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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베리 May 23. 2022

비워지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자리가 있어

지나고 나면 에피소드 | 내 모든 이야기는 영감이 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해 마주하니 다행이란 마음이 앞섰다. 할머니가 살던, 이제는 삼촌의 집인 곳에 모두 모였다. 삼우제까지 한다고 하니 겸사겸사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던 집안은 그들이 떠난 후 겨우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사실, 옆에 기대어 눕거나 농담을 던지게 된 건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직후부터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떠난 뒤 매일 무섭다고 했다. 친척 오빠와 삼촌들이 함께 있었음에도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종종 시간을 헷갈리고,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었다. 치매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혼자 시간여행을 시작했고 그 길은 아무도 같이 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웃음이 많아졌다. 물론 자식과 며느리를 쥐락펴락했던 기세가 쉬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나는 이때 즈음부터 할머니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가능했던 이유는 엄마가 할머니의 첫째 딸이나 며느리가 아니었고, 내가 외손주였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를 혼동하는 순간이  많아질 즈음  좋게 할머니와  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다. 그때 휴가를 냈던가? 2 3 동안 같이 먹고 자고 했다. 안타깝게도  요리 솜씨는 할머니와  굶주림을 채우기에 너무나 부족했고  부분은 외숙모가 커버해주셨다.


대신 나는 자꾸 할머니와 밖에 나갔다. 도보 5분 거리조차 할머니와 나가면 15분은 걸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같이 국수를 먹고, 미용실에 가고 싶었다. 택시를 불렀고 혹여나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할머니와 서있는 걸 보고는 모두 인사를 건네며 도와주셨다. 할머니는 자꾸 왜 돈을 쓰냐고 하면서도, 국수가 너무 맛있다고 했고 덕분에 이발했다며 고맙다고 했다. (참, 할머니는 웃음과 함께 고맙다는 말이 늘었다.)


이웃 할머니가 가져다 주신 가지를 바로 무쳐먹어야 맛있다며 나를 채근해 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앞에서 말했듯, 나의 솜씨는 이 세대 사람들에게 믿기 힘든 그런 거였다. 엉망으로 썬 가지를 보자 할머니는 한참 웃으시다 심각하게 내 미래 결혼 생활을 걱정하며 반찬은 사 먹으라고 했다. 사실, 할머니와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건 목욕이었다. 본인이 혼자 매일 씻는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역시나 이날도 그랬다.


힘을 빼고 싶지 않아 할머니에게 나를 씻겨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박장대소하시더니 얼른 씻고 나오라고 했다. 난 그대로 거실에 대짜로 뻗어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렸다. 할머니 집에 왔는데 손녀 하나 못 씻겨주는 할머니가 여기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 얼른 화장실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손주라 그런지 할머니가 많이 봐주신 거 같다. 엄마나 삼촌이 할머니가 할머니를 설득한 시간의 3분의 1도 걸리지 않았다.


치매 초반이었던 할머니는 다행히 나중까지도 이 기억을 거의 잊지 않으셨다. 마치 최근에 내가 들렀던 것처럼 말씀하시기도 했다. 치매 전, 할머니는 본인이 해야 하는 걸 어떻게든 하고야 마시는 분이다. 목소리도 크고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서슴없이 화내셨다. 게다가 종갓집 며느리였기에 명절에나 제사 준비에 아낌없이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러니 며느리들은 얼마나 많은 육체노동을 했겠는가. 그런 할머니를 한없이 웃게 하고 울게 하는 게 치매였다.


가족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웃었다. 웃다 보면 할머니가 옆에 앉아 있다가 소주 한 잔에 육회 한 점을 드실 것도 같았다. 혹은 얼른 자라며 불호령 하기도 할 것 같고. 사실, 아직도 어느 주말이 되면 엄마가 할머니 댁에 다녀와 뭔가 말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할머니가 있던 곳이 커 보이기도 해서 가끔은 왜 이렇게 넘칠까 싶은 적도 있다. 영향력이 너무 컸으니까. 그런데 그 자리가 비워지니 이 작은 자리에 사람 하나 앉는 게 뭐가 힘든 일인가 하는 착각이 든다. 꼭 그 자리가 비워져야 그 자리에 맞는 누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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