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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Aug 21. 2022

8월 3주차 #안정 #만남 #에너지

억압을 받고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는 반항할 수 있다. 불평등 앞에서 저항할 수 있고, 낙심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불공평한 게 너무 많지만 계속 나아가고 전진해야 한다. 인생이란 모험은 아름답다

<파친코> 이민진 작가


발저는 말한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 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 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 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것을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한 '산책 예찬'


다행인 건 기획팀이 회고를 진행하면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거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탄하며,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낯선 방식으로 일했고, 익숙한 방식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앗, 이거... 변혁 정의 아냐? ... 이거... 혹시 혁명 아냐!?!?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다큐멘터리 <어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이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2013) 상영회 후기


호텔에서도 룸메이드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지만,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유통업계에서 인정받으면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결혼, 임신, 출산을 지나 독박 육아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할 여력이란 없었다. 양육비도 제 때 보내지 않는 전 남편은 자기 일도 하고 새로운 연애도 하는 와중에, 쥘리의 기회만 유독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걸 되찾는 건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원래의 궤도 위로 올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건 단순히 욕심의 문제가 아니다.

[손희정의 K열 19번]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풀타임>


결국 실패해도 '정말' 괜찮은, 사회적 안전망이 있는 사회를 들어야 한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더라도 행복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유엔의 '2022 세계 행복보고서' 따르면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146개국  59위에 그쳤다. 1위는 핀란드였다. 두터운 복지로 단단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낸 국가다. 지금 정부의 역할은 무엇일까.

갓생은 트렌드가 아니다. 청년 세대가 보내는 위기의 시그널이다.


-”폐를 끼쳐줘서 고마워”는 이 책에서 제가 발견한 가장 보석 같은 말입니다. 일본 사회는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회로 알고 있었는데, 당신이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아시다시피 일본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사회가 점점 전환되고 있죠. 사람들이 일찍부터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타인의 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습관을 들이면, 나이를 먹었을 때 주위와 원활한 ‘민폐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사회관계 자본을 이루는 화폐의 단위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의 화폐 대신 관계의 자원인 ‘민폐’가 돌고 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훨씬 더 귀엽고 뻔뻔해질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완벽한 사회는 어떤 국가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당사자가 ‘계속’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해요.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멀리 돌아가는 길 같겠지만, 그보다 짧은 길을 저는 모릅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아들의 장애를 알고 강점만으로 싸우기를 그만두었다


어린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린이 해방군이 나타나 학원에서 탈출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이다. 어린이들이 소영웅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식으로 그려진 것도 씁쓸하다. 어린이를 가두는 것도 어른이고, 어린이를 해방시키는 것도 어른이라는 묘사는 한계가 분명하다.


변화가 일어나려면 눈물짓는 개인적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아이들의 놀이와 건강과 행복에 대한 사상, 철학,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동감은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에 답답함이 생기고, 그럼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20년 놀이 운동가 "방구뽕은 어린이 해방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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