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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설화 Apr 10. 2017

나는 페미니즘을 믿지 않는다 完

다시, 유일한 목표를 향해서


4. 인류를 위해서, 인간에 의해서, 그리고, 개인을 향해서.



if the pure flame of patriotism have reached their bosoms, they should labour to improve the morals of their fellow-citizens, by teaching men, not only to respect modesty in women, but to acquire it themselves, as the only way to merit their esteem.

만일 진정한 애국심을 그들이 느낄 수 있다면, 여성의 겸손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그들(남성)의 평가를 좋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그것(겸손)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도록 남성을 교육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동료 시민(여성)의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과연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기회를 누린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한 쪽에게 허락되온 기회를 양자로 확장하는 게 어떻게 양 성별에게 이득이 되는 가. 페미니즘의 젠더 확장성을 논의하기 전,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하자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평등은 그 자체로 동등을 보장하지 않으며, -왜냐하면 성별 그 자체는 우월함이나, 열등함을 보장하지 않을 지언정, 남성호르몬 혹은 여성호르몬의 비율을 높게 가진 개인이 타인보다우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존재하기 때문에- 외려 평등이야말로 타인과 동일하게 생활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적 조건이라고 논증했다. 각 성별이 가진 생물학적 차이를 페미니즘은 무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호르몬의 차이에 한하여, 여성호르몬과 남성호르몬에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호르몬을 각자 얼만큼 갖고 있는 지에 따라서 개인의 삶의 양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페미니즘이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인의 삶이다. 즉, 남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 여성적 여성, 남성적 남성 등 모든 개인이 어떠한 종류의 성별에 관련된 사회적 기준에 자기 스스로를 우악스레 껴맞추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페미니즘은 존재한다. -이 때,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라는 사르트르의 발언으로 대변되는 실존주의와 페미니즘은 엄밀한 차원에서 다른 데, 페미니즘은 인간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으며, 다만 그 개인의 삶에 '성별'이 자유를 앗아가는 기저의 역할을 맡았던 차별을 해체하고, 성별을 근거로 타인과 동일해지라고 강요하는 부름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것은 성의 동일성이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인정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무게의 물건을 들 필요는 없으며, 남성은 여성호르몬의 비율이 높은 이들의 신체적 특징이 그러하듯 자신의 털을 모조리 제거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단, 페미니즘은 성역할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담보한다. 만일 당신이 여성적인 여성이 되야한다고 교육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위해서 요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면, 당신의 정신은 이내 병들고, 지치고 말 것이다. 어떻게 봐도 그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만일 그러한 부자유를 한 쪽 성별이 다른 쪽 성별에 의해서 수세기 넘게 강요받고 있다면, 이는 한 가지의 현상으로서 철학자와 사회학자, 나아가 인류 전체가 해체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요리를 하는 것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찾았다면, 누구도 당신에게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버려라' 라고 강요할 순 없다. 당신은 성역할에 강요를 받았기에 그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일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도와 원인에 따라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한편, 개인은 각자의 행동과 선호의 기저에 사회로부터 교육받은 그릇된 성적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가에 대한 여부를 주체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리고 오직 그것으로만- 스스로를 그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탈피시킬 수 있다. 인간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너무나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은근한 방식으로 도처에서 학습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의 욕구가 어디에서 왔는 지를 아는 게 쉽지 않다. 페미니즘은 그러한 고찰을 용이하게 돕기 위한 도구이며, 인류로 대변되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이념이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인류라는 모호하고, 전체적인 개념 속에 존재하는 수로 헤아릴 수 없는 개인, 오로지 개인을 위한 것이다. 


 당연히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이념은 아니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남성의 권리, -마치 '남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자격증처럼 분류되어 얻는 혜택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것은 남성을 위한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을 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남성적인 사회는 결코 남성에게 이득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장했고, 그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스스로와 이상향의 괴리를 이기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에겐 페미니즘의 이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기존의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력에 의해서 곧잘 정의되던 여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뻗어나왔으며,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남성을 위해서 존재했던 예쁜 아내와 정숙한 딸, 신성한 어머니라는 역사적 폭력으로부터 여성이 개인을 탈피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얻을 수 있게끔 꾀하는 게 페미니즘의 초기 목표였다. 그러나 현대의 페미니즘의 목표는 달라졌다. 당연히 그것을 성취하는 방식은 근대의 그것을 위해서 노력했던 것과는 달라야 한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뛰어들어야 할 마차도, 뛰어들기 위한 가시적인 목표도 없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도 달라는 근대의 페미니스트와 같은 간절한 비명을 지를 필요도 없다. 그리고 보다 교묘하고, 위험하며, 강제적인 형태로 변한 남성중심적 사회에 맞선 지금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다음 목표에 대한 고찰, 특히 젠더 확장성에 대해서 논의를 하기에 더없는 적기가 될 수 있다.


 현대 페미니즘의 새로운 태제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산물인 편견이 어떻게 남성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지에 관한 것이다. 이 사회의 고정관념과 달리, 남성중심적 사회는 전체적인 남성에게 기회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남성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흔히 칭찬으로 이용되는 "남자답게", 혹은 "남성적"이라는 단어를 해체해보자. 목표지향적, 야성적, 독선적, 고집을 부리기 좋아하고, 파란색을 좋아하며, 용감하고, 우는 것을 싫어하는, 따위의 수십개의 형용사가 그 안에 들어있다. 한편, "남자답게"라는 언어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 는 강요를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탈락한 남성이며, '여성적인 남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도태돼야 마땅한 돌연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개인으로서의 남성을 압제하고, 종국에 그의 개인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자유를 앗아가고, 생활을 말살시킨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성별의 규제로부터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생활을 이끌어가게끔 할 수 있는 임무를 안고, 필연적으로 이러한 임무의 영향은 인류, 즉 그 거대한 명칭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자를 향한다.


 남성의 권력이란 앞서 설명했던 '우월감'이 사회 전반에 걸쳐서 구체화되고, 공고해진 결과다. 구체화된 남성적 권위는 일상적인 것부터 출발하는 폭력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약한 척을 하고,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서 뭐든 지 희생하며, 여자는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한다, 는 고정관념은 여성 전체를 향한 폭력이다. 우연히 여성이란 성별을 부여받은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는 애국자고, 강인하며,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성실하고, 직장에 충실하며, 약한 소리를 내지 않고, 쉽게 울지 않고, 또, 그래야 한다. 과연 남성들이 이러한 처우에 대해서 감성적인 접근을 하면서 연대의식이라는 싸구려 감성 하에 그러한 폭력을 수용하는 데 그치는 입장을 언제까지 고수할 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은 보다 비가시적인 형태로 일상에 스며들면서 서양의 근대철학이 끊임없이 시도했던 여성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답습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괴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이중적인 고통을 안고있으며, 그러므로 이러한 고통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명백하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믿지 않을 지언정 성에 대한 차별은 옳지 않다고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일말의 불편을 느끼게 만든 게 근대 페미니즘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쉽게 일상에서 이런 점에 관해 말을 꺼낼 수 없다는 점이 현대 페미니즘이 마주본 장벽이다. 제 아무리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볼 수있는 차등적 권위는 가시적인 형태의 권력보다 더욱 무섭다. 그것은 개인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사회적이며, 사소하기에, 우리의 일상 속에 깊게 스며들어서,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존재한 나머지 그에 대해 지적하는 시야가 넓은 이들을 향해 ‘고작 그런 것 갖고 법석을 떠냐’ 는 핀잔을 타자로부터 듣게 만든다. 예를 들어보자. 남자는 목표지향적이고, 업무에서 성취를 얻는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답습한 후대가 본 가정상은 어머니가 밤낮없이 가사노동을 하면서 남편의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서 양파를 깔 때, 힘들게 일을 하고 온 아빠는 집에서 TV를 보면서 힘들었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들이다.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마주본 차별이란 이처럼 대단히 일상적이고, 사소하며, 그렇기에 거대하며, 폭력적 사회에 저항을 포기한 시민들의 암묵적 합의 속에 이러한 성별상에 예외는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처럼 사적이고, 교묘하며, 일상적인 차별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근대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여성은 투표권을 얻는 것으로 남성과 평등해지는 것을 일부 획득할 수 있었다. 근대의 페미니스트에겐 획득해야 할 '눈에 보이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페미니스트는 그런 목표를 갖기 힘들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여자가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엄마가 밥을 하고, 남자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생각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는 영영 그것을 깨부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법으로 명시할 수 있거나, 공간적으로 연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일상적이고, 사소한 권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유리 천장을 만드는 것은 논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페미니즘을 개인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 혹은 페미니즘이란 미명 하에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용인하는 것은 페미니스트가 되기에 적절한 방법이 아님을 나는 논증했다. 인류의 평등을 지향한다는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페미니스트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성적 문제에 관련하여 간섭 혹은 강제를 할 수 있는 기제가 될만한 어떤 종류의 고정관념, 편견을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어떤 태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일까.






Contending for the rights of woman, my main argument is built on this simple principle, that if she be not prepared by education to become the companion of man, she will stop the progress of knowledge and virtue;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인권을 성취하기 위해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한 원칙 위에 서 있다. 바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지식과 가치를 발전시키지 못할것이라는 점이다. 


 일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일 지언정 성별은 일상 속에서 개인의 생활을 규제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스스로를 '코덕'이라고 부르면서 수십개의 화장을 사거나, 매일 같이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 혹은 프로틴 파우더와 닭가슴살을 넣은 스무디를 마시고, 헬스장에 다니면서 근육을 유지하는 남성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이 스스로, 좋아서, 그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있음에 이의를 제기할 순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여성 혹은 남성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생활을 시작조차 했을까? 만일 당신이 여성이 아니라면 수십개의 색조화장품을 얼굴에 발랐을까? 당신이 남성이 아니라면 남성성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근육을 부풀리는 고통스러운 수십가지의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을까? 


 고대부터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던 남성 철학자와 남성중심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한 남성중심의 미디어를 한 순간에 타파하기는 어렵다. 또한, 인간의 개인성을 규제한다는 명목 하에 성 호르몬이 위시한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페미니즘에 관련된 딜레마를 양산했다. 여자는 아기를 돌보는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 편하게 일을 하는 것을 목표로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적인 여성이 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마치 성별을 한 가지의 도달해야 하는 자격증처럼 여긴, 이러한 풍습이 근대 서양의 남성 백인 철학자가 제시했던 성별에 대한 구분이었으며, 대개 여성의 가사노동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획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적이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시작해야 한다.그리고 이와 같은 강요의 근거를 해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향한 설득'만큼 훌륭한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개인의 치열한 노력에 의해서 이룩할 수 있다. 한 무리의 페미니스트가 모여서 연대의식을 꾀하는 게 의미가 있기 위해선, 그 자리에 모인 개인이 타인과의 의견 공유 등을 통해서 각자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개인의 내부적 변화를 거치지 않고, 말만 앞서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의미가 없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며, 오직 이러한 결단을 통해서만 사회적으로 그것이 드러나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성보다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는 것을 스스로에게 완전하게 설득시킨 여성은 어떤 자리에 가도 여성을 감정적인 동물이라 깔보는 남성에게 우아하게 대응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변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타자와 언쟁을 벌이는 것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 필요하지 않다. 즉, 당신이 트위터에서 '한남충'이란 단어를 100번 사용한다고, 10번 사용했을 때의 당신보다 개인의 인식 변화에 가깝게 다가서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효과를 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서, 오직 당신의 결과로서만 우월해질 수 있다. 이 글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다. 개인의 인식 변화를 위한 설득은 필연적으로 양자를 향하면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차별을 학습한 현대 여성이 타자에게 나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선, 우선 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가능성을 완전하게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사회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의 모든 노력을 나는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다. 차별이 존재하는 한, 그것에 대한 저항을 위시한 의견을 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내부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개인의 경험에 의거하여 공감한다. 뿌리깊은 유교국가에서 여성으로 당해야 했던 차별에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의 여성은 인간 이하의 것으로 취급을 받았고, 벼슬을 할 수 없었고, 아녀자로서 몸가짐을 조신히 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았던 일부 조선의 예술가와 학자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다. 감히 남자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폭력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하며, 이를 해체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우리는 그 모든 인간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대의 페미니즘은 방황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성별로 고착된 일반화로부터 개인성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습득하는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정반대로 발전해서, 한 번 무의식에 얻은 편견을 해체하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그 편견을 해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의 첫 출발은, -내가 나의 성별로 구분되지 않아도 좋다고 인식하는 것의 시발점은- 바로 나 자신에게 그것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즉, 현대의 평등 의식은 '여성은 분홍색 옷을 입는다.', '여성은 아기를 좋아한다.', '여성은 화장품을 좋아한다.', '여성의 마음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다.' 등의 주장을 당신이 믿지 않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은 한국 남성을 '한남충'으로 부르거나, 그보다 더한, 남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언어 사용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외려 그러한 행위는 의도했든, 아니든, 전부 '페미니즘'의 지류로 편입돼서, 남성 권력의 수혜자와 피해자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깊은 골을 만들 뿐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단언하는 이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정말로 여성에 대한 모든 편견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성별을 향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당신이 하는 모든 '평등'에 관한 말은 겨울에 약속하는 개화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로지 당신의 내부에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평등은 시작한다. 평등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평등은 우리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선, 인류 전체가 각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되, 남성과 여성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인류 전체를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페미니스트란 인류의 평등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일컫는 총칭이다. 평등은 획득해야 하는 것이고, 실현해야 하는 것이며, 후대에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페미니즘이 이뤘던 성과 위에 선 현대의 페미니스트는 이전과 똑같은 쇠구슬을 발목에 달았을 지언정, 새로운 허들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단언한다.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평등을 가장한 동등의식', 결국, 개인의 고유성을 압제하고, 동등이란 미명 하에 여성에게 남성보다 우월해질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갈 뿐인 또 다른 폭력에 불과하다.


 한편, 모든 인류는 평등해야 마땅하다는 이념, 헌법에 적시된 그 권리는 안타깝게도 늘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벽이 될 수 없다. 대부분의 평등에 대한 권리는 국가를 기본으로 갖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만일 당신의 국가가 사라지면, 당신의 평등할 권리는, 인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만일 당신의 아내, 친구, 남편, 혹은 당신 그 자체가 재일교포, 재미교포 등의 이중국적자라면, 혹은 차별을 당하고 있다면, 혹은 전쟁으로 인해서 국가가 멸망하거나, 당신이 피난길에 올라야 한다면?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명제로서 저장된 평등의식을 넘어서, 평등이란 이름의 인간의 기본권이란 현실에서 끊임없이 실현시키고, 행동으로서 확립해나가야 하는 것으로서 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 인간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대우하는 우리의 실천적인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당신이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데 그쳤다고 해도 상관없다. 만일 당신이 인류의 평등에 관심을 갖고, 나 자신의 삶과 후대라는 양자를 위해서 성별이 하나의 자격증처럼 인간을 차별하는 근거가 되거나, 성별을 근거로 '동등성'을 강요하는 현상에 저항을 한다면, 당신은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이 있다. 어쩌면 저들의 말은 사실일 지도 모른다. 인간은 성 호르몬의 지배를 받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도 그 호르몬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내가 어떤 성 호르몬을, 어떤 비율로 갖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쉽게 타인이 관찰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즉, 성별로- 나를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이 싸워야 할 폭력이다. '여자답게', '남자답게' 란 형용사는 그 자체로 여성/남성 호르몬의 비율을 압도적으로 갖춘 누군가에 대한 묘사가 될 수 있을뿐, 타인이 그를 향해 줄 수 있는 칭찬이나 비난으로 사용되선 안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별이 나의 삶을 어느 정도 제약을 하고, 확장하는 지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개인이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권리에 해당하며, 그러한 권리는 그가 어느 국가의 인간이건, 어떤 인종을 갖고있건,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타인의 배려에 의해서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적으로 굴어라, 남자답게 행동해라, 는 교육은, 장 자크 루소라는 근대의 백인 남성 철학자가 주장했던 것과 달리, 감히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서 개인과 시대를 향해서 자행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일련의 의견의 홍수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파생된 수많은 지류가 페미니즘을 두르고 있다. 나의 주장도 한 가지 지류에 불과할 것이다. 단, 페미니즘은 자유의 철학이다. 당신과 나는 동등해지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평등하기에, 여성인 개인은 남성인 개인보다 우월해져도 된다. 우리는 남성적 사회를 파괴할 권리가 있고, 여성적 사회를 만들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가능성을 옹호할 수 있는 기제를 페미니즘은 유일하게 담보한다. 또한 이러한 페미니즘은 남성도 자유롭게 만든다. 당신은 더 이상 경제적인 지위를 근거로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르고, 당신의 꿈은 주부가 되어도 괜찮으며, 사랑에 상처받고 우는 당신에게 '남자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는 가에 대한 여부는 타인의 관찰에 의해서 -특히 反페미니스트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서- 섣불리 포착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일컫는 개인의 필사적인 내부 관찰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과연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평등한 세상은 이곳에 도래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서 로맹 가리가 ‘감동적’이라고 표현한 카프카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비명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젠가 인간을 해치는 모든 억압을 깨부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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