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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 Jun 28. 2021

내가 독거노인이냐?


   아직 내가 일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다. 어버이날이었는지 시어머니 생신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등교시킨  급하게  한술을  속에 밀어 넣은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잠시  전화를 받으신 시어머니의 첫마디에 나는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내가 독거노인이냐?”

날카로운 시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 했다.

전화를 드린 시간은 오전 9시 20분.

‘뭐가 문제지?’

‘왜 여기서 독거노인이 나오는 거지?’

‘나 아직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뭘 잘못한 걸까?’

나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다. 순발력도 없다.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재치 있는 말로 위기를 넘길 수도,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시어머니의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수화기만 붙들고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시어머니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9시 20분이네요. 애들 보내고 밥 먹고 바로 전화드렸는데..”

그러자 ‘심했다싶으셨던지 시어머니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노인네라 서운한 게 많아서 그러니 네가 이해해라.”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내 기분은 이미 상해 있었다. 잊어버리고 다음 날 전화를 드린 것도 아니고 미룰 수 없는 바쁜 평일의 아침 일과를 처리하자마자 드린 전화였다. 그날 일 중 미룰 수 있는 일은 내 아침밥뿐. 하지만 내 생각으론 분명 길어질 시어머니와의 통화에 허기가 질 것 같았다. 한 상 거하게 차려 먹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러하듯 식탁 한편에서 한 술 뜨는 것이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당시 나는 시어머니와 꽤 자주, 꽤 긴 통화를 하던 시절이라 그날도 길어질 통화에 대비해 밥을 먼저 먹었을 뿐인데 그게 시어머니께 ‘내가 독거노인이냐?’는 소리를 들을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때린 사람은 잊어버려도 맞은 사람은 잊어버리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시어머니의 그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정말 내가 너무 늦게 전화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혼자 맞는 생일(평일이면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쓸쓸함의 반어적인 표현이었을까?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전화했을 때도 어머니 기분이 별로 셨어?”

“아니. 왜?”

“당신이 아침에 문자 했잖아. 어머니한테 전화드리라고. 막 전화드리려는데 문자가 왔길래 당신이 통화하고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서 문자 했나 해서.”

“왜? 뭐라셔?”

“전화하니 대뜸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내가 독거노인이냐?’하고 소리 지르시더라고. 그 시간이 화내실 만큼 늦은 건가?”

“엄마도 참.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러시잖아.”

“당신은 아들이고 나는 며느린데 그게 맘대로 되나.”


그날 이후 남편은 이른 아침, 각자 출근과 등교 준비로 바쁜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뒤 스피커폰으로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아마도 남편 역시 그날 시어머니께 한소리 들은 것이 맘에 걸렸던 듯했다. 남편을 선두로 우리는 돌아가며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덕분에 나는 시어머니의 긴 수다에 맞장구쳐드리지 않아도 되면서 도리는 다하는 이득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전화를 받으시는 시어머니는  ‘독거노인’이라는 슬픔에 빠지지 않게 되셨을까?






이소영 작가의 <  아닌 선의> 보면 ‘수줍은 예의 없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마음은 그게 아닌데..’ 문학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수줍은 예의 없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성향의 사람들조차도 바로 알아채기 어렵다. ‘수줍은 예의 없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만 알아챌  있는, 아주 난해한 표현이다. 그날 시어머니의 ‘독거노인이라는 한탄이 혹시 내가 알아채지 못한 ‘수줍은 예의 없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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