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의 의미
3.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페미니스트가 될 순 없다.
이 글을 시작하기 전, 모든 페미니스트가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처럼, 혹은 남성 권력에 의해서 사상 검증을 받는 것처럼 발언해야하는 그 문장을 나 역시 말해야 할 것 같다. 바로, "너 메갈이니?" 에 대한 대답이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한국에 존재하는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도 하지 않는다. '오늘의 유머', '메갈리아', '웃대', '여성시대', '쭉빵', '알싸', '엽혹진', '일간베스트' 등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나에게 개인 SNS로 충분하다. 오히려 익명성을 토대로 비이성적인 발언과 개인의 분노를 분출하는 자들이, 상대와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고 상정하는 그 온라인 커뮤니티를 부유하는 아이디들의 안일한 태도에 나는 심각하게 염증을 느끼는 바다. 반 세기 전, 목적 없는 혁명과 폭동, 의미없는 마녀사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던 이들은 적어도 그것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그런 짓을 하는 지조차 알 수 없게 됐고, 모두가 닉네임 밑에서 강제적으로 동등하며,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삭제하는 데 일말의 껄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 메갈이지?" 남성은 나에게 물었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은 불편한 그 대답을 미리 해주겠다.
"아니,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사이트를 직접 이용해본 적 없기 때문에,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를 섣불리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시도는 타인의 2차적 해석 위에 창작된 "허구적 진실"이 될 것이다. 그 사이트를 두고 논란을 부추기는 이들이 '메갈리아'와 탄생 배경, 성격 등이 전혀 다른 '일간베스트'와 엮어서 분류하는 것을 보면 메갈리아를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전에 메갈리아를 비롯한 트위터에서 발생한 페미니즘의 지류에 대해서 조사를 하면서, 나는 불편하고, 안타까운 딜레마를 마주볼 수 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메갈리아와 트위터에서 일고 있는 남성 일반을 향한 공격적인 목소리가 못 견디게 불편하다. 여성의 폭력성 그 자체에 대한 불편함인가? 남성을 향한 폭력은 절대적으로 지양되야 하는가? 아니,
남성 일반을 향해서 외치는 그 소리 없는 괴성이란 스스로의 내부에서 쉽게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던 이들이 그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견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고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본 장은 "남성 일반을 향한 무조건적인 분노 표출이 왜 진정한 페미니즘으로 분류될 수 없는 지", 두 가지 측면을 통해서 살펴본다. 첫 번째, 익명성을 토대로 남성을 향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인 가, 인류를 위한 것인 가, 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그 행위의 동기적 측면을 살펴볼 것이고, 두 번째, 과연 그러한 행위의 결과가 전체적으로 페미니즘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결과적 측면을 분석하면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 장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논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페미니스트가 될 순 없다.
한국의 현대 페미니스트는 '거짓 페미니즘'과 '진정한 페미니즘'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주장은 남성(타자)에 의해서 개인이 실천하는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견 그릇된 발언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종류의 철학적 이념도, 그 이념이란 미명 하에 자행되는 모든 행위를 그 이념의 지류로 편입시키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 인간 인식에 피할 수 없고, 선천적이며, 본질적인 형태로서의 선이 선행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모순이 될것이며, 그는 '가짜 실존주의자'가 될 것이다. 당연히 페미니즘도 진정한 페미니즘과, 그릇된 페미니즘이 존재한다. 단, 나는 메갈리아를 비롯한 특정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이 '가짜 페미니즘'의 근거라고 분석하지 않는다. 우선, 가짜 페미니즘과 진정한 페미니즘의 차이란 한 가지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가, 아닌 가로 대변되는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나 순진하다. 모든 철학적 이념의 본질적인 특성상 타자가 분석할 수 있는 명시적인 행위로서 그 이념의 신봉자의 진정성을 판단할 순 없는 법이다. 과연 스스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가, 아닌 가는 오로지 개인의 집요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으며, 페미니즘의 경우, 그러한 기준이 되는 바는 다행히 한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과연 당신은 페미니즘을 개인적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창구로 이용하면서, 페미니즘이란 미명 하에 무엇이든 스스로에게 용인하고 있는 가. 혹은 성별이 제약을 가할 수 없는 인류의 평등이라는 보다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의 삶의 변화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이득을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는 가, 에 대한 것이다.
페미니즘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설탕도 나는 그 위에 뿌리고 싶지 않다. 페미니즘의 본질은 말할 것도 없이 남성적 사회의 성별 간 권력의 이동이다. 쉽게 말해, 남성적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일견 모든 이에게 이득이 될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목적 뒤에는 이토록 파괴적인 힘이 숨어있다. -물론, 평등이란 측면에서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남성에게 부여한 남성적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한 남성에게 페미니즘은 이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의 측면에서 남성이, 남성이라 얻을 수 있었던, 남성적 권력을 완전하게 해체하는 그 과정을 페미니즘은 담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추후에 자세하게 논의한다.- 그리고 단언컨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 가장 헛된 노력이 바로 남성을 향한 실제적 폭력이다.
흔히 거울이론이라 불리는 "미러링mirroring"이란 명칭의 사고실험은 페미니즘을 논의하는 곳에서 늘 화두로 떠오른다. 때때로 미러링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한 훌륭한 자극제로 사용되는 게 사실이다. 차마 상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 그를 이입시킴으로서 설득을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미러링이란 미명 하에 자행되는 실제적 폭력이 페미니즘의 주변에 도처에 널리게 됐다. 마치 스너프 필름처럼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자행되는 끔찍한 돌연변이처럼, 가장 페미니즘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 페미니즘의 곁에 달라붙어 이것에 대한 논의를 흐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흡사 미러링을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처럼 상정하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면, 사고실험은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다. 미러링의 목적은 설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구체화되고, 현실에 옮겨지고, 또 다른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고실험이 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무기라면, 그것을 근거로 현실에서 혐오를 조장하는 것은 설득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과연 "미러링"을 시도한다는 미명 하에 남성의 성기의 크기를 조롱하고, 한국 남성의 줄임말 뒤에 벌레를 뜻하는 "충"을 습관적으로 붙이는 이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 혹은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페미니즘이란 미명 하에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개인적 분노를 표출하면서 페미니즘을 개인의 분노 해소 창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자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습득한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안팎으로 해체하고, 진정으로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세를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그것은 원래 갖고 있던 모국어를 버리고, 외국어를 모국어로서 습득하는 것만큼 힘든 과정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는 아동에게 끊임없이 여성은 동일하게 분홍색을 좋아해야 한다는 여성성과 남성은 동일하게 로봇만 갖고 놀아야 한다는 따위의 남성성을 강제하고 있고, 미디어는 상업성이란 미명 하에 여성은 예뻐야 하고, 남성은 그것을 감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의 전통 서양에서 얻은 고정관념을 비판하지 않고 끊임없이 제시한다. 후에 이러한 것을 습득하면서 자란 아동이 성을 근거로 당하는 차별 대우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체해나가기 위한 길을 걷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치 저소득 계층이 스스로를 보수라 자처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그와 같은 차별에 스스로가 익숙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 그와 같은 차별을 앞에서 저항같은 행동을 하겠는가. 이미 그러한 차별에 적응한 내 삶은 너무나 편안하며, 굳이 그곳에 반기를 드느니, 그러한 차별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쉬운 데 말이다.
그러나 후자는 개인의 욕구 분출을 위해서 페미니즘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첫째, 개인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함이 그들의 페미니즘의 목적이므로, 그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과연 진정한 의미의 성평등이 무엇인 지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 되는 대로 지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그와 같은 페미니스트가 증가할수록, 즉, 페미니즘을 한 가지 트렌드의 지류로 삼아서 개인의 영달을 꾀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치는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본래 의미를 퇴색시키는 변질된 지류로서 기능할 것임은 두고 볼 필요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개인이 성별이라는 특징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지향할 수 있도록 평등이란 가치를 현실에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깊은 성찰과 우리 사회를 향한 앙가주(engage) -의식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인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되는 근거로, 실존주의의 용어.- 는 필수적이다. 여성은 예뻐야 한다면, 나는 예뻐지겠다. 여성은 날씬해야 한다면, 나는 날씬해지겠다.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만일 남성중심적 사회에 적응을 하는 게,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더할 나위 없는 길이라면, 그렇게 나는 살겠다. 그와 같이 안온하고, 따뜻한 폭력에 길들여지지 않고, 인류의 평등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개인의 삶을 넘어서 제 삶과 의식을 후대로 투영시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나 혼자만의 삶을 위한 게 아니라, 인류의 평등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고, 그와 같은 이념을 신봉하고, 실천시키는 페미니즘은 나 혼자 만의 삶을 넘어서야 하는 보다 큰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절대로 여성 몇 명이 모여서 남성을 욕하고, 서로의 불쾌한 경험에서 위안을 받는 것이나, 함께 남성 일반을 희화화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떠나는 자리에 그것은 그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성을 근거로 타인과 동등해질 것을 개인에게 강요하거나, 성을 하나의 자격증처럼 여기면서 근거없는 차별을 하는 현실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담보하는 고정관념에 오염될 수 밖에 없었던 자기 의식에 대해서 끊임없는 점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말 뒤에는 그처럼 환경에 지지 않고, 필사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잠시간의 유행에 흔들리거나, 개인이 얻은 체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일평생 이뤄내야하는 자기의 업적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항은 차갑고, 순종은 따뜻하기에, 이와 같은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SNS,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들의 페미니즘을 나는 쉽게 믿을 수 없다.
아마도 사건의 발단은 한 소아성애 반대를 부르짖는 트위터 계정이 올린 사진이었다. 여성 아동에 대한 남성의 범죄적 환상을 구현한 그 사진은 나에게 돼지를 도축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역겨움을 불러일으켰고, 며칠 간의 불면과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그 트위터 계정주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성 일반의 역겨운 본성에 대해서 토로한다는 미명 하에 인간의 사지를 훼손하는 범죄에 희생된 여성 아동에 대한 소개를 사진을 곁들여서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페미니즘과 로리타 반대에 대한 글을 꾸준히 올리던 나는 그 사진을 본 뒤에 설마 그와 같은 행위와 나의 글쓰기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 겁에 질릴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내 글을 읽는 사람도 이와 같은 역겨움을 느낄까? 과연 이 트위터 계정 주인과 내 행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어서 그 사진을 게시한 이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트위터의 계정주인은 왜 이런 사진을 공개적인 장소에 올리는 것일까? 과연 이 사진을 게시한 계정의 주인은 이것을 등록하면서 진정 타인이 지나친 역겨움과 충격, 공포를 받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과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이 사람은 타인에게 충격을 넘어서, 공포를 안기는 이러한 이미지를 주저없이 올리는 이 행위를 할 때, 왜 단 한 번이라도 사진이 위험하니까 주의하라, 따위의 경고를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토록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사진을 꾸준히 게시하는 게 정녕 인류를 위한 페미니즘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그 외에도 나는 "로리타"를 반대한다는 미명 하에 여성 아동에게 자행된 끔찍한 이미지 등을 주저없이 트위터에 올리는 이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여성 아동의 신체 일부가 훼손된 사진을 주저없이 올리면서, "로리타가 나빠요!" 라는 한 마디를 적는 것으로 그들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이제는 너무나 흔해져서 그 예로 들기에도 적절치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남충"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한국 남성의 성기를 조롱하는 이들의 페미니즘이란 과연 "평등"이란 이념과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과연 남성을 성적 표현으로 비하하는 단어를 쓰면서, 얼굴을 드러내놓고 하지도 못할 말을 트위터에 올리면는 것이 페미니즘일까?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한남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페미니즘의 전부일까?
한편, 덕분에 나는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다. 며칠, 아니, 몇주간 나의 의식 위로 떠오르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욕구의 간극 사이에서 갈등한 끝에, 마침내 내가 올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누군가는 그러한 이미지를 목격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만큼 심각하게 부상하는 여성 아동에 대한 타자화의 현상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체험으로 인해서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반면, 그러한 이미지를 아동과 미성년자가 포함된 불특정 다수가 가감없이 볼 수 있는 공간에 적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한 이미지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트라우마를 안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이미지를 게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모로 봐도, 그것은 그 계정 주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이용하는 모든 아동이 그 사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 또한, 그토록 즉각적으로 구토를 일으킬만큼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 외에도 소아성애에 대한 반대를 촉구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 지 있다.
마침내 그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뒤에야, 나는 남성이 유약한 여성에게 저지르고자 하는 욕구를 마주볼 수 있었고, 그 이미지에 나온대로 범죄를 당했던 어린 아이를 상상 속에서 안아줄 수 있었다. 괜찮다고, 그런 범죄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아동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의 트위터를 읽을 사람들이 무엇을 당할 지조차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쉽게 지울 수 없는 공포를 안기길 좋아하는 이들이 정말로 우리 사회의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페미니스트'라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약자를 향한 또 다른 폭력이며, 폭력은 그 자체로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만의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선택하는 가는 각 페미니스트가 결정할 문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그 방식은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종류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에 대한 자기 반성이 선행돼야 마땅하다. 미러링은 뛰어난 사고실험의 형태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면서, 지나치게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남성 일반을 향한 차별없는 공격을 가하면서, 현대의 페미니즘이 발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논의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측면이 없잖아 있다. 이러한 폭력은 남성 일반을 향한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의 평등을 지향해야 마땅한 페미니스트에게 깊은 딜레마를 안긴다는 위험을 낳는다. 이에 대해 일부 페미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남성적 사회를 전복시키는 사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라고. 그러므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방식도 폭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이러한 착각은 페미니즘이 남성적 사회를 전복시킨다는 현상 자체에만 주목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한편, 좋게 말하면 남자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성 일반을 향한 폭력적 언사를 정당화하는 이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알아듣던가?
페미니즘은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철학, 그 중에서 성별이 평등을 저해하는 기저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근거에 대한 담론이다.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선 실존주의를 공부하고, 관념론자가 되기 위해선 관념론을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페미니즘에 대한 학습을 필수적으로 거쳐야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일컫으면서, 인터넷에서 접한 수많은 페미니즘의 지류를 훑는 데 그치고, "한남충"이라는 단어에 개인적 분노를 투영하는 데 페미니즘의 한계를 정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페미니스트에게 씻을 수 없는 딜레마를 안기는 동시에,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젠더를 넘어서 양자에게 향하는 것을 막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선 인류의 평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성별이 제약을 가하는 부분은 어디로 국한되어야 하고, 어디에서 그렇지 말아야하는 가,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평등"이란 결코 보이는 것처럼 간단한 개념이 아니며, 페미니스트라면 성별이란 장벽이 인류의 평등을 저해하는 기저로 사용되는 근거와 과정에 대해서 예리한 눈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한 번쯤 성별로 인해서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이며, 혹은 그로 인해 공포, 불안 등을 삶에 학습한 이들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남성에 의해서 은근하고, 강제적으로 덧씌워진 '여성성'을 마주보고 경악을 느낀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해체하기 위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개인의 경험을 토로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행동의 이면에는 인류의 평등이라는,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페미니스트가 될 순 없다. 특히 당신이 페미니즘을 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남성에 대한 일반화를 비롯한 폭력과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인류를 위한 길을 걷는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남성을 향한 폭력, 그 자체는 폭력일 뿐, 만일 그것이 페미니스트의 목적의식을 갖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페미니스트는 제멋대로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아니라 인류의 성평등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안팎으로 노력하는 자들의 총칭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미러링은 남성을 향한 설득의 수단이 될 수 있고, 폭력적인 이미지는 대중에게 자성을 요구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페미니즘이 거기에서 그친다면, 과연 나는 진정으로 인류의 평등의식을 고양시키는 페미니스트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지, 혹은 페미니즘을 이용해서 개인의 분노를 해소하고 있을 뿐인 지 점검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러한 행위는 개인에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당신이 '나는 페미니스트다.' 라고 발언하는 그 순간부터 당신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의 지류로서 편입되어, 페미니즘이란 사상 자체를 둘러싼 논의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로리타 반대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당신은 인류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가. 혹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있는가.
물론, 여성의 분노의 크기는 남성에게 받아온 억압의 깊이를 증명하는 비가시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앞서 울스톤크래프트는 남성적 사회를 이룩하고, 여성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취급하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남성이 내건 세 가지 조건을 이야기했다. 바로, 이성, 덕, 경험이다.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철학"처럼 보이는 그럴 듯한 근거를 자연스레 내세웠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남성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남성은 여성을 공격하고, 조롱하고, 희화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성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기 위해서 페미니즘과 같은 연대의식, 공동체 따위를 만들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이란 기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에게 탈락시킨 교육이란 기회를 발판삼아 여성의 머리 위에 올라섰고,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허구를 시대와 국가를 넘어서 전파시켰다.
그러나 근대 페미니스트의 노력 덕분에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은 여성은 그러한 차별에 맞서 보다 구체화된 형태의 이론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남성적 사회의 시발점은 오직 한 가지의 신념에서 비롯한다. 바로,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근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지 새삼스레 논의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에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단, 이러한 편견의 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페미니즘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남성은 평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대부분이 여성으로 구성된) 페미니스트는 평등 이외의 것을 바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지금의 사태, 평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를 '거짓말쟁이'와 '위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나는 평등은 동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했다. 동시대의 페미니스트가 혼란을 겪는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서 시작한다. 현대의 페미니스트가 목소리를 내야할 곳은 더 이상 투표권 혹은 결혼한 여성을 소유물로 인식하는 남성의 재산권처럼 인권의 근거가 되는 기본적 권리가 아니다.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는 법을 명시하라는 외침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사회 계층의 권력의 이양을 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지기 위해서 남자는 그동안 남자라서 당연하게 누렸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권력의 양상이 이전과 변했다는 게 문제다. 그것은 보다 내밀하고, 은근하고, 비가시적이며, 그만큼 삶의 이면에 깊숙이 파고들어서 좀처럼 떨어져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페미니스트는 자문해야 한다.
이제, 페미니즘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