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미 Oct 28. 2020

먹지도 않는 전, 어디 쓰시게요?



내가 결혼을 했을 때 시댁에는 명절을 포함 총 4번의 제사가 있었다. 시할머니, 시할아버지의 기제사에 설과 추석에 지내는 차례가 그것이다.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무슨 일만 있으면 휴가를 내고 오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시는 시어머니셨던지라 시조부모님 제사까지 오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웬일인지 시조부모님 제사는 남편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시어머니도 부르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부르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막상 제사 당일이 되니 가지 않은 것이 걱정되었다. 망할 놈의 K -며느리.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제삿날이 되면 전날 장 보느라 고생하셨다, 당일 아침 음식 하느라 고생하시는데 가지 못해 죄송하다, 음식을 다 하신 오후가 되면 수고하셨다, 제사를 모신 후에는 제사 모시느라 고생하셨다, 대역 죄인처럼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전화 끝에 돌아오는 대답은 “둘째 며느리는 편해서 좋겠다.”라는 시어머니의 가시 돋친 말이었다. 형식상이라도 '괜찮다'하시면 좋을 텐데 꼭 사람 속을 긁으시는 시어머니. 처음에는 고생하는 맏며느리에게 미안해 그러시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말도 반복해 들으면 질리고 듣기 싫은 법이지 않은가. 매번 하시는 편한 둘째 며느리 타령에 짠빱이 된 좀 어느 해 슬쩍 속마음을 내비쳤다.


“어머니, 저도 가서 일하는 게 편해요. 맘 불편한 게 더 힘들어요.”


그 후 시어머니의 둘째 며느리 타령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형님을 배려(?)해서인지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제사를 합쳐 한 번에 지내시기로 하셨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제사가 있기 때문에 제사는 여전히 4번이다.



시조부모님 제사야 한 다리 건너인 데다 남편도 가지 않으니 눈치가 덜 보였는데 시아버지 제사는 상황이 달랐다. 남편이야 휴가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아 이틀 휴가를 내고 가면 그만이지만 연차나 월차의 개념이 없는 직장에서 일을 하는 나는 이틀이나 쉰다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매년 초 달력에서 시아버지 제사를 확인하며 ‘올해는 제발 주말이어라.’를 외쳤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동안 시아버지 제사가 주말에 걸리는 날은 거의 없었다.



몇 년 전 시아버지 제사가 일요일이었던 적이 있다. 월요일 월차를 내고 1박 2일로 혼자 가려는 남편에게 차는 두고 당일치기로 버스로 함께 가면 어떻겠냐 제안을 했다. 휴가를 쓸 수 없어 평일은 힘들지만 주말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야 맘이 편할 것 같았다. 시어머니도 시어머니지만 혼자 제사 음식을 하실 형님께 늘 죄송한 마음이라 내 나름대로 고민을 한 결과였다.


전날 시어머니께 11시에서 12시 사이에 갈 꺼니 함께 음식을 하자 연락을 드렸다. 워낙 성격이 급해 뭐든 빨리빨리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시어머니시라 누누이 당부드렸다.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해 터미널까지 한 시간.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시댁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는 제사 준비를 거의 마치고 계셨다.



“제가 오면 같이 하자고 했잖아요. 벌써 이렇게 다 하셨어요?”

“둘째 며느리가 늦게 와서 내가 다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어머니의 화법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적응이 안 된다. 그날도 시어머니의 말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내 기분이 더 나빴다. 듣는 사람 무안하게..



그 후 나는 가려고 애쓰는 대신 전을 부쳐 보낸다. 아무래도 전이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일이고 형님과 내 담당일이기에 형님의 수고를 조금 덜어드리고자 하는 배려였다. 먹을 사람 없다며 늘 한 접시, 제사상에 올릴 것만 하라는 시어머니. 그래도 어떻게 한 접시만 보내나 싶어 늘 넉넉히 보냈다. 제사를 모신 후 형님네가 가져가야 할 전까지 생각했다. 나 역시 퇴근하고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나마 며느리의 도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올해는 정말 한 접시, 제사상에 그득 올릴 정도만 해서 보냈다. 예전엔 제사를 지내고 형님이 음식을 싸가셨는데 조카들이 타지로 나간 후론 형님이 제사 음식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먹을 사람이 없으니 같은 음식을 며칠씩 먹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전만큼 제사 음식이 맛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기하게 1년에 4번 먹는 제사음식이 해가 갈수록 나 역시 질리는 느낌이다. 이번 추석에도 ‘싸가라’ , ‘싫다’로 시어머니와 형님이 티격태격했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최소한으로 양을 줄였다.



형님이 싸가실 필요 없이 딱 한두 끼 먹으면 끝날 양, 이틀 머무는 남편이 집에 음식이 많다는 이유로 전만 먹다 오지 않을 양으로 맞추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고 시댁에 전화를 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음식 하느라 고생했다.”

“아니에요. 어머니랑 형님이 고생하셨죠. 형님이랑 어머니랑 음식 싸가는 것 때문에 싸우셨다고 해서 추석보다 조금 했어요.”

“아니 그래도.. 여기가 먹을 사람이 많은데 조금만 하면 어떡하냐.”

‘응???’


제사상에 고봉으로 쌓을 양인데 부족했나 싶어 전화를 끊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이 부족했어?’

‘아니. 왜?’

‘어머니도 형님도 담부턴 많이 하라셔서.’

‘됐다고 그래. 먹지도 않으면서.’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적게 했다고 해도 절대 제사상에 올리기에 빈약한 양은 아니었다. 예전보다 적게 했을 뿐. 며칠 뒤 형님과 다시 통화를 하다 전 이야기가 나왔다.


“한 접시만 하라고 늘 그러셔서 조금 적게 했는데 양이 많이 모자라셨어요?”

“그게.. 우리가 여기서 할 때는 한 접시 올릴 것만 조금 해도 되는데 거기서 해서 보낼 때는 그렇게 보내면 빈약해 보여서 엄마가 좀 그러신가 봐. 풍성하게 해서 보내라시네. 지금보다 1.5배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아.. 네. 담부턴 많이 해 보낼게요.”


전화를 끊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1년에 한 번인데 뭐. 그게 뭐 어려워. 다음번엔 말씀처럼 왕창 해 보내면 되지. 먹던 버리던 그거야 내 알바 아니고.’

열심히 맘을 다스리는데 뭔가 낌새를 챈 남편이 물었다.


“형수님이 뭐라셔?”

“뭐, 이런저런.”

“전 이야기는 안 하셔?”

“담엔 1.5배만 더 하래. 거기서 할 때는 한 접시만 해도 되지만 보낼 때는 많이, 넉넉히 보내라시네. 빈약해 보인다고.”

“거참, 이해할 수가 없네. 먹지도 않는 걸 왜 많이 하래?”

‘그러게. 나도 이해가 안 되네.’


전을 많이 하라시면 하면 그만인데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제사상에 올리기 적은 것도 아니고 단지 집에 들고 오는 게 빈약해 보여서라니.


남편의 말에 따르면 제사 후 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기반찬에 밀려서라고 했다. 전이 딱히 맛이 없을 이유도 없고. 대부분의 전은 딱 부칠 때 따뜻할 때 몇 점 먹으면 끝이었다. 상에 올라간 전은 늘 다른 고기반찬에 밀려 그대로 치워졌다. 그렇게 치워진 전은 매 끼니마다 밑반찬처럼 올라왔다. 모두 손을 대지 않은 전은 처분을 위해 각각의 집으로 보내지고 잡탕찌개로 만들어져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졌다. 예전 음식이 귀하던 시절, 대접받던 전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즘의 전은 그리 귀한 음식이 아니니 어쩌겠는가.


그래, 내년엔 전으로 탑을 쌓아 보겠어!!!!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의 추석, 며느리의 명절증후군은 사라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