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계약이 만료되었습니다
삐빅! 계약이 만료되었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다. 이번에는 예정된 계약 만료 시점보다 4개월이나 앞당겨서 통보받았다. 이쯤 되면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자괴감이 밀려온다. 무엇보다 이번엔 꽤 좋은 동료들을 만나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틈을 봐주지 않는다. 참, 냉정하다.
팀장이 부재중이라 사수가 그 무거운 임무를 맡았다. 어쩐지 어제오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더라니.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밥도 먹지 않고. 하긴, 그에게도 이런 일은 어려울 것이다. 아마 처음일 수 있다. 오랜만에 단둘이 차를 마시자고 해서 올해 내가 담당할 사업에 대해 전반적인 리뷰를 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손에는 수첩과 펜을 들고 나섰다. 자리를 잡고 마주 앉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최대한 무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갈피를 못 잡는 내 동공의 흔들림에서 그는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1분이나 지났을까? 내부 상황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는 진부하지만, 그들만의 정답 같은 말을 들었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마 사수가 그놈의 미안하다는 소리를 두 번 했으면 짜증을 냈을 수도 있다. 사수는 다행히 단 한 번의 사과와 양해를 구하는 식의 통보를 했고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상반기가 흐트러졌다. 1년은 아니어도 6개월은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도, 경험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맞닥뜨리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장실을 한 번 들러 숨을 고른 후 자리로 향했다. 퇴근까지 30분 남짓 남은 시점에 동료들에게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 말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부산스럽게 하던 업무를 정리하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하는 작은 수다를 나누었다.
통근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잠들었을 여느 날과 달리 갑자기 찾아온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했다. 각종 커뮤니티와 SNS를 뒤적거렸다. 한 출판사의 서평단에 지원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양한 채용 사이트를 들락거릴 나를 상상하니 그 언젠가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보다는 사회화가 되었으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들 준비를 하고 넷플릭스를 켰다. 잠들려고 애써봤자 곧 벌어질 수 있을 장면들에 잠식당할 수 있으니까 괜찮은 영화라도 보고 자야겠다 싶었다. 보고 나면 그 여운이라도 붙잡고 잠들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의 콘텐츠
- 비발디 : 사계 '여름' 3악장
-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이 글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하나, 특정 인물 및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 상상력을 동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