의 성별에 관련된 편견도 개인을 압제할 수 없다. 인류의 성평등을 목적으로 갖는 페미니즘이 필연적으로 동성애에 관련된 문제로 확장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종교적으로 성별에 착안한 편견이라는 장벽을 해체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평등을 요구하는 페미니즘의 이념과 궤를 같이 한다. 반드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성질의 사랑을 할 필요는 없다. "성동등" 개념을 포기하는 순간, 평등이란 조건 하에, 인류는 포용하는 자세를 얻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페미니즘은 성에 관한 '동등' 개념을 포기하면서,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 선, 동일한 가치를 지닌 개인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하지 말아야한다. 1과 1이 동일한 것처럼, 개인과 개인이 동일하길 바라는 것은 생리학적, 사회적 요소를 무시한 강요가 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반드시 동일할 필요가 없으며, 동일해서도 안 된다. 동일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종류의 강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동일한 만큼의 가치를 지닌 사람은 없고, 자연상태가 기인한 요소 혹은 사회의 시스템 하에서 차등적인 지위를 갖는만큼, 반드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정도의 처우를 받을 순 없다. 평등은 바로 이러한 동등 개념을 담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본적 조건이 된다. 인간은 평등하기에 남과 차이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 바로 그것이 페미니스트가 '동등'이라는 그럴 듯한 가치의 압제에 저항을 해야 하는 이유인 한편,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왜 평등이 자궁 속에서 이뤄지는 비가시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실현시켜야 하는 가치임을 드러낸다.
한편, '평등'이란 개념을 해체하기 위해서,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는 '차별' 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페미니스트는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 어떠한 근거로 인해, 개인 간 동등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것과 근거없는 차별을 자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예를 들어, 의사 면허가 없는 이가 환자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직업적인 면에 한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가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약국에 주사기를 사러 간 그에게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아.' 라면서 그가 주사기를 살 권리를 앗아갈 권리는 없으며, '넌 의사가 아니니까 무식해. 넌 의사보다 열등한 존재야'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평등은 동등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바로 그 비동등성이 차별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차별은 동등만큼 평등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의 관심대상에 주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차별의 생리적 행태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차별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우월감'을 근거로 든다.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기 때문에 인간은 차별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세대를 지나서 생존하는 차별이 불특정 타자를 기반으로 우월감을 갖기 위해서라는 기존의 설명은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왜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지에 대한 답이 그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별은 안전을 향한 인간의 욕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때로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차별의 근거가 명확하게 명시되는 야생 상태가 아닌, 법과 질서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비가시적인 가치로 둘러쌓인 나를 지키기 위한 무시하지 못할 방패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한국 남자는 무조건 나쁘다고 믿는다." 라는 주장을 하는 여자가 있다. 과연 그녀는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나는 한국 남자만 피하면 안전할 수 있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성에 적극적인 한국 여성은 꽃뱀이라고 믿는다."는 "그러므로 성에 적극적인 한국 여성만 피하면 괜히 합의금을 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왜 대한민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영어강사가 되는 것이 힘들고, 외국인과 결혼한 여자를 두고 비난하며, 동성애자는 연인과 손만 잡아도 길거리에서 돌을 맞는가? 왜 호주에서 중국인은 피해야 하는 존재고, 아시아인은 무례하며, 독일인은 재미가 없을까? 그들의 존재가 나의 안전감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기껏 '보수적인' 사회에 적응한 나의 인식을 그들은 뒤흔든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니, 흑인은 순 마약쟁이에 아무나 쏴 죽이기 일쑤고, 외국인과 결혼한 여자는 우리나라 남성의 아이를 낳지 않는 저능아들이며, 동성애자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깊게 뿌리박힌 사회의 편견을 반성하지 않고 구더기처럼 통념에 적응한 채 안주해온 나의 안전감을 그들이 어지럽힌단 말이다!
즉, 차별하는 대상만 피하면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인간은 차별을 한다. 더 이상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랬다간 사법부가 나의 향후 계획에 제약을 가할 것이므로- 개인이 의지할 곳은, 안타깝게도, 근거없는 차별밖에 존재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와 같은 믿음은 대단히 비非이성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늘 이성적인만큼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린다. 놀랍게도, 비이성적인 행동의 원인에는 늘 이성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게다가 이성에서 비이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견될 만한 오류들을 점검하기에 나의 정신은 너무나 나태하다. 나는 나의 주장이 옳고 그른 지를 따지기 위해서 종일 공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철학 나부랭이나 하는 인간들에게 맡겨두면 되지. 하루종일 돈을 벌어도 시원찮은 나는 그렇게 하기에 너무나 피곤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인간은 손쉽게 안전감을 지키기 위한 방도로 차별을 선택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회에서 불안요소를 미연에 삭제하고 싶은 욕구가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를 차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차별을 하는 주체는 사회적, 신체적인 안전을 지키고 싶기 때문에 대상을 차별한다. 나는 나의 몸을 지키고 싶다. 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지키고 싶다. 라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인간으로 하여금 차별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쉽게 끊어내지 못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지며, 이윽고 당연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늘 공포에 질려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그것을 '우월감' 정도로 치부하고, 스스로 그 허구를 믿게끔 내버려두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이 '근거없는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허구를 창작해나간다. 이 때, 차별을 하는 주체 간 연대의식이 공고하면 보다 효율적인 차별을 저지를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은 운전을 못해.', 등의 허구를 개인이 창작한다면, 남성중심적 사고관에 낡은 기름떼처럼 쪄든 한국의 뭇 언론사들은 교통사고 가해자의 성별을 고의로 적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은 개인의 공포와 지배층의 연대의식을 통해서 세대를 넘어서고, 그 범위와 양상을 보다 열악한 상태로 만들 뿐, 동일한 권력구조를 후대에 전한다.
어떠한 사태를 두고 그것을 촉발하게 한 원인과 공고하게 만든 원인을 설명하기에 단지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세대를 넘어선 차별을 발생하게 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근거가 미약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인 지위 혹은 신체의 상태를 지키고 싶어하는 안전감을 위한 욕구에서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동일하거나, 동등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非동등성을 차별에 대한 근거로 그릇되게 이용하는 겁에 질린 인류가 만들어낸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은 깊은 곳에서 알고 있다. 언젠가 어떤 측면에서 나 역시 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그 고루한 진실을 말이다. 겁에 질린 시선을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향해 고집스레 돌리고 있을 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보다 필사적으로 차별을 자행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페미니즘의 첫 번째 오류를 이론의 층위에서 설명했다. 첫째, 페미니즘은 개인 간 동일화를 목표로 갖지 않으며, 그러므로 평등은 반드시 동등을 담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 간 동일화는 사회의 기득권이 피지배층을 압제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평등이란 주체적인 자아 확립의 근거, 즉, 타인과 차이를 가질 수 있는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실천의 차원으로 논의의 장을 옮겨야 한다. 미상불 페미니즘의 목전에는 평등과 동등의 개념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맞부딪힐 수 있는 수많은 장애물이 등장한다. 이제, 이론을 바탕으로 실천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대해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