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토목, 이름도 생소한 지방의 어느 대학을 졸업했지만 나름의 기술이 있어서였을까 어렵지 않게 직장을 잡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자랐지만 한 가지 꿈이 있다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직장은 학부 전공을 살려 적당히 돈을 벌고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이제는 완전한 가장이 되었다. 도움받을 부모도 손을 벌릴 그 누구도 없기에 모든 일에 직접 부딪혀야 했고 시작은 늘 제로가 아닌 마이너스였다. 정확히 30년 전, 서른 살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첫 직장에 들어갔고 책임져야 할 두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를 둔 대한민국의 가장이 되어있었다.
같은 나이, 내게 서른은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은 나이다. 매일 아침 일곱 시에 집을 나서고 꼬박 여덟 시간을 근무하는 건 ‘해야 하는’ 일에 속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매일 출근을 하고 또 하루를 살아갈 돈을 버는 것, 끼니를 챙겨 먹는 것, 입을 옷을 세탁하고 내 공간을 정돈하는 것. 책임져야 할 가족도 돌봐야 할 사람도 없기에 고작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되는 것이다.
나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정년퇴직을 정확히 1년 앞두고 있는 아버지는 얼마 전 내게 말했다.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그는 한 직장에서 평생을 근무했고 이제 막 마지막 해에 접어든 터였다. 고작 몇 년, 얼마 되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인데 아버지라고 왜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았겠는가. 집에서는 힘든 티 한번 내지 않은 그에게도 상사에게 혼나서 힘든 날이 있었을 것이고, 퇴근 후 친구들과 한잔 하고 싶은 날도 있었을 테다.
직장생활을 갓 시작했던 서른 살 사회초년생의 그가 환갑이 되기까지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이끌고 총 여덟 번의 이사를 했고 네 곳의 지역으로 옮겨 다녔고 직장 생활 절반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동안 아이들은 모두 장성하였고 아무것도 없이 마이너스에서 시작했던 결혼생활에서 서울 끄트머리 어딘가에 넓지는 않아도 네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한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다.
60번째 생일이 지나고 얼마 뒤,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 그의 명함에는 짤막하게 ‘시니어’라는 직급이 새겨졌고 주 3일 출근, 24시간 근무를 시작하며 그는 전에 없던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다. 사무실에서는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배치받았고 특별히 주어진 업무도 책임도 없이 비슷한 처지의 시니어들과 마지막 남은 일 여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30년의 끝이 이보다는 의미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30년 간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 결승선에 무엇을 맞닥트리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허탈감은 그 자신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장삿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 밑에서 가진 것 없이 자랐다. 제법 나이 터울이 있던 형과 누나는 이른 나이에 공장에 취직하여 막내의 대학 입학금을 댔다. 그렇게 스무 살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의 아버지는 삶의 방향에 대해 알려주는 이 하나 없이 무엇이든 그저 최선만 다하며 살았다.
대학 4년을 학군사관후보생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군인 사택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대위로 전역 후 자리 잡은 직장 사택에서는 아이 둘을 낳고 길렀다. 가정에서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로, 직장에서는 김 사원, 김 과장, 또는 김 부장으로 불리며 지난 30년 간 그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그가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은 모든 게 이제는 조금 버거워진 이유에서였다. 아니 어쩌면 늘 버거웠던 삶을 견뎌낼 힘이 이제는 조금 약해진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정을 이룬 이후로부터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그렇게 매 해를 앞만 보고 살아온 그이기에 몸과 마음을 열심히 작동시키던 모터가 이제는 동력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다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