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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May 31. 2022

직접 쓰지 않아도 좋은 일기장

말하고 나면 에피소드 | 내 모든 이야기는 글감이 된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이 넘게 엄마와 얘기했다. 습관이 되어 대학에 가서도, 첫 자취를 할 때도 거의 매일 통화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는 띄엄띄엄 통화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마침 수업이나 출퇴근, 학원, 모임 같은 것들이 적절한 핑계로 자리매김했다. 


해외에 살아보겠다고 나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통화하기 어려웠다. 주중에는 정해진 일과에 따랐고, 주말에는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후 연수원에서 나왔고 더더욱 전처럼 연락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부터 엄마의 카톡이 늘었다. 내게 바로 전화하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카톡으로 하기 시작했다.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엄마가 한 번에 소화하기 어려워 들어달라는 식이다. 물론, 이 대화는 일방적이지 않다.


엄마는 인간관계에 대한 선이 분명해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상대방이 엄마 기준보다 과한 친근함을 표시하면 버거워한다. 그만큼 도덕적 기준도 높아서 쉽게 상처받기도 한다. 종종 엄마에게 그런 상처를 잘 덮을 수 있는 방법 혹은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던진다. 엄마는 의아해하면서도 혼자 생각정리를 하고 나서 실행해본다. 그러고 나서 정리된 마음을 공유하고, 나는 기꺼이 기뻐하며 듣는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서로를 기록 없는 일기장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오늘도 한 차례 지나간 일에 대해 카톡을 하길래 전화를 걸었다. 머뭇거리던 엄마는 금세 그동안 해치운 일과 당시 마음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 얼마 전 꾼 꿈에 대해 말해줬다. 큰 방을 자신의 집이라 소개하는 나를 만났는데 집이 너무 어두워 다른 곳으로 알아보자며 함께 나왔다고 한다. 꿈 얘기를 듣자, 최근 알아본 다음 방에 대해 말했다. 밝고, 주방과 가까우며 언제든지 나가 걸을 수 있을 거 같다고. 


엄마는 한참 듣고 있다가 거기서는 산책을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기분에 쉽게 지는 날이 많아지지 않냐며 다 잘될 거라고 말했다.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정리된 구간을 말하고 나니 속 시원했다 (고해성사 안 해봄, 무교임). 마치 마주 보고 이야기하듯 길고 긴 통화를 마치자 허기졌다. 항상 그랬듯 이번 통화도 일기에 쓰지 않을 거다. 엄마에게 말해두었으니 우리는 느닷없이 목적어만 말해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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