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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Apr 12. 2017

그렇게 여성은 죄인이 된다, 이종격투기의 링 안에서

한국의 남성중심적인 언론이 장악한 놀이판의 말들

 남성회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카페로 유명한 "이종격투기" 커뮤니티에 한 기사가 올라왔다. 다음은 그 기사에 대한 댓글이다. 






 자, 이 기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았다.



http://todaykorea.co.kr/news/view.php?no=236400



 50대 남성이 낙성대역 근처에서 지나가던 중년여성을 무차별 폭행했다. 속수무책으로 폭행을 당했던 여성은 주변에 살려달라고 외쳤다. 한 남성이 대여섯명의 고등학교 남학생이 가해자를 제지했다. 이 때, 50대 남성은 과도를 꺼내서 휘둘렀고, 이 흉기가 남성의 배를 스쳐서 손목에 좌상을 남겼다. 폭행을 당하던 여성은 지구대원이 도착했을 즘 더 이상 현장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일부 이종격투기 회원의 관점에서, 그것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하고, 본래 여성에게 칼을 휘두르려다 주변의 제지로 막혀서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50대 남성이 아니라, 길에서 무차별적으로, 이유없이 폭행을 당하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른 뒤 사람들이 구해주는 틈을 타서 피한 여성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갑자기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는 데도 불구하고 이성을 차려야했으며, 본래 자신을 찌르려던 칼을 보고 놀라지 않고, 그 상황에서 칼을 맞은 의인을 위해서 침착하게 멀찌감치 기다렸다, 자신을 도와준 남성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경찰이 왔을 때 그들을 위해서 진술을 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거리를 걷다 난데없이, 무차별 폭행을 당하다 사람들이 도와주는 틈을 타 허겁지겁 도망을 친 바람에 이 여자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이기적인 여성이 됐다. 그 여자가 추후에 어떤 조치를 했냐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 감히 의인이 그녀를 구하려다 칼에 찔린 틈을 타서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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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격투기 댓글의 짜집기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원문을 갖고왔다.



 그런데 일련의 반응들을 보니 새삼스레 궁금했다. 과연 이들로 하여금 피해자 여성을 비난하게 만든 이들,즉, 한국의 여성혐오의 판을 짠 이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우선, 이종격투기에 올라온 기사에서 사실관계를 드러낸 문장만을 추려보자.



1) 한 여성이 50대 남성 A씨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2) 해당 여성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살려주세요"를 외쳤고, 지나가던 40대 남성 B씨와 고등학생 5명이 A씨를 제지하고 나섰다.

3) A씨는 제지를 당하자 외투 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 휘두르더니 자신을 제압하려는 B씨의 복부를 수차례 찔렀다. 

4) 이 과정에서 최초 폭행을 당하던 여성은 겁에 질려 그대로 달아났다.

5) B씨와 함께 A씨를 제지하던 고등학생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 A씨는 검거됐다.



 과연 기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살려주세요를 외치고, B씨와 고등학생들이 나서서 다같이 그를 제압하는 과정에 있을 때, '겁에 질려' 달아난 여성을 직접 목격했을까, 는 그리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결국, 본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초반이나마 혹여나 사실관계에 위배될까, "~고 한다"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적시되건, 되지 않았건, 여자는 난데없이 모르는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고, 사람들이 도와주는 틈을 타 허겁지겁 도망쳤다는 게 기사가 전한 핵심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사를 하던 중 궁금했다. 남들처럼 무턱대고 피해여성을 비난하기에, 기사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해하지 못할 빈곳이 너무 많았다. 여성이 도망친 뒤에 남성은 칼에 맞은 것일까, 혹은 가해자가 칼을 꺼내든 순간 여성은 도망친 것일까? 그렇다면 50대 남성은 왜 처음부터 칼을 꺼내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의 3차 피해자, 낙성대 증인이라 불리는 곽경배씨는 CBS의 김현정 뉴스쇼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중, "구해준 사람은 나몰라라 도망친 개념없는" 피해자 여성의 피해 범위에 대한 곽씨의 증언부터 갖고왔다. 






 이 사건의 최초 피해자는 낙성대역을 지나가던 할머니였다.


 50대 남성 가해자는 낙성대 역을 지나가던 할머니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은 기분이 들었다는 이유로 두 번째 피해자인 중년 여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배를 차고, 여성이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사이 뒤통수를 가격했다. -뒤늦게 곽씨가 도착해서 발견한 폭행 범위가 이정도였다.- 이를 목격한 곽씨와 동작고등학교 남학생 몇 명이 다가가자, 50대 남성 가해자는 도망쳤다. 


 50대 남성 가해자가 도망친 사이, 폭행을 당했던 두 번째 피해자 여성-현재 이종격투기 등 타 커뮤니티에서 비난을 듣고있는 여성-은 최초 피해자인 할머니가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곽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를 들은 곽씨는 이대로 두면 50대 남성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까봐 50대 남성 가해자를 쫓아갔다.

 

 다음은 곽씨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50대 남성 가해자와 곽씨의 대화다. 


"(50대 남성을 쫓아간 뒤) 아저씨."
"(돌아보면서) 너 뭐야, 이 새끼야."
"아니, 사람을 왜 때립니까"
"너도 죽을래?"

 곽씨를 보자 흥분한 50대 남성 가해자는 과도를 꺼냈고,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즉, 곽씨는 피해자 여성을 구하기 위해서 제지하다 칼에 맞은 게 아니었다. 곽씨는 또 다른 피해자를 염려해서 경찰에 신고를 하면서 신변 확인을 위해 50대 남성 가해자를 쫓아갔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를 제외하고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고, 누구도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곽씨는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까, 가해자가 도망을 쳤는 데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쫓아가서 끝까지 그를 제지했다. 곽씨가 쫓아간 것을 본 피해여성은 -할머니를 포함하여- 가해자에게 보상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지금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난은 세 명의 피해자를 남긴 50대 남성 가해자가 아니라, 2차 피해자인 여성이 받고 있다.


  온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를 차지한 [낙성대 의인] 사건 이후, "여자는 남자가 구해주는 데 (무책임하게) 달아났다. 혹은 도망갔다." 는 허위에 가까운 기사가 쏟아지면서, "그러므로 위기에 닥친 여자는 구해주지 말고 갈 길 가야 한다." 는 정서가 남초커뮤니티를 비롯한 페이스북, 네이버 기사 댓글 등지에 팽배하게 차올랐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받아야 할 정신적 책임에 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는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해서 기자와 네티즌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관심있게 보고싶은 분야가 있다. 바로 "모든 사건에서 여성을 비난하는 게" 얼마나 쉬운 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 같은 관점은 페미니즘의 최신 트렌드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거의 모든 폭행사건에서 가해자인 남성을 비난하지 않고, 여성을 비난하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개인적인 연구에 의하면, 그 여성혐오적 관점은 가장 오래된 이야기,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발견한 뒤, 신은 묻는다. "아담, 너는 왜 내가 금지한 일을 했느냐?" 그리고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 의하면 "다소 비겁하게도"- 아담은 이렇게 "고자질"한다.


 "당신이 나한테 만들어준 여자가 나한테 그것을 먹으라고 했고, 나는 그걸 먹었어요."

"The woman you put here with me--she gave me some fruit from the tree, and I ate it." (Genesis 3:12)



 그리고 신은 감히 아담을 꾄 이브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린다. 


"네가 아이를 갖고, 낳게 되는 통증을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마. 앞으로 너의 욕구는 네 남편을 위한 것이고, 그는 너를 영원히 지배하게 될 것이다."

"I will make your pains in childbearing very severe; with painful labor you will give birth to children.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will rule over you."

 


  잠시 삼천포로 새자면, 이러한 저주에 관한 결과는 노아의 방주의 전후 사정으로 이어진다. 신이 노아를 선택해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기 전, 인류가 맞닥뜨린 상황이 퍽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상황은 단순히 인류가 방탕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만은 아니었다. 여성을 취하는 남성의 태도가 방종했다. 



"인간이 지상에 자손을 번식함에 따라서 딸이 태어났고, 신의 아들이 보기에 인간의 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들(신의 아들)은 그 중에 자신이 원하는 여성이라면 아무나 선택해서 결혼을 했다."

"When human beings began to increase in number on the earth and daughters were born to them,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humans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Genesis 6:1-2)"



 창세기에 교묘하게 숨겨진 여성혐오는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 이처럼 창세기에서 '여성과 관련된 죄'를 지은 남성은 대개 여성에게 책임을 물거나, 제게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며, -"결혼한 거 몰랐어요. 말 안했잖아요."- 정작 범죄의 대상이 된 여성-인간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는 역할만 하는 여성-은 거의 입을 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편, 창세기를 작성한 자는 "신의 아들"과 "인간의 딸" 등의 단어를 선택하고, "그들이 원하는 여자라면 아무나 결혼했다." 라는 식의 비교적 범죄를 약하게 드러내는 정도의 문장을 차용하면서 남성의 죄를 교묘하게 가린다. 이와 같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뿌리깊게 숨어든 남성의 죄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 주제 사라마구, 길리안 플린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가 문학과 철학을 통해서 밝혀오는 것을 시도했다. 즉, 남성중심적 사고관은 가부장적인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며, 성경이 작성될 당시부터 겪어온 여성혐오는 다함께 저항해야 하는 문제다.



 오늘날,  주요 포털사이트에 "낙성대 의인"을 검색하면 수백개의 기사가 쏟아진다. 이 사건을 연구하면서 나는 그 기사의 흐름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여자가 도망쳤다', '여자가 달아났다' 는 문구를 적시하지 않은 게 드물었다. 기사의 사건의 초점은 대개 "달아난 여성"에게 교묘하게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 피해자 여성은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을 친 것은 50대 남성 가해자였다. 곽씨는 도망치는 가해자를 쫓아갔다 변을 당했고, 오히려 피해자 여성은 "이 사람이 할머니를 폭행했고, 나도 폭행했다." 면서 곽씨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후에 곽씨를 위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서 CCTV와 목격자 증언도 전부 있는 상황에서 그가 쌍방폭행에 과실이 없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사실관계가 -고의든, 아니든- 명확하게 적시되지 않은, 거의 허구에 가까운 기사를 읽고 이종격투기를 비롯한 타 커뮤니티는 피해여성을 "개념없는 년"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데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누구도 묻지마 살인미수를 저지른 가해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차라리 3차 피해자였던 곽씨가 피해여성을 비난하지 말라고 나서야 할 정도였다.



 물론, 이종격투기의 모든 회원이 이러한 창세기적 여성혐오에 물든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닉네임을 가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온 커뮤니티의 비난의 화살이 할머니와 중년 여성을 무차별 폭행하고, 도망을 친 뒤 칼을 휘두른 50대 남성 가해자가 아니라 한국의 남성중심적 언론이 쌓아올린 "의인을 두고 도망친 여성"프레임에 갇혀있을 때, "이종"이라는 이유로 일반화를 당하는 이들은 사건의 초점을 다시 남성인 가해자에게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이들 중 몇몇은 "여자를 편든다." 면서 이종격투기 커뮤니티 내에서 사이버 불리Cyber Bully를 당해야 했지만, 사건의 초점을 남성인 가해자에게 돌려야한다는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다. 과연 이종격투기의 이 회원들을 낙성대 폭행 사건의 또 다른 의인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친 것일까.  - 참,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댓글은, 이종격투기의 한 회원이 "왜 살인미수를 저지른 50대 남성을 욕하지 않냐"고 묻자, "그걸 왜 욕해요. 원래 나쁜건데." 라고 받아쳤던 한 회원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댓글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다. 폭행을 당했다 도망을 친 피해자를 조롱하고, 비난했던 일부 이종격투기 회원들은 정작 그 여성을 도와준 의인도, 그 여성의 폭행을 목격한 목격자도, 심지어 그 의인의 지인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저 사건 현장에 출동한 파출소 지구대원이 목격자에게 들은 진술을 또 다시 전해들은 것을 토대로 작성한 기사를 갖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래서 여자는 구해주면 안된다" 라면서 모든 사건의 초점을 여성에게 돌리기 바쁜 이들이, 실제로 여성을 구하기 위해서 나설 지나 의문이 든다.



 과연 이번 사건에서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무엇일까. 애당초 여성 대상의 묻지마 폭행 전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두 명의 여성을 무차별 공격한 50대 남성 가해자? 제대로 조사도 거치지 않고 날조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기사를 내기 바빴던 국내의 주요 언론? 이토록 허위에 가까운 기사가 짜맞춘 판에 정해진 말처럼 반응한 네티즌? 



 아니, "감히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칼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친 죄"로 한국 남성중심적 사회가 만든 링 안에서 여성은 무조건 죄인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설령 인터넷 기사에 나온 내용이 완전하게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죄가 성립할 리 없다. 난데없이 길에서 남성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사람들이 구해주는 틈을 타서 안전을 위해서 피하는 것은 가장 정상적이고, 당연한 행동이다. 가장 이성적인 방법은 아닐 지언정, 무차별적인 폭행과 칼에 대한 위협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추후에 피해자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 가에 대한 판단은 사건을 직접 겪은 이해 당사자의 몫이 될 것이다. 사실관계도 제대로 적시하지 않은 인터넷 기사 하나를 두고 "한국여자란 ㅉㅉ 이래서 여자는 구해주면 안되죠."를 외치는 남성 네티즌에게 그 여자가 욕을 먹어도 싼지, 아닌 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추후 보도를 통해서 나온 여론의 과정이 흥미롭다. 실은 2차 피해자인 여성이 사건 당일 날 낙성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증언을 했다는 게 밝혀지자, 왜 의인을 병문안가지 않았냐고 남성 네티즌은 여성 피해자를 공격했다. 이어서, 알고 보니 여성이 지나가다 할머니에 이어서 남성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배를 발로 차이고, 뒷통수를 가격당했으며, 폭행을 당한 와중에도 곽씨에게 '할머니가 폭행을 당했다.' 라고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번엔 '두 발 멀쩡히 걷는 데 왜 같이 의인을 쫓아가지 않았냐'면서 남성 네티즌은 피해자 여성을 비난했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태초부터 이어진 여성혐오의 굴레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은 여성을 구제할 수 있을까. 과연 남성이 저지른 폭행의 피해자인 여성이 비난을 당하는 현상에 출구는 있을까. 애당초 "묻지마 살인 미수"의 직접적인 피해대상이 될 뻔 했던 건 누구였을까. 할머니와 중년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50대 가해자 남성이 가슴에 품은 칼로 찌르고자 했던 대상은 남성이었을까, 여성이었을까. 포상금과 정부의 지원을 약속받은 곽씨를 제외하고, 도망도 치지 않고, 몇 차례 가해자를 검거하기 위해 노력한 피해자 여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도 남성 의인은 부표를 타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데, 여성 피해자는 머리 위를 짓누르는 익명의 손들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익살을 당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95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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